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영 Mar 29. 2021

엄마 아빠에게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시혜와 동정 없이 문 밖을 활보할 수 없었던 엄마 아빠의 삶을 떠올리다


아빠가 아끼던 칼이 하나 있었다. 하도 갈고 다듬어서 노상 윤이 나던 단도였다. 무섭게 생기긴 했어도 과일 깎아 먹을 때나 꺼내 쓰던 칼이었는데, 아빠는 그걸 집어들 때마다 전국팔도로 여행을 다니며 사냥을 하고 다녔던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꺼내고는 했다. 특히 친구들과 함께 노루를 사냥해서 그 칼로 생간도 꺼내먹고 피도 받아다 마셨다고 하는 부분에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면, 나는 딴생각을 하는 식으로 귀를 막고는 했다. 아직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노루가 간도 내놓고 피도 내놓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만, 허풍도 정도껏 하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억지로 눌러야 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다리 한쪽이 없었다. 열 살도 채 되기 전이라고 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회초리를 내려치고나서 왼쪽 다리 복숭아뼈를 심하게 다쳤다고 했다. 언젠가 낫겠거니 하고 그냥 두었다가 상처가 자꾸만 덧나고 썩어드는 바람에 몇 번이고 잘라내다가 사타구니 아래로 한 뼘도 안 되는 뭉치만 남기고 다 날려 버렸다고 했다.



통상 사람들이 “왼발, 오른발”하면 떠올릴 수 있는 동작이, 아빠한테로 가면 “딱, 따가닥, 딱”하고 복잡한 소리를 내었다. 오른쪽 다리를 앞으로 내딛고 나서, 어깨부터 웨이브를 넣어서 만든 반동으로, 의족을 낀 왼쪽 다리를 앞으로 내밀어 보내면, 지팡이로 최종적으로 균형을 잡는 식이었다. 아빠에게는 그게 한 걸음이었다. 이렇게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는 모습에, 낡아서 마구 삐걱거리는 의족소리까지 요란하게 보태고 나면 아빠를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홍해바다처럼 갈라지고는 했다. 순수하게 길을 비켜주려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놓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았다. 어디서 주웠는지도 모르는 깃털로 장식한 중절모에, 노란색 썬글라스를 매미처럼 낀 아빠는, 내가 보기에도 별난 모습이기는 했다.



아빠는 비도 눈도 싫어했다. 빗물에 젖거나 얼어붙은 길을 걷다가 미끄러져서 머리라도 다치면 영영 집밖을 나서지 못할 수도 있다고 늘 이야기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쪽 다리로만 걸어야 하는 아빠는 균형을 잡는 것 자체가 엄청난 숙제인 사람이었다. 미끄러운 길 위에서 균형을 잡고 걸어야 하는 일은 서커스만큼 힘겨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한한 건,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빗물에 홀딱 젖어서 나타나곤 했던 아빠의 모습이었다. 미끄러운 길 위에서 균형을 잡느라 우산도 없이 온 몸에 힘을 잔뜩 주고 다녔을 아빠는, 홀딱 젖어 돌아온 날마다 꼬박 몸살을 앓고는 했다.



