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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영 Nov 11. 2021

나는 왜 여기서 일을 하나

<2021년 10월 26일, 그룹홈 보육사 일기>

화요일 아침 여덟 시 이십칠 분. 그룹홈의 조용한 아침이 시작되었다. 둘째 셋째 넷째는 아침을 먹고 나서 가방을 메고 학교로 갔다. 재수하는 첫째는 수시 합격 소식을 확인하고 난 후로 점심때까지 늦잠을 잔다. 나는 윤슬이와 오순이가 온 집안에 어질러놓은 물건들을 대강 치운 뒤 세탁기를 돌리고 나서 책상 앞에 앉았다. 줄곧 나만 따라다니던 윤슬이는 이때를 놓칠세라 얼른 내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이모는 글 쓸 거야. 윤슬이 이제부터 이모 방해하면 안 돼." 원래대로라면 나는 지금쯤 오늘 자 일지 정리를 시작해놓고 공문을 살피고 행정업무를 시작해야 한다. 무릎 위에 윤슬이가 올라앉든 말든.



그렇지만 나는 지금부터 글을 쓸 것이다. 그래야 내가 여기서 계속 일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당장이라도 도망을 치고 싶다는 어떤 목소리에 사로잡히고 말 것 같다. 책상 서랍에 넣어둔 형광펜을 꺼내서는 입술까지 노랗게 칠해버린 윤슬이가 어젯밤 열한 시까지 잠도 자지 않고 체력을 자랑하던 것을 생각하면, 그 사이 둘째와 넷째가 쇳소리를 내면서 싸우던 것을 생각하면, 그 사이 서류업무는 손댈 새도 없이,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던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빨리 도망을 가야 한다고 내 안의 어떤 목소리가 자꾸만 속삭이는 것만 같다.



도망갈 기회는 분명히 있었다. 나는 계약직이었다. 2020년 1월부터 15개월간 육아휴직 대체인력으로 그룹홈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룹홈에는 두 명의 보육사와 한 명의 시설장이 일곱 명 이하의 아이들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되어 있다. 그룹홈 일이라고는 하나도 몰랐지만 그간의 경력과 학력을 근거로 계약직 시설장 자리에 앉아서 일을 하다가 된통 고생을 했다. 누구나 하는, 아이 좀 돌보고 집안 살림이나 하는 그룹홈 일이라고 내심 얕보던 마음이 제대로 뒤집어져 버렸다. 각종 감사와 4년치 보건복지부 시설평가를 비롯한 행정이며 노무, 회계 작업은 차라리 나았다. 보육사 한 명 한 명의 애환과,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위염과 심장 두근거림에 수시로 시달리게 되었다.



계약 기간이 끝나자마자, 동굴로 들어가 겨울잠에 빠져버리는 곰처럼 누구도 건드리지 말라는 식으로 휴식에 사납게 집착해 보기도 했지만 나는 가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고는 했다. 그 와중에도 그룹홈에서 헤어졌던 네 명의 아이들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회’에서 겪어왔던 여느 직장들과는 참으로 다른 곳이었다. 그룹홈은. 아이들이 '이모'에게 주는 애정에 한번 맛들리면 이렇게 사람이 위험해지는 것이다.



‘이모~ 오늘 학교 갈 때 한 인사가 마지막으로 집에서 한 인사라고 생각하니 헤어짐이 조금 실감이 나는 것 같아요ㅠ 하루, 이틀이 지나면 더 실감이 나겠죠? 마지막으로 한번 안아보고 싶었는데 이모 눈에 고인 눈물을 보니 저도 아침부터 울 것 같아 빨리 나왔어요    


. 오늘 아침에 저희한테 해주신 계란찜을 보고는 '아 계란찜 만드는 거 배울려고 했는데' 하며 아쉽기도 했어요. 그만큼 너무 시간이 빨리 지나간 것 같아요.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정말 짧고 빠른 시간이지만 제 인생에 기억될 것 같은 사람이었어요. 이모 덕분에 희망도, 용기도 얻고 갑니다. 

