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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순만 Feb 19. 2021

'죽고 싶다'는 말의 의미

죽고 싶다는 말을 사랑하고 싶다는 말?

  '죽고 싶다'는 '살고 싶다'라는 말의 거울이다. 호수가 어느 방향에서 주변의 풍경을 담아 출렁거리고, 어둠을 담고, 달을 담고 별을 담는 것처럼. 죽고 싶은 마음은 삶에서 간절히 바라는 희망을 종이처럼 구겨야 하고, 더 이상 실현 가능성을 상실할 때, 몸에서 암세포처럼 자라나는 마음의 병이다.


이미지출처: https://pixabay.com/ko/illustrations/%EB%B0%A4-%EB%AC%B8-%ED%98%B8%EC%88%98-%EB%8B%AC%EB%B9%9


  우교수의 심리학 수업은 늘 긴장되면서도 빈틈없는 기쁨을 주는 수업이었다. 어느 교수보다 인자했고, 그런 심리학 교수의 수업을 수강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많은 마음의 따스함을 갖게 했는지 모른다.


  "사랑의 반대말을 심리학에서는 죽음이라 하죠. 살고 싶다는 의미는 다른 의미로 사랑할 수 있고, 그런 의미를 위해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는 듯합니다. '죽고 싶다'는 의미는 달리 '사랑하고 싶다'는 의미로 욕구불만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교육전공자들이 유독 많았던 수업에 나는 다수의 여학생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남학생이었지만 수업시간에 형식적 인사말 고는 감정을 뒤섞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달빛 호수 이미지출처:https://tailstar.net/gallery_wallpaper/23906645

 

  곰곰이 나의 생각의 영역은 '사랑과 죽음'에 대한 생각의 영토를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니체, 자궁회귀본능, 밖으로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다소 민망하지만 '남자가 여자를 찾는 것은 여자의 자궁에서 탄생한 존재이기 때문이다'는 말이 떠올랐다. 니체의 말로 기억하지만 어디서 읽었는지 들었는지 출처조차 불명확하다.

   성적인 담론(sexuality narration)은 잘 건드리면 참 아름답지만 잘 못 건드리면 왜 이런 글을 썼나 하는 민망함으로 치닫기 때문에 조심스러워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탄생, 음양의 조화, 남과 여, 낮과 밤, 사랑, 이별, 죽음에는 '육체적인 사랑'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논쟁을 피할 수 없다.


   자궁 속에서 성장한 아이는 사랑에 의해서 탄생한 것이지만 아이가 유산되거나 죽음을 맞이 했을 때는 출산과 맞먹는 물리적 고통을 여자는 감뇌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고통을 여자가 아닌 내가 짐작만 할 뿐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폭풍우치는 바다에 한 척의 배, 죽음에 떠 있는 하나의 고귀한 생명-이미지출처https://www.pinterest.co.kr/pin/737183032740807989/

  출렁이는 죽음의 바다 위에 있는 한 척의 배, 그 배는 언제나 뒤집힐 수 있다. 배가 생명이라면 바다는 죽음이다. 그런 측면으로 접근해가면 칠흑 같은 어둠에서 빛처럼, 삶의 저변 혹은 주변(surrounding)에는 죽음의 늘 공존해 있는 것이다. 출렁이는 바다는 죽음처럼 고요하지만 어느 때 그 죽음도 거칠고 사나우며, 폭풍으로 몸서리를 치며 삶을 뒤흔는다. 삶을 풍랑을 만나 거대한 파도에서 그 파도를 정면으로 넘어서기도 하고, 죽음의 파도에 쓸려 싸늘한 시신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타이시, 저우 https://epochtimes.today/move-over-tiger-moms-meet-three-amazing-mothers-of-ancient-china/


  죽음은 어쩌면 경건(piety)하고 엄숙(dignity)하며 웃음 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비정하고 싸늘하며 삶 속에서 가장 귀중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얼마나 덧없고 쓸모없는가를 깨닫게 한다.





https://www.google.com/search?q=ciriminal+punishment&tbm=isch&ved=2ahUKEwiL7KvUtvTuAhUVAt4KHWxOCaEQ2