그렇다. 아빠는 참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참지 못하고 밖을 나서야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일거리도 일정치 못했던 아빠가 시간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일로 걷는 것 말고 딱히 무엇이 더 있었을까마는 말이다. 그러나 아빠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자동차 드라이브였다. 아빠가 얼마간 몸담았던 노트공장의 사장 아저씨가 가끔 아빠를 태우고 음식점이라도 다녀오는 날이면 아빠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지를 못했다. 누가 태워주는 자가용 말고 아빠가 쉽사리 접근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라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버스건, 기차건, 그 높은 계단 한 칸을 오르자고 차 문을 붙잡고 한참을 버둥거려야 하는 일도, 차편을 지연시키는 상황을 불평하는 사람들을 모른 척 하는 일도, 아빠에게는 참으로 버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돈 걱정 때문에 안탔을 확률이 더 높았겠지만, 그렇게 따지고 보면 택시는 아빠에게 더욱 엄두도 낼 수 없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엔 아빠 혼자, 지체장애인협회 사람들이던가, 평소 알고 지내던 상이군인 아저씨들이던가, 모다 돈을 모아서 봉고를 대절해다가 기어이 여행 같은 여행을 진짜로 떠난 적도 있었다. 결국 차가 뒤집어지는 바람에 놀지도 못하고 한 달이 넘도록 입원을 해야 했지만 말이다. 머리도 깨지고 갈비뼈도 부러질 만큼 큰 사고였는데, 그 후로도 아빠는 비슷한 여행을 수차례 떠났고, 비슷한 사고로 두어 번 더 입원을 했다. 그러나 어떤 부상도 트라우마도 아빠의 여행에 대한 열정을 주저앉힐 수는 없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아빠의 단도에 얽힌 팔도여행기 중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희망사항일까 되짚어보고는 했다.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던 엄마의 여행을 떠올리자면 마음이 한층 더 복잡해진다. 엄마는 장애라는 씨실에 여성이라는 날실까지 엮어서 풍파를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장애인 교회에서 단체로 여행을 떠나는 날마다 엄마는 물을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오줌이 마려울 때마다 누군가 본인을 업고 나서야만 하는 번거로움을 줄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뙤약볕 아래 갈증 하나도 시원하게 해갈할 수 없는 날, 엄마는 뭐가 그리 좋다고 제일 예쁜 옷을 골라 입고 채비를 서둘렀을까?



엄마는 날 때부터 뇌성마비였다. 영화 <오아시스>에서 배우 문소리씨가 뇌성마비 장애 연기를 해서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온 몸의 근육이 매 순간 뒤틀리고 움직이는 바람에, ‘나 충격 받았소’하고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물론이고, 온갖 근육통과 관절통에 두통까지 달고 살아야 하는 장애라 연기하기가 정말로 쉽지는 않았을 터였다. 2002년에 영화 예고편을 접하고 나서 언젠가 한번 봐야지, 봐야지, 하다가 아직까지 보지를 못했다. 사실 제대로 볼 엄두가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무튼 엄마의 만성 두통은 뒷목의 근육이 장기간 경직되면서 발생했다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 많이 놀랐던 기억이 났다. 뒷목의 근육이 얼마나 꼬이면 24시간 두통까지 일으키나 싶었다. 하기는 엄마의 통증 그 어느 것 하나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보아서 짐작할 뿐이었다.



뇌성마비라고 외출이고 여행이고 아예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엄마는 밖을 나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언젠가 한번, 다섯 살 무렵인가, 엄마와 보건소에 다녀온 날이었다. 무슨 주사 때문인지 검사 때문인지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데, 갈 때와 달리 올 때는 엄마와 나 단 둘이서 택시를 타고 온다고 휑한 거리에서 하염없이 서 있던 장면이랑, 매우 힘이 들고 화가 났다는 기억이 꼭 붙어서 남아있다. 요새는 택시가 이유 없이 승객을 거부하고 태우지 않으면 승차거부로 신고도 할 수 있지만, 그때는 속수무책으로 속만 썩는 그런 시절이었다. “아침부터 여자가 타면 재수 없다고 안 태워 주는가보다.” 그렇게 이른 아침도 아니었는데, 엄마는 자꾸만 칭얼거렸을 나에게 그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었다. 사실 엄마가 배려하고 조심한 것은 ‘아침’뿐만이 아니었다. ‘인생 전체’를 조심하며 사느라 늘 전전긍긍하는 삶 그 자체였다. 누구의 재수를 그렇게 챙겨야 했는지 다시 묻고 싶지만 말이다.



