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바디로션의 도포 양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하여 장황한 토론이 늘어진다. R과 H는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동료들의 대화를 듣는다. R과 H가 말을 아끼는 신중한 성향을 가졌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정반대의 성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주제의 이야기가 꺼내질지는 몰라도, 어떻게 이야기가 끝날지는 항상 정해져 있었다. R과 H는 항상 이야기의 판결을 마무리 짓는 판사로써, 특유의 여유 있는 표정과 대중을 사로잡는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며, 이야기를 잘 마무리 짓곤 했다. 이는 R과 H가 상당한 달변가이며 동시에 재치 있고 사교적인 성격의 소유자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째서 오늘의 대화에는 R과 H가 뛰어들지 않는 것인지 동료들은 의아해했다. 그들은 스스로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을 바로잡아줄 누군가의 개입이 절실했다. 그들은 말끝을 흐리며, 곁눈질로 R과 H가 앉아 있는 창고 구석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꼬리를 물기 위해 제자릴 빙글빙글 도는 한 마리의 고양이처럼 토론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그때, 두터운 창고의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경첩이 으스스한 마찰음을 내며 벌어지고, 그 틈새로 얇은 빛이 수줍어하며 바닥을 비추었다. 토론은 급히 종료되었다. R과 H를 대신해 토론을 마무리시켜 준 자의 정체를 모두가 궁금해했다. 그들은 조용히 철문이 열리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틈새가 점차 벌어짐에 따라 수줍어하던 빛은 자신감을 되찾아갔다. 철문이 모두 열리고 그들의 시야에 기름 쩐내가 나는 두툼한 인간의 손이 드러났다. 두툼한 손은 천천히 R과 H를 향했다.
'인간의 손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이것은 구원의 손길인가 혹은 지옥으로 가는 길인가.'라고 생각하며 R과 H는 씁쓸한 표정으로 남은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동료들은 환한 표정으로 R과 H의 퇴장을 지켜보았다. 이들은 R과 H가 구원받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 듯했다.
두툼한 손길을 가진 인간이 잘 달궈진 팬 위에 올리브오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고 R과 H를 그 위에 무심하게 던졌다.
'이봐 친구들, 적당한 바디로션의 도포 양에 대한 너희들의 토론이 그저 방향성을 상실한 탁상공론인 것만은 아니었군.' R과 H는 분별할 수 없는 감정을 얼굴에 드러낸 채 올리브오일이 온몸을 뒤덮는 것을 느꼈다. '인간은 적당한 올리브오일의 도포 양을 찾아낸 것이 분명하군.'
'띵'하는 종소리와 함께 그들은 다시 두툼한 인간의 손에 붙잡혀 새하얀 접시 위에 놓였다. 올리브오일과의 헤어짐에 아쉬워하려는 찰나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R과 H의 피부에 올리브오일 향이 깊게 배어버린 것이다.
두툼한 손을 가진 인간이 육중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R과 H의 주변을 수차례 오간다. 그러더니 R과 H 사이에 노릇하게 익은 E, G, U, B, M, A를 끼어 넣는다. 두툼한 손이 이들을 나란히 정렬한다. 그리곤 날카로운 꼬챙이를 이들의 가운데로 잽싸게 찔러 넣는다.
"구원이야. 우리를 십자가에 매달으셨다." H, A, R이 동시에 외친다. 그들은 Christian이다.
"다 끝났어. 이것이 우리의 최후군." M, B, U, G, E가 힘없이 후창한다. 이들은 Christian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