  자식의 이익을 얻기 위해 상대를 기만하고 거짓으로 그 사람을 매장하고, 그 혀가 진실을 말하지 않으며, 쓸 만큼 쓰면 매정하게 버리는 비열한 사람은 많다. 인간은 본래 착하고 선하다고 하지만 그 착함의 이면에는 사악한 가면을 쓰는 사람도 적지 않다. 더욱이 착한 척하면서 사악한 사람은 더 무섭다. 기독교 식의 표현을 하자면 천사의 가면을 쓴 사탄을 경계 조차 하지 않는 까닭에 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식으로는 지옥에 떨어지지만 도교나 동양적인 입장에는 나쁜 일을 하면 그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나 가장 아까는 사람에게 수십 배가 넘는 벌이나 곤경을 주고, 대를 이어 그 자식들에게 그 사람이 잘 못한 것에 대한 죗값을 치른다고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감금해 놓은  살아가는 것은 안닐까. 마음의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유치장에 갇혀있는 것 못지않는 불행이다.

https://www.nbcnewyork.com/news/local/nyc-martial-arts-teacher-gets-7-years-for-raping-12-year-old-s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세상 자체가 감옥이 될 수 있다. 생각의 감옥? 그게 무엇인가.


A:살아 있다고 다 살아있는 사람인가

B:죽었다고 다 죽음이라 단정할 수 있는가


  A는 살아있지만 제대로 살고 있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B는 어떤 사람이 죽었지만 기억 속에 간직되어 있는 환영이나 기억, 그러니까 살아있는 자에게 죽은 자는 기억 속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 일 것이다.  죽은 사람도 그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이 모두 떠날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죽음을 맞이 한다.  B의 경우 추상적인 환상을 내포하고 있는 반면, A는 '존재에 대한 억지'가 다분히 존재한다.


  

http://cult-tv-lounge.blogspot.com/2018/11/the-time-tunnel-2002-pilot-episode.html

 어둡고 긴 터널을 억지로 버텨야 할 때가 있다. 지치고 힘들고 끝나지도 않을 것 같은 터널 속에서 움츠려 들고 위축되고, 답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난파된 배처럼 우리 삶에서 지난 삶의 과오와 실수, 실패, 절망할 수 있는 모든 요인들이 현재에 밀려와서 현재를 파괴시킬 수 있다. "어떻게 그렇게 힘든 일을 견뎌왔어? 그래도 잘 버텨온 것이고, 그 시간의 터널을 거의 빠져나온 것이나 다름없어. 넌 그 역경의 시간을 잘 이겨냈고, 또 잘해 낼 거야!" 라는 식의 따뜻한 위로를 해주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이런 말을 듣고 위로가 된다면 그만큼 자신이 힘든 과정을 겪어왔다는 증거일 수 있다.



http://m.jeolla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584031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윤기 잃은 머리카락처럼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갈까. 끊임없이 무엇을 위해 목표를 만들었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는가. 자식이, 부모가, 형제가, 그 누구도 자신의 삶에 대해 행불행을 논할 수는 없다. 각자의 삶은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그 누구에게도 있는 것이 아닌 까닭에.



   넉넉한 여백을 가지지 못한 인간의 삶,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삶과 죽음'은 왜 사는가 하는 존재론적 질문이다. 그래서 늘 방법론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라고,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지를 고민하라고. 시간 되면 원치 않아도 죽음을 올 것이며, 열심히 사는 것에 몰두하다 보면 잘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문득문득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고, 나는 어째서 먹고 있고, 나는 어째서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거나 문자나 소식을 기다리고 있고,  그 사람이 오고, 그 소식이 온다고 해서 나의 삶은 윤택하면서 행복할 수 있는가.


https://www.myjewishlearning.com/article/how-to-pray-for-happiness/


  행복의 기준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다만 그 사람이 어떻게 느끼고 있고,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그 사람은 똑같은 일을 겪으면서도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 있다. 카르페디엠Carpe Diem이라고 외치면서도 우리의 삶의 실상은 그저 분주하기 짝이 없고, 스스로를 위한 여백의 시간은 없으며, 함께 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도 어느 때는 그런 마음조차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우리의 행복에 대해서 어쩌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모른다. 불행에 책임을 지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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