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고 채우기

작은 실천을 위하여

by 붱draw

내가 사는 도시에 내가 좋아하는 미술관이 세 곳 있다. 그중 하나는 아트 센터로, 미술 작품 전시는 물론 콘서트와 각종 이벤트가 열려 이 도시의 랜드마크처럼 자리 잡은 곳이다. 2024년 10월 말, 향후 2년간 그곳에서 전시할 작품들을 신청받는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달라는 홍보성 이메일이었지만, 읽는 순간 내 마음이 작게 일렁였다.


다른 사람을 위해 만드는 작품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만든 작품을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것. 많은 작가들의 로망 아닌가? 그런 생각이 스치면서, 나만의 아이디어와 느낌을 담은 작품을 만들고 싶던 내 소망이 꿈틀거렸다. 마감일도 1월 중순이라 충분히 도전할 수 있을것 같은 근자감이 들었다. 신청서를 따로 보관해 놓고 그동안 내 머릿속에 있던 아이디어를 일단 적어보았다.


다음은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할 차례였지만, 왠지 그 다음 단계는 좀처럼 진행해나갈 수가 없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유는 명확했다. 이상과 실력의 괴리. 머릿속에 애초에 깔때기에 넣은 조각이 너무 커서 실천으로 나가는 좁은 구멍을 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작은 조각으로 부숴 하나씩 시작했어야 했는데, 큰 조각만 붙잡고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보냈다.


그리고 어제, 자정을 기해 신청 마감일은 지나가 버렸다. 어떤 작품도 구체화하지 못한 채로.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나는 알게 되었다.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하는 것,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하는 연습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사진) 이 글을 쓰고, 바로 시도해본 실험작. 여러 재료를 섞어보고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 콜라주도 시도했다. 반쯤 담긴 우유병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말하고 싶었다. 작은 실천을 통해 점차 채워가며, 불완전함 속에서 나만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의미를 담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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