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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순만 Nov 16. 2023

풍수론 01 한국풍수의 기원논의

공주대 문화제 보존학과, 문화재 전무위원 서정석 교수 <강의노트> 논의


01.


풍수지리는 동양학적인 사고방식으로 단순히 묏자리나 찾는 낡은 방식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음택과 양택에서 음택은 묘지를 찾는 것이지만 양택은 주택을 찾는 것이다. 즉 죽은 사람을 위한 터가 음택이라면 살아있는 사람의 공간을 찾는 것이 양택이다. 풍수지리는 인간의 길흉화복이 그 개인에 처해 있는 기운에 따라 좌우된다면, 풍수지리설은 음양론과 오행을 기반으로 주역체계를 논리구조로 삼는 중국과 한국의 전통적 지리과학이다.


02.

  좋은 것을 추구하고 나쁜 것을 피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상지기술학이다.  풍수지리의 기원이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과정을 거쳤으며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 풍수의 정의는 기원만큼이나 설이 많고 풍수지리상 용어들이 쓰기 시작한 시점이 언제이며, 풍수의 본질인 지기(地氣)를 느끼기 시작한 시점이 언제인가 하는 질문이다.

  

03.

  교과서적인 풍수지리의 전적들에는 풍수의 정의는 탁옥부(琢玉賦)에서 '수많은 지리서가 있으나 그 뜻을 묶으면 음양이라는 두 개념 사이에 무르는 것이니 음양의 기묘함을 꿰뚫어 알 때 사람 사이에 나아가 지선(地仙)으로 행사해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라 했다. 그 요체를 음양으로 파악했다.

설심부(雪心賦)라는 책에는 '지리의 이법에는 좌향 방위에 대한 것이 논리를 세우는 처음'이라 해서 방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음양이냐 방위냐 하는 부분이 풍수에 논쟁이다. 청낭경(靑囊經)은 음양을 강조한다. 금탄자(金彈子)라는 책에는 '지리에서 땅을 보는 것은 다 용이 주이고 혈이 그다음이며, 사성과 수가 그다음이라 보았다. 즉 용혈사수(龍), 혈(穴), 사(砂), 수(水)를 봐야 하는 견해다.

  곽박의 금낭경에서 장사를 지낸다는 것은 생기를 타는 일이라 했고, 장열(張說)이 주해하기를 '만물의 생겨남은 땅속의 것에 힘입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했다.


04. 


  풍수의 기원에 대한 논쟁은 한국에서 자생되었다는 자생설과 중국에서 들어오지 않았는가 하는 유입설이 있다.


  첫째 자생설은 구석기시대부터 그 연원을 찾고 있는데 한반도는 산이 많아서 산악과 산신사상이 구석기시대에 생겨났다고 본다. 산신과 산악의 숭배사상으로 지석묘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음양오행설의 발생배경을 3신 5제 사상에 두었고, 3 신 5제 사상은 풍수지리설을 발생하게 된 모체라고 보고 있다. 이후 신라말기에 중국문화의 교류로 풍수가 더 발전했다.


  삼국유사에서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인이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보았다'는 것은 한울을 건설하기 위해 그 땅의 풍수지리를 보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삼위태백은 삼산 즉 주산(主山)과 좌우 청룡 백호를 뜻한다.


05.


  풍수의 기원을 삼국 건국이전의 상고 때부터 발생한 시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풍수를 국토나 국토로부터 한 개인의 주택, 분묘에 이르기까지 그 위치가 산천의 지상과 형세에 따라 길흉화복이 있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풍수지리로 보는 것이다. 

   땅에는 만물을 화생하는 생활력이 있으므로 땅의 활력 여하에 따라 국가나 국토나 인새의 중대한 영향을 준다고 보았고, 음양팔괘(陰陽八卦)와 오행생기의 관념을 토대로 하여 일종의 학문으로 발전된다. 그 기원은 중국의 상고시대까지 소급해야 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당나라 풍수설을 도입하기 이전에 풍수설이 존재한다.

