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순만 Jan 19. 2024

단팥인생이야기

나무위키

가와세 나오미(1969) 감독을 이 영화를 보고 처음 알았다. 일본 영화는 잔잔한 인간애가 있다. 한국영화는 잔인하고 저돌적이고 생각을 틈조차 주지 않을 만큼 박진감이 넘치고 여백의 틈이 없이 독자의 시선과 감정을 영화의 바닷속으로 밧줄로 끌고 가는 물귀신 같이 데려가는 것이 한국 영화라면 일본영화는 어딘지 모자라고 여백이 있고 애잔하면서 인간적인 울림과 내면의 잔잔함을 지닌다.

  한국영화가 해일 혹은 쓰나미처럼 저돌적이라면, 고요한 바다 같은 것이 일본영화다. 지루함 조차 영화의 일부로 데려가서 독자를 지치게 하지만 그 지치게 하는 힘에서 등장인물의 고뇌와 고달픈 인생, 뭔지 모를 참고 인내한 영역에서의 인간애와 감정을 고스란히 담는다.


나무위키

 기와세 나오미 감독의 영화는 '완벽하지 않는 인간의 파편들과 모순된 자아'를 속속들이 파헤치면서 상처를 마주 본다는 것보다 스며들게 하는 '애절한 슬픔의 스밈'이 있어 비참한 현실과 이상의 갈등을 필름 속에 담아내는 힘이 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단팥빵을 굽는다. 이건 한국의 호떡 같다는 느낌이 든다.


  영화를 소개하는 시놉시스(출처 나무위키)는 다음과 같다.




납작하게 구운 반죽 사이에 팥소를 넣어 만드는 전통 단팥빵 ‘도라야키’를 파는 작은 가게. 빵 냄새에 이끌려 우연히 가게에 들른 할머니 ‘도쿠에’는 ‘마음을 담아 만든다는’ 비법의 단팥으로 무뚝뚝한 가게 주인과 외로운 단골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이내 할머니의 비밀이 밝혀지게 되는데…

“당신에게는, 아직 못다 한 일이 남아 있습니까”


  도라야키를 굽는 젊은 남자, 필자가 이 사람을 말하라면 '좀 빈정거리는 현실도피 속에서 자신을 왜곡하지도 못한 채 터질 듯이 답답한 현실을 피하거나 빠져나가지도 못하는 답답한 삶, 그 자체. 사랑도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느끼지 않는 것인지 잘 모르지만 집주인에게 어쩔 수 없이 순종해야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모순된 사람'정도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남자는 혼자 살지만 주인에게 쌓인 빚의 하중으로 인해서 그냥저냥 사는 것이다.

  

   고등학교 진학조차 포기한 소녀에게 실패하고 망가진 도리야키를 챙겨주고, 늙은 할머니를 외면하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따스한 면모도 있다.


  줄기차게 담배를 피우고, 생의 기쁨을 찾아볼 수 없다. 지친 삶에서 낙이라고는 그냥 술을 마시고 쉬는 것 하지만 그는 몸이 망가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을 하지만 버티지 못한다.


  뜻밖에 늙은 할머니는 벚꽃이 필 때 자신이 50년 동안이나 팥을 다루는 일을 했다며 라야키에서 팥을 어떻게 만든 거냐고 묻지만 사내는 영업비밀이라며 가르쳐 주지 않는다.


  할머니는 챙겨드렸던 도리야키 맛을 보고, 자신이 만든 팥을 반찬통에 가져와 맛을 보라고 한다. 사내는 할머니가 일하는 것을 거절했지만 팥맛에 반해서 팥 만드는 것만 도와달라고 하며 취직을 승인한다.


  할머니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벚꽃처럼 흔들리며 기뻐하는 할머니, 어째서 그녀가 그토록 일을 하고 싶은 것인지 사내는 이해할 수 없다.


  할머니의 팥 만드는 정성은 까다롭다. 저을 때 타지 않아야 하고 당분을 넣어 뒤섞을 때도 규칙이 있었다. 콩에게 힘을 내라고 말을 할 때 사내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대답을 하지만 그 말은 콩에게 한 말이라며 생색도 낸다.



 할머니의 손가락이 팥을 너무 저어서 휘어졌다.

소녀(할머니)가 모든 가족으로 버려질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격리된 채 늙어버린 소녀,

그녀는 시를 말하고 벚꽃이 지는 까닭을 안다.

세상에는 공부보다

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행복해지려는 의지와 마음이다.



 얀센병으로 격리된 삶을 살았고 그래서 세상에 나올 수 없었던 할머니, 할머니가 그 작은 가게에서 도라야키를 만들며 맛있는 도라야키에 줄을 설 때 그녀는 세상에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기쁨과 존재의 이유, 그것 즉 일과 사회참여에 대한 기쁨 때문일지도 모른다.


  늙음으로 인해 생겨난 맛의 비결,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 행복할 단서들을  할머니는 소녀에게 전한다. 그리고 사내에게. 그녀가 떠나고 사내는 운다. 사내가 세상에서 방황하는 동안 가출한 소녀는 그를 챙겨준다.  보살핌을 받아야 할 가출 소녀가 오히려 다 큰 어른을 챙긴다.

  이런 면에서 세상은 단정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 어른이 잘할 수 있는 것이 있지만 잘할 수 없는 것도 많다는 것. 마치 아이처럼. 아이의 과정을 거친 어른이 아이들을 돌보지만 그들도 결국 세상을 사는 아이들일 수밖에 없다. 강한 것 같지만 약하고 강한 것 같지만 빈틈 투성이다.



Note

 -행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오히려 행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행복은 지루하고 고단한 시간을 견디어낸 인내의 결실이면서 참고 견뎌온 성과의 순간이며 만족이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아도 어느 날 결과는 내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누군가 봤을 때 그래 보이는 그 자체가 완벽일지도 모른다. 나는 잘 못한다는 사람이 더 잘하는 경우가 더 많은 듯.

- 삶은 완벽하지 않아서 더 완벽것이다. 모자람과 지루함, 불확실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작가의 이전글 타깃은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