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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 Nov 19. 2020

마음의 선을 긋는 일, 마음의 선을 넘는 일

제주한달살기 5일차, 빛의 벙커 : 반 고흐

 

빛의 벙커 <반 고흐> 전시에 다녀왔다.

빛의 벙커는 ‘몰입형 미디어 아트를 선보이는 곳으로

이제는 쓰지 않는 오래된 군사시설 즉 벙커를 활용해 

예술 작품을 선보이는 공간이다.     


누군가에겐 그저 고흐의 그림들이 화면 가득 곳곳에 채워지고 

음악이 나오는 ‘인스타 성지’ 정도로 생각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자칫 잘못하면 나 역시 “와 멋지네..”라는 생각만으로 

전시가 끝날 것 같아 도슨트 투어를 신청했다.


고흐의 불행했던 삶에 대해선, 그리고 작품 세계에 대해선 

이미 다른 도슨트 투어와 책을 통해 조금은 익숙한 편이긴 했지만 

전시의 흐름과 방향성에 대해서 알기 위해선 

도슨트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도슨트 투어를 신청하지 않고 전시를 봤더라면

과연 내가 이 전시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 관람 전 약 30분간 사전 설명이 진행됐고

이후 전시가 상영되는 내내 어떤 그림인지

어떤 음악이 나오고 있는지 왜 이 음악이 나오는 것인지

설명이 덧붙여졌다. 중간에 테오와 고흐가 주고받았던 편지의

필체가 화면 가득 떠오르는 순간엔, 그 편지의 내용까지 

들을 수 있었는데.. 그 순간의 전율이 꽤나 짜릿했다. 


고흐의 삶은,  

특히나 그의 동생 테오와의 관계는.

들을 때마다, 더 깊이 알게 될 때마다. 

사람의 마음에 돌덩이를 얹게 한다.   

고흐의 영혼의 동반자 테오, 그가 있었기에 지금의 고흐가 있겠지.  

  

      




< 마음의 선을 긋는 일, 마음의 선을 넘는 일 >     


1.

살면서 몇 번의 배신을 경험하였을까.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하고

믿었던 결과에 낙담하면서 

포기라는 것을 배운다.


반복된 상황에 지친 사람들은 어느새 

‘난 사람을 믿지 않아’와 같은 

소위 중2병의 마음을 품게 된다.    

 

나는 유난히 뒤통수를 많이 맞는 편이었다. 

주변에서 ‘네 주변엔 왜 꼭 일들만 생기냐’라고 말할 정도로 

바스러지게 마음의 상처를 받는 일도 많았다.  

    

쉽게 마음을 주고, 쉽게 정을 주고 

쉽게 사람을 믿었던 것이 내 실수였다.     

어느새 내가 나의 선택과 마음을 믿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 같다.


나는 지금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 건가?

자신감과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승무원 지망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학생들과 마음을 터놓기보다는 늘 일정 수준 이상의 거리를 두었는데, 

어쩔 수 없이 ‘돈’이 껴 있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어떤 학생과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선생님과 제가 엄청나게 친해졌다고 가정해볼게요. 

그러면 제가 어쩌면, 선생님이 나의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겠지.. 하면서 

자기소개서 하나만 고쳐달라고 보내요. 선생님은 그럼 저와의 관계 때문에 

원래 돈을 받고 하던 일을 무료로 해줘야 하는 거예요. 이미 충분히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원래대로 돈을 달라고 하면 저는 선생님한테 실망할 거고요. 

이 정도 부탁은 들어주겠지, 어려운 것도 아닌데,라고 생각했으니까. 

선생님은 갑자기 무료로 해달라고 연락 온 제자를 내치지 못하겠죠. 

그게 한 번으로 끝날 거 같죠? 또 한 명 정도는 괜찮을 거 같죠? 절대 안 그래요. 

그래서 사회생활엔 선이 필요해요. 일정 선을 넘는 순간 삶이 피곤해지는 거예요."    



나는 그 말에 격하게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론 참 씁쓸했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선 나를 지킬 ‘선’이 필요하다는 사실.

그게 참 슬펐다.       


늘 알게 모르게 ‘ 내 선을 넘어오지 마’ 여기까지만 다가와 

라며 바리케이드를 치고 

나 역시 그 선을 넘어 마음을 주지 못해 

늘 마음이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주고 싶은데 다 주지 못 하는 마음,

받고 싶은데 다 받지 못하는 마음. 

쏟아내고 싶은 감정들이 

내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이 선을 지키며 사는 게 더 힘든데? 


2. 

예전엔 고흐가 참 부러웠다.      

내가 미쳐서 내 귀를 자르더라도, 

그림 한 점 팔리지 않는데도  

남들보다 훨씬 더 두터운 붓질을 해가며 

물감을 소비하는 일을 반복하는데도

자신의 생활비의 반 이상을 지원해주는 맹목적 헌신.      


지금의 내가 조금 부족해 보이더라도, 

나의 가능성과 나를 믿고 무한한 응원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 테오와 같은 사람이

내 주변에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지금 당장의 내 삶이 조금은 고단하더라도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는

그런 고흐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막상. 

나는 누군가에게 ‘테오’ 일 수 있는가. 를 떠올려 보니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참 부끄러운 일이다.     


피폐하고 불운한 천재의 삶을 택하기보다,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선사하며 누군가를 응원해줄 수 있는 

‘테오’의 삶을 사는 게 내가 좀 더 행복하지 않을까.      



     

3. 

보통 테오를 고흐의 ‘영혼의 동반자’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내게 영혼의 동반자가 되어줄 사람을 찾으며 

실망하는 세월을 보냈다면 

내가 누군가의 영혼의 동반자가 되어주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오늘 고흐의 그림 속으로 빠져들며,

내 안의 선을 조금 흐려보았다.     



<정보>

빛의 벙커 <반 고흐> 전은 2021년 2월 28일까지 진행한다.

(그 이전 전시는 클림프였다.)     

고흐의 그림으로 이뤄진 전시가 32분간 상영되고 

그 이후 고갱의 전시가 10분간 상영된다.     

처음 상영할 땐, 음악과 그림에만 푹 빠져 즐기시길 권장.

사진 촬영 (기념사진)은 두 번째 감상 때 하실 것을 추천드린다.

온전히 즐기기 위해선 

42분 +42분 총 84분 정도를 머물러야 하므로 뒤에 일정을 

넉넉하게 잡는 것이 좋다.     

도슨트 투어는 <마이 리얼 트립>을 통해 신청했다. 

한 달 동안 제주도에 머물면서 떠오른 생각들, 여행일지들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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