엄마는 어쩌다 나선 대문 앞에서 “병신은 가라”고 돌을 던지는 동네 꼬마들과 실갱이를 벌이다 고모와 친구가 되었고, 결국 아빠와 결혼해 나까지 낳게 되었다. 문밖을 나서는 별 일도 아닌 일이 평생의 사건이 되는, 엄마의 세상을 이해하려면 나는 매번 한참을 용을 써야 했다. 엄마가 그나마 장애인 교회에서 단체로 여행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 환갑이 좀 덜되었을 때이니, 물도 마시지 않고 여행의 즐거움을 고대하는 시간을 만나기까지 수십 년간, 엄마는 그야말로 외출이 사건이 되는, 숨어사는 세월을 살아왔던 셈이다.



나는 엄마 아빠와 셋이서 여행을 다닌 기억이 없다. 내가 겨우 걸음마나 하던 시절, 대구 시내에 있는 달성공원을 방문해서 사진사를 통해 찍어놓은 우리 세 사람의 사진 두어 장을 본 것 같기는 한데, 그야말로 우리가 여행이란 걸 나란히 경험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다 커서 결혼을 하고 차를 사고 나서도 두 사람의 휠체어를 몽땅 싣고 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아주 가끔이나마 병원을 함께 가기는 했었다. 가는 곳곳이 문턱과 계단으로 이어진 그 험난한 여정을 마치고 나서는 딸인 나조차도 매번 몸살을 앓고는 했다.



그렇다. ‘여행’하면 나는 나의 결핍을 떠올린다. 낭만, 여유, 풍부한 견문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려고 하면 할수록 더더욱 말이다. 의족 안에 넣어둔, 그 짧은 다리의 살갗이 빨갛게 벗겨지도록, 길거리를 쏘다니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아빠라는 골짜기와 여행지로 나설 때마다 입술이 하얘지도록 물 마시기를 마다하던 엄마라는 골짜기를 넘지 않고서는 여행의 낭만과 여유를 나는 얘기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시혜와 동정이라는 굴절 없이 마음껏 문밖을 활보하는 것이 불가능하던 엄마아빠에게 과연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여행’은 왠지 나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오래도록 해왔다. 내게 있어 여행은 ‘다른 세계’에 속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오래도록 보이지 않는 어떤 경계 밖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것 같다. 학교 캠핑이고 교회 수련회고 신혼여행이고 잘도 다녔으면서 말이다. 따지고 보면, 나는 경계 밖의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여행의 낭만과 여유를 내 것인 양 누리고 싶을 때마다, 내 안에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이랄 것이 매번 막아설 뿐이었다. 내 인생에서 엄마 아빠의 그늘만 삭제하고 나면, 나도 누구 못지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늘 시달렸고, 그때마다 세상 몹쓸 년이라는 환청이 어디선가 울리는 것만 같았다.



얼마 전에 본 방송 ‘싱어게인’에서 30호 가수가 한 말이 계속 머리를 맴돌고 있다. 자신은 항상 애매한 사람이었다고, 그렇게 아티스트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대중적이지도 않고, 애매한 경계선에 서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존재의 의의를 구체화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애매한 경계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걸 대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는 여기 주단을 깔아놓고 그들을 기다리도록 하겠다며 산울림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를 열창했다.

내 글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여행이 주는 낭만과 여유를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세계와 문밖을 나서는 사건 자체가 모험이 되는 세계, 그 경계 어디쯤 서서 어떤 목소리도 가질 수 없었던 내가, 지금 여기에 주단을 깔아놓고 경계 위 사람들의 묵은 이야기를 기다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엄마 아빠는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행’이라는 단어 앞에서 목마름을 느끼는 사람들의 삶은 어제와 다름없이 진행 중이다. 여행의 낭만과 여유를 마음껏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 말이다. 여행은 즐거운 것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즐거움이 더욱 가혹한 세상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장애인 #이동권


2021.02.15 작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