   

  한민족도 지상에서의 생활했고, 자연스럽게 주택을 선정할 때나 나라를 선정할 때 방위와 안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토지선택의 방법이 점점 추상적이고 전문적으로 진도 되어 상지술(相地術)로 발달하였다고 본다. 



06.

  일례로 백제의 시조 온조가 도읍을 정하는데 그 내용이 바로 다음과 같다.



百濟始祖温祚王, 其父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弟二女妻之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長曰沸流, 次曰温祚.【或云, 朱蒙到卒夲,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 所生子來爲太子, 沸流⋅温祚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濵, 十臣諌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髙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難得之勢. 作都於斯不亦冝乎. 沸流不聽分, 其民歸弥鄒忽以居之. 温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해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 중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듯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비류는 이를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강 남쪽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이었다.


  자료출처:우리역사넷 (history.go.kr







삼국사기 -백제의 건국이야기 원전


백제의 건국 이야기

百濟始祖温祚王, 其父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弟二女妻之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長曰沸流, 次曰温祚.【或云, 朱蒙到卒夲,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 所生子來爲太子, 沸流⋅温祚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濵, 十臣諌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髙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難得之勢. 作都於斯不亦冝乎. 沸流不聽分, 其民歸弥鄒忽以居之. 温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圡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都邑, 鼎定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 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髙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觧扶婁庻孫, 母召西奴, 卒夲人延陁勃之女. 始歸于優台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温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䢖昭二年春二月, 南奔至卒夲, 立部號髙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間基創業頗有内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及朱蒙在扶餘, 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大子, 以至嗣位焉. 於是沸流謂弟温祚曰. 始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助成邦業, 其助成郅業其勤勞多矣. 及大王猒丗,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欝欝如疣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别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彌鄒忽, 以居之.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大守公孫度, 以女妻之, 遂爲東夷強國, 未知孰是.】     

『三國史記』卷13 「百濟本紀」1 溫祚王


   백제(百濟)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였다.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세 명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도록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 하였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월군(越郡)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 중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듯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비류는 이를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강 남쪽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었다. 위례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 훗날 내려올 때에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라 고쳤다. 그 계통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姓氏)로 삼았다.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인(卒本人)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하였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쳐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위업을 도와 어머니의 조력과 공로가 크다. 그런데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 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 살 곳을 선택하여 별도로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마침내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는 모두 “동명(東明)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帶方)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漢)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도록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삼국사기』권13 「백제본기」1 온조왕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compare.do?treeId=010101&levelId=hm_008_0030




07.



 역사학적 관점에서 풍수의 기원을 통일신라이후에 중국으로 부터 도입되었다고 본다. 현존하는 문헌중 풍수지리설의 존재를 입증하는 최초의 기록은 승복사비문(崇福寺碑文)이다. 숭복사비는 다른 비문은 대체로 선사들의 탑비인 것과 달리 왕실에서 세운 절에 대한 기록이어서 왕실과 중앙 귀족들의 불교신앙을 파악을 수 있는 자료이다. 왕릉을 조영하기 위해 이미 세워져 있는 사원에 옮겨서 까지 길지를 차지하는 풍수리리설의 성행을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당나라와 교류속에서 전래져 온 것으로 파악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산이 많이 도처에 명당이 있다고 할 수 있을 절도로 풍수의 조건에 적합한 곳이 무수히 많아 풍수지리 사상의 성행과 폐해를 가져온 중요한 이유가 된다고 본다. 신라통일 이전 삼국시대에는 아직 그러한 술법과 사상을 받아들인 듯한 형적은 없다고 단정한다.


   부도는 부처님의 사리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이다. 진신사리가 묻는 장소가 사리고 탑이니 곧 무덤이고 또한 탑이다. 하지만 탑은 불처님 사리과 스님의 사리를 탑이니 부처님 사리는 불탑, 스님의 사리를 승탑으로 구별하는 구할 수 있다. 즉 이 부도에 어떤 스님의 사리인가를 구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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