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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순만 Jan 03. 2023

무녕왕릉 지석02

무녕왕릉지석에대하여


 백제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풍수사상을 근거하여 분묘를 설치했다고 고고학자들은 추정한다.


< 그림 1. 무녕왕릉 >

[ 무령왕(武寧王)은 백제의 제25대 왕(재위 501년~523년)으로 성은 부여(扶餘)이고, 이름은 사마(斯麻) 혹은 융(隆)입니다. 501년 선왕인 동성왕이 시해된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왕위에 즉위한 무령왕은 귀족세력을 통제하고 담로제(擔魯制)를 통해 지방통치를 강화하여 내정을 안정시켰으며 백성에게 귀농과 정착을 장려하여 농민층의 안정을 이루었다.]


  '송산리 고분군을 도굴했던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1970)은 무령왕릉을 그 근처에 있던 6호분을 주위에서 감싸기 위해 만든 언덕으로 착각하여 더 이상의 도굴을 진행하지 않았고 이 덕분에 다행히도 무령왕릉은 도굴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https://www.gongju.go.kr/kr/sub06_10_03_01.do 공주시 무녕왕릉 발굴 50주년 관련기사)


'1500년 백제를 깨우다'라는 기사에 무녕왕릉의 발굴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무령왕릉은 백제 연구에 중요한 단서로 고대 왕릉과 왕비의 장래을 어떻게 합장을 했는지 추정할 수 있다.


둘째, 무령왕릉에서는 엄청난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그  유물은 총 108종 4,600여점으로 이중에서 12점은 국보로 지정되어 백제의 수준 높은 문화예술 및 정신문화를 살펴 볼 수 있다. 이는 백제의 역사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셋째, 지석의 내용과 고분의 형식, 출토유물들을 통해 6세기 전반 백제의 대외관계에에서 중국 남조 양나라와의 교류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무령왕의 시신을 안치한 관을 통해  백제의 매장풍습, 도교사상에 입각한 매지권을 추정할 수 있다.


  무녕왕 즉위 후 고구려의 수곡성을 공격하였으며 이후 직접 출정하여 한강 유역의 성을 장악하는 등 어느 정도 한강 유역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하여 남쪽으로는 가야 지역에 대해 적극적인 공략을 추진하여 대가야 지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대내외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521년 무령왕은 양나라에 보낸 국서에 “누파구려 갱위강국(累破句麗 更爲强國)” 즉, 백제가 고구려를 여러 번 격파하여 마침내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한다. 이에 대해 양나라는 무령왕을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指節 都督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으로 책봉함으로써 무령왕과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견고히 한다. 이로써 무령왕은 475년 웅진 천도 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대내외적으로 백제의 위상을 되찾았다.(공주시 무녕왕릉 발굴 50주년 기념 기사 참조)


<그림 2. 무녕왕릉 지석>


  상기 그림은 무녕왕릉 지석이다.  왕과 왕비 각 2면의 지석으로 발굴되었다. 지석의 내용을 살펴보면 왕과 왕비의 행상을 기록했다.

<그림 3. 무녕왕릉 지석 탁본>


    령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62세 계묘년 5월이라 기록되어 있다.  해설을 상세하게 해석된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寧東大將軍百濟斯 / 麻王 年六十二歲 癸 / 卯年五月丙戌朔七 / 日壬辰崩 到乙巳年八月 / 癸酉朔十二日甲申 安厝 / 登冠大墓 立志如左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 5월 임진일인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 8월 갑신일인 12일에 안장하여 대묘에 올려뫼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무령왕 지석 앞면>

  1971년


<그림 4. 무녕왕릉 지석 후면>
<그림 3. 무녕왕릉 후면 탁본>

 무녕왕 지석 후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未=================亥
丁=================壬
午=================子
丙=================癸
巳=================丑
==戌=============己==
==辰==乙==卯==甲==寅==

<무령왕 지석 뒷면>



  무녕왕 지석을 살펴보면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에서 무(戊)를 술(戌)로 오기한 것으로 보이며, 상기 세겨지지 않는 두 글자는 경(庚)과 신(辛)으로 추정된다. 지석 뒷면에 세겨진 것을 '간지'도라고 했고, 왕릉이 서쪽에 있어서 세기지 않았는가 추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왕릉이 있다고 경신을 세기지 않을 이유는 없으니 그 시대 세긴 사람의 의도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뒷편 지지를 추정해 보면 자오묘유에서 자는 북방, 오는 남방, 묘는 동방, 유는 서방인되 비석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림 4. 무녕왕릉 왕비  지석>


<그림 5. 무녕왕 왕비 지석>


丙午年十二月 百濟國王大妃壽 / 終 居喪在酉地 己酉年二月癸 / 未朔十二日甲午 改葬 / 還大墓立 / 志如左(병오년 12월 백제국 왕대비가 천명대로 살다가 돌아가셨다. 정서방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기유년 2월 갑오일인 12일에 다시 대묘로 옮겨서 정식 장례를 지내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무령왕비 지석 앞면>


錢一万文右一件 乙巳年八月十二日 寧東大將軍 / 百濟斯麻王 以前件錢 詢土王 / 土伯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 / 買申地爲墓 故立券爲明 / 不從律令

돈 1만매 이상 1건.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상기의 금액으로 토왕, 토백, 토부모, 천상천하의 이천석질의 여러 관리들에게 문의하여 남서방향의 토지를 매입해서 능묘를 만들었기에 문서를 작성하여 명증을 삼으며 모든 율령에 구애받지 않는다.


<무령왕비 지석 뒷면>


고고학 강의 교수 서정석 강의자료를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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