 



직장과 나의 계약 종료일이었다. 밤새 그렇게 인사를 해놓고도 아침에 학교로 가던 셋째가 버스 안에서 또 다시 카톡을 보냈다. 원문은 이것보다도 길다. 아이들은 그간 찍은 사진을 모아 앨범을 정리하고 그림과 편지를 준비해서 선물을 했다. 이제는 진짜 마지막이구나 싶었다. 아이들이 모두 학교 가고 없는 빈 집에서 혼자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을 하는 동료와 아이들이 새로 적응을 하려면 한동안 나는 아이들과 연락을 끊어야만 했다. 그렇게 매정하게 떠나야 하는 사람이, 내가 너희를 이렇게나 사랑했다, 하는 보여주기식의 행동을 하며 감정을 마구 뿜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너는 날 기억해야 한다, 뭐 이런 강요밖에는 하등 소용이 없는 짓 같기도 하고 말이다. 그간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만큼 월급을 따박따박 받으며 지냈던 사람으로서 아이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채무감을 주고 싶지가 않았다. 감정에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덤덤한 행동을 부러 연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날, 마지막 날 아침을 수없이 떠올렸다. 그냥 껴안아줄 것을. 꼬옥 껴안아줄 것을. 마음을 담아서 꼬옥.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후회하고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근무시간도 길고, 월급도 좋지 않은 그룹홈 보육사 자리는 자주 바뀌었다. 함께 일하던 동료가 일하는 시간이 더 짧고 월급은 더 많이 주는 곳으로 떠난다고 했다. 절호의 기회였다, 아이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 그 동료가 떠난 자리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지만 시설장이 아닌 보육사 자리에서 정말로 일을 할 수 있겠냐고 혼자서 자꾸만 묻게 되었다. 오죽하면 한달간 너 말고 아무도 이력서를 내지도 않았겠냐고. 그나마 위안을 가져본다면 정년까지 보장받는 정직원 자리라는 정도가 되겠다. 그러나 이 일을 정년까지 한다는 생각은 더욱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마음에 걸리건 말건, 지금 당장이라도 아이들을 보려면, 계약기간이 끝이 나서 더 이상 월급이 나오지 않는다고 버려두고 나온 아이들에게로 돌아가려면, 동료가 있던 그 자리에 꼭 가야만 했다. 큰 아이 둘은 당장 내년에 자립을 해버리고 말 터였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다 보면 아이들은 금방 자랄 것이고 나는 그때 그 집이 아닌, 다른 집으로 기를 쓰고 들어가고 마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나이가 마흔다섯인데, 덤벼보고 아니면 다른 직장을 구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중해야 했다.



시설장이 아닌 보육사로 그룹홈에서 일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 그것도 석 달 전까지 시설장으로 일을 하던 곳에서. 월급이 줄어드는 것도 줄어드는 거지만 업무 권한도 줄어들게 될 터였다. 업무형태도 마찬가지다.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을 하는 시설장과는 달리(수요일은 24시간 근무한다), 보육사는 이틀을 근무하고 이틀을 쉬는 근무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내 시간의 절반은 남편과 내가 낳은 아이들이 사는 집에서, 나머지 절반은 다섯 아이들이 사는 그룹홈이라는 직장에서 잠을 자고 밥을 해 먹는 식으로 두 집 살림을 제대로 살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나의 주력 업무가 행정업무에서 가사노동과 돌봄 노동으로 무게 중심을 옮긴다고 생각을 할 때마다 마음이 참담해지고는 했다. 내가 ‘그런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평생 얼마나 발버둥을 쳐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서 꼭 해보고 싶은 한 가지가 있었다. 그룹홈에서 내가 만난 아이들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기록하는 일이었다. 몇 번의 만남과 취재가 아니라, 지난한 시간을 계속 부대끼고 살아내면서 만든 언어로 엮은 글 말이다. <할매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최현숙이 언급했던 ‘세상의 온갖 정상 이데올로기로 인한 자괴와 낙인을 거둬내고, 그들 안에 기필코 있는 힘과 흥을 끄집어내서 한바탕 즐기는 일’이라는 것을 나도 꼭 한번쯤은 해보고 싶었다. 고통받는 아이들, 불쌍한 아이들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사는 아이들의 그렇고 그런 일상을 함께 살아내고,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을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었다. 아이들만 허락해 준다면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빨리 도망을 가야 한다고 내 안에서 속삭이던 목소리! 적어도 내일까지는 이 대답 듣고 조용히 떨어져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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