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리스 로마 신화에 따르면, 나르키소스라는 한 미소년이 있었다. 어느 날 나르키소스는 심한 갈증을 느껴 여느 때처럼 물을 마시기 위해 강가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가 물을 마시려고 손을 강가로 내밀고 고개를 내리는 순간 강가에 비친 아름다운 미소년을 마주했다. 그 미소년은 지금까지 본 어느 누구보다 젊고 아름다웠다. 나르키소스는 조금씩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수면에 얼굴을 들이밀었고, 그러다 결국 물속에 빠져 죽어버리고 만다.
나르키소스가 사랑에 빠진 수면에 비친 미소년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 뒤로 사람들은 이상화된 자기 자신에 집착하는 자를 나르시시스트라고 칭한다.
2.
박 씨는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 그들은 밤새 술잔을 기울이고, 맛있는 안주를 계속해서 먹었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픽픽 쓰러지더니,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그 많은 동창들이 다 쓰러지고 박 씨와 김 씨만 남았다.
"넌 맨날 뭐가 좋다고 그렇게 실실 쪼개냐?" 김 씨가 어눌한 혀놀림으로 말했다.
"좋으니까 웃지. 웃다 보면 좋아지기도 하고." 박 씨는 웃으며 답했다.
"넌 다 좋지? 세상이 다 네 것 같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너 하는 거 보면 그래. 이 나르시시스트야."
"내가 나르시시스트라고? 나는 거울 따위 보지 않아."
"꼭 거울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잖아. 타인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 몰라? 넌 항상 너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행동하고, 결국 꼭대기에 서서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잖아. 지금도 봐. 너 자신이 어마어마한 술고래니까, 항상 술자리에 너만 오면 사람들이 볏짚으로 만든 인형처럼 픽픽 쓰러져. 그들을 보면서 넌 우월감을 느끼고 이렇게 웃고 있는 거 아니야?"
순간 박 씨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김 씨의 말이 맞다. 박 씨가 간 술자리는 항상 모든 사람들이 고주망태가 되어서야 끝났다. 그리고 박 씨는 늘 홀로 술상에 앉아 웃고 있었다. 자신이 늘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온 것인가라는 생각에 박 씨는 혼란스러웠다.
3.
박 씨는 다음 날 오 씨를 찾아가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그러자 오 씨가 웃으며 말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지기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지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어제 김 씨라는 양반이 너를 무척이나 이기고 싶었던 모양이야. 한 번쯤 져주고 그래."
박 씨는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억지로라도 져주라는 말입니까?"
"이 사람아, 억지로 져주라는 말이 아니잖아. 김 씨가 너보다 잘하는 게 하나라도 있을 거 아니야. 그런 자리도 나가라는 말이야. 허구한 날 술자리 가서 남들 기만 죽이지 말고."
박 씨는 김 씨가 자신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지 떠오르기 위해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떠올려내지 못했다. 김 씨뿐이 아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오 씨를 비롯해, 박 씨의 아내, 박 씨가 어제 만난 동창들, 박 씨의 회사 사람들까지 생각나는 모두를 선명하게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박 씨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모두의 단점뿐이었다.
4.
박 씨가 인정한 세상에서 자신보다 나은 단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박 씨의 아버지였다. 박 씨는 살면서 그 어느 분야에서도 아버지를 넘어설 수 없었다. 아버지를 넘어서려면 아버지가 늙거나 병들거나 죽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 또한 무의미했다. 시간이 흘러 50살이 된 박 씨가 50세인 박 씨의 아버지를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박 씨는 복잡한 마음이 들어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 오랜만에 문안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박 씨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수십 년간 들어온 발걸음 소리이다. 그 소리는 박 씨 아버지의 발걸음 소리이자 동시에 박 씨 자신의 발걸음 소리였다.
"그래 무슨 일이냐?" 박 씨의 아버지가 말했다. 박 씨는 고개를 들어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왼쪽 입꼬리는 놔둔 채, 오른쪽 입꼬리만이 비대칭을 이루며 높게 솟구쳐 있었다. 순간 박 씨는 심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저 비대칭한 입꼬리 또한 박 씨가 웃을 때 보이는 입꼬리였다. 며칠 전에 김 씨의 열등감을 폭발시킨 그 비열한 미소였다.
박 씨는 아버지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지켜볼 때마다 자신의 추악한 과거가 떠올랐다. 술상에 홀로 남아 바닥에 쓰러진 동료들을 지켜보던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감 넘치는 보폭으로 땅바닥을 내딛는 특유의 발걸음 소리가 떠올랐다.
박 씨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뒤돌아 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등 뒤로는 박 씨 아버지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분명 자신이 가진 특유의 비대칭적인 입꼬리를 하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으리라고 박 씨는 생각했다.
박 씨는 혼란스러웠다. 분명 김 씨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나르시시스트이다. 그러나 자신과 가장 많이 닮은 자신의 형태를 정확히 비추는 아버지라는 거울을 마주치자 박 씨는 심한 역겨움을 느꼈다. 박 씨는 김 씨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결정했다. 아버지를 마주치는 순간 박 씨는 자신이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라고 느낀 것이다. 그러나 박 씨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박 씨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느낀 역겨움은 아버지에게 투영된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 자신이 절대 넘을 수 없는 단 하나의 존재를 만남으로써, 그렇게 오랜만에 마주친 패배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