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 침몰

나를 그와 동질화하다

by 유흔

"길거리에서, 지하철에서, 네가 보여. 마치 나와 함께 있는 것 같아."




내가 그에게 이 말을 처음 건넸을 때, 난 이 말의 깊은 의미를 알지 못했다. 얼마나 깊은 늪 속에 내가 있고, 그 안에서 계속 나를 잠식하고 있는 것인지. 책과 영화를 통해 그의 시선으로 세상과 일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이후, 나는 알게 모르게 그에게, 아니 그들에게 나 자신의 통제권을 내어주고 있었다. 스스로의 삶의 방향키를 그냥 넘겨준지도 모른 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마지막 순간 이전 몸부림을 치고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그런데 난 그 순간 아무런 직감도 갖지 못했다. 매일 저녁 그와의 대화를 통해 나를 살리고, 내가 살아있다고 느꼈던 그 상황들이, 사실은 나를 제대로 죽이는 시간이었던 것을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내 감정마저 통제당한 그 상황에 아무것도 들리고 보이지 않는 그 모습이 나에겐 너무나 자연스러웠으니까.




[보너스, 또 다른 덫]


사이사이, 그는 빠짐없이 투자 이야기를 내게 해줬다. 투자 진행 중인 AI 관련 코인이 곧 성장 궤도에 오를 것이고, 몇 달 안에 메이저 거래소에 상장될 것이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약속한 대로, 몇백 퍼센트 수익을 목표로 우린 그 이후 움직임에 대해선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그 말은, 나를 다독이는 위로처럼 들렸다. 동시에, 나를 더 단단히 묶어두는 닻이 되었다.


투자금이 어느 정도 불어났을 무렵, 그는 VC들과의 미팅에서 좋은 기회가 생겼다고 내게 따로 얘기해 주었다. 투자금이 일정 금액 이상을 넘으면 AI 코인을 추가로 보너스 지급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처음엔 무심한 듯 꺼낸 말이었지만,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상황처럼 보였다. 수익률 그래프에 서서히 취해 있던 나에게, 그 순간 다른 판단의 잣대 같은 건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각본]


매일매일의 대화 중 그는 자신의 이야기도 계속 나에게 들려주었다. 테슬라 주식으로 부를 일구고 이전에 근무했던 바이낸스를 떠난 후, 지금은 코인 전업 투자자로 살아간다고. 평일엔 경매와 전시회를 다니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고아원을 찾아 아이들을 돕는다고.


드라마에서나 보던 삶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고, 그 사람이 지금 내 곁에 있다는 감각. 그 감각은 생각보다 훨씬 강하게 나를 흔들었다. 때마침 그가 조용히 건넨 한마디는, 내 안의 어떤 문을 정확히 두드렸다.


"불쌍한 아이들의 출발선이 남들보다 뒤처져 있는 상황은 막아야 하지 않겠어?"


모든 것이 각본처럼 하나씩 내게 다가왔다. 그의 말들을 들을 때마다, 나도 언젠가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조용히 커져갔다. 가족을 고생시키지 않는 삶. 수익의 10%를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쓰겠다는 약속.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겠다는 다짐이 가슴 한편에 자리를 잡았고, 그 다짐이 깊어질수록 나는 더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이 내 천국이라고 믿었다. 내 투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확신했다. 점점 커지는 투자라는 이름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줄도 모른 채, 나는 스스로 햇볕이 들지 않는 곳으로 얼굴을 밀어 넣고 있었다. 그 곳은 벼랑 끝이었다.


(계속)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