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그리기
‘이렇게 글을 쓸 시간에 그림 연습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글을 쓸 때 이런 생각이 스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림으로 밥벌이를 해본 적은 있지만, 글로는 아직 없다.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싶어? 글을 더 잘 쓰고 싶어?라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망설임 없이 ‘그림’이다. 그래서 글을 쓸 때면 자연스럽게 위와 같은 생각이 따라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이유...
글을 쓰려면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그림의 방향도 더 선명해진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내 그림 작업에 대한 막연한 생각들을 다듬어 보관해 두는 ‘냉장고’ 같은 역할을 해준다. 마치 글로 만들어진 작업 아이디어 저장고처럼.
대략적으로 내가 그리고 싶은 스타일은 알겠는데, 아직 정확히 표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일단 적는다. 때로는 그릴 대상을 먼저 종이에 적어가며 이미지를 구체화하기도 한다. 얼마 전 인물을 아울로 그릴 때도 그랬다. 인물의 이름, 아울의 종류, 어떤 이미지로 표현하면 좋을지를 먼저 적고 나서야 스케치를 시작할 수 있었다.
새로운 기술이나 방법을 배웠을 때도, 그것을 문자로 기록해 두면 감각이 더 구체적으로 저장되는 느낌이 든다.
예를 들어, 풍경화에서 공기감을 표현하고 싶다면 이렇게 적어둔다.
뒤쪽부터 흐리고 낮은 채도로 시작
중간은 미드톤으로 연결
채도 높은 색상으로 전경 강조
이 글들은 매뉴얼이 되고, 필요할 때 다시 꺼내 쓸 수도 있다. 실제 그림을 그릴 때 머릿속 지도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내가 쓰는 스케치북 중엔 그림보다 글이 더 많은 것도 있다.
물론, 글을 쓴다고 해서 항상 그림이 잘 그려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그림 그리기보다 글쓰기를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위의 질문에, ‘글’이라고 답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고.
3화에서 나는 ‘가스를 채운다’고 썼다.
그때의 가스가 실력이었다면,
지금의 글쓰기는 불을 붙이기 전, 조리 순서를 적어두는 것과 같다.
지금의 나에게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는 분리해야 할 것이 아니다.
글로 그리듯,
그림으로 쓰듯,
서로를 보완하는 창작의 도구이다.
실험 제목: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의 상호 작용 관찰
실험 배경: 실력 축적의 필요성을 자각(3화), 슬럼프를 경험하고 구조의 중요성을 인식(4화).
본격 작업 전 단계에서 사고를 언어화하는 실험 진행.
실험 목적: 아이디어를 문장으로 정리하는 과정이 작업의 명료도와 실행력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확인.
실험 방법: 그림 그리기 전 아이디어 및 이론 기록
대상 설정, 스타일, 색감 방향을 문장으로 적기
이후 실제 그림 작업 진행
관찰 결과: 막연했던 스타일이 언어화되며 선명해짐, 작업 시작 전 심리적 저항 감소
한계: 글쓰기가 곧바로 결과 향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음, 기록이 과도해질 경우 실행이 지연될 가능성 존재
결론: 현재 단계에서 글쓰기는 그림 실험의 ‘사전 설계 도구’로 유효함.
실력(가스)을 채우는 것과 더불어, 언어화하여 정리하는 과정 역시 창작의 일부임을 확인.
다음 실험 방향
설계 단계를 넘어, 실제 훈련 과정을 기록
구조를 세웠으니, 다음은 그 위에 실체를 올려볼 차례.
다음 기록에서는 동화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그리고 싶은 장면을 구체화해 가는 과정을 이야기해 보려 함.
이제는 그리는 손을 움직일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