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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oo Mar 15. 2020

세 지점장들

제발 PART 2

"지점장님, 더는 힘들어서 못하겠습니다."


난 드디어 한 마디 던졌다. 그는 잠시 한 숨만 쉬다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H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네가 조금 더 버텨주면서 후배가 자리 잡을 때까지 도와줘야 하지 않겠니. 한 5개월만 더 버텨 주렴."


결국 나는 당신 때문에 그만두렵니다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사람이 악한 마음을 가진 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말하지 못했다. 그저 타고난 성격이 급하고 자신이 약하기에 강한 척하는 것이며, 나만 보면 화가 난다는 사람에게 내가 무엇을 더 바랠 것도 없었다.  거기다 이 사람은 내 약점을 정확히 짚어서 이용하려 했으니,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정이 많은 건 내 죄고 구설을 달고 사는 건 어쩌지 못할 인생이니, 너 때문이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충분히 험담을 통해서 소심한 복수는 하고 있었다. 


그 당시 그 지점장과 나는 상대방을 거의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어찌 보면 서로 이용하고 공생하는 사이였던 것 같다. 난 그의 화풀이 대상이자 급할 땐 믿고 찾는 만만한 말단 직원이었고, 난 그가 본인의 편의를 위하여 대외적으로 날 앞세워 주는 것을 이용해 죽이 되든 밥이돠든 내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그에 따른 부작용도 분명히 있었고, 난 스트레스로 인한 탈모와 장염, 위염 그리고 몇 년을 중단했던 우울증 약까지 다시 복용할 지경이 되었다. 


결국 내 사직 여부는 5개월 후에 다시 대화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고, 그 날 이후로 그는 약간의 태도 변화를 보였다. 다시 얘기하지만, 그와 나는 상하의 관계를 떠나서 서로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었으니, 그의 변한 모습이 난 그대로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당분간이 아니라 5개월이라고 구체적으로 기간을 제시한 것부터 평소와는 달리 나에게 화를 잘 내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 분명히 뭔가 있는데... 내가 또 당하고 있는 건데...'


의심은 들었지만, 지점의 영업성과를 올린 덕에 연말 마무리를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고, 그런 회사는 당장 그만둬야 당신이 살아남는다는 가족들의 걱정을 들을 만큼, 난 퉁퉁 부어오른 다리와 배를 움켜잡고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3개월이 지났을 무렵, 그는 더 큰 지점의 지점장으로 발령이 났고 난 소리는 못 질러도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창고를 뛰어다녔다. 오랜만에 3일 전에 먹은 저녁이 소화되는 느낌이었다. 내 성격상 새로운 지점장이 오면 인수인계나 업무에 대한 책임감으로 쉽게 사직하지 못하리라는 것과 이미 자기 재임 시기에 4명이 관두었으니 나까지 그만두면 진급에 문제가 생길 것이 뻔히 보이는데, 그 계산을 왜 안 했으랴. 그는 확실히 나보다 계산은 빨랐다. 난 그가 떠나기 전 마지막 소심한 복수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진행했고 그는 매우 섭섭하다며 새로운 지점에 가서 내 욕도 좀 했다고 들었다. 괜찮다. 나도 많이 했었으니 서로 주고받은 샘 치자.


그 후 약 1년 간 새로 오신 지점장 밑에서 내 자리를 다시 찾아가고 있었지만, 그간 쌓인 스트레스로 인해 망가진 건강은 더 이상 방치할 수준이 아니었다. 새로 부임하신 분과는 업무 외의 시간에는 서로 맘 편히 대화도 나눌 수 있을 만큼 성격이 맞았고 전형적인 외유내강에 강한 사람에게 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부분이 맘에 들어 버티어 보자 하며 몇 개월을 더 일했지만, 어느 날 저녁 야간 근무 중 난 사무실에서 잠시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이렇게 일주일만 더 일했다가는 난 쓰러질 것 같았다. 


날 괴롭게 하던 지난 사람을 원망도 하고 일에 있어서는 지나치리만큼 열정적인 내 성격도 탓해 봤지만, 어쨌든 살고 봐야 했었다. 그리고 계산했다. 적절한 타이밍에 사직 의사를 밝혔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지점장님이 내 집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휴가를 조금 쓰며 쉬고서 계속 같이 일하자고 했다. 그러나 난 이미 떠날 마음이 많이 굳어진 후였기에, 죄송하지만 사직하겠다고 말씀드렸고 그분은 오래도록 내 직장생활에서 잊지 못할 말씀을 해 주었다.


"내가 이렇게 직원 집까지 찾아와 부탁하기도 처음이네만, 무엇보다 자네에게 인간적으로 미안하네."


7개월쯤 후, 그분은 본사에 본인 자리를 걸고 나를 다시 재 채용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그 시간 동안 오히려 집에 안 좋은 일이 많아서 제대로 쉬었다고 보기도 어렵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기억을 잃고 지냈지만, 다시 일해 보자라는 제의를 받는 순간 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럴 수도 있구나. 아직 이 회사와의 인연이 끝나지 않았나 보네...'


다시 하던 일을 시작했다. 이상한 후배님들과 일하느라 욱하는 성격 누르기 힘든 점만 빼면, 순조로운 시작이었다. 출근한 지 몇 주쯤 지났을 때, 난 그분에게 물어봤다.


"회사 정책상 그만둔 직원 다시 부르는 게 불가능했을 텐데요... 왜 하셨어요?"

"내가 인간적으로 미안했어서. 다시 잘해 볼 기회가 있었으면 했네. 성격이 냉정한 편인데, 자네는 꼭 다시 이 일을 해 줬으면 했어. 마음껏 해봐." 그분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난 이렇게 약속을 했다.

"그럼, 지점장님 재임기간 동안은 있겠습니다."

"그렇게 혀. 나 떠난 뒤에는 뭐... 자네 갈길 가게나."


그리고 3년 뒤, 난 또 새 지점장을 만나게 되었고, 그는 내가 이 회사를 다시 떠나야 할 당위성을 주고 말았다. 나도 관리자의 위치에 있으면서 고민했던 부분이지만, 떠나가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사실 많지 않다. 회사 회장이 아닌 이상 같은 월급 받는 입장에서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싶지만, 단 이 세 사람들을 겪으며 한 가지만은 배웠다. 윗자리에 앉아 힘을 가졌을 때 보여주는 행동과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이다. 제발 위로 올라갈수록 마음을 열고 겸허해 지자. 그래야 낫에 베이지 않는다. 우리 모두 스스로의 목적과 이유를 위하여 일을 할 뿐 당신을 위하여 일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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