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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순만 Jul 07. 2016

몰두와 집중 concentration

뭐든 미치도록 빠지지 않으면 우리는 미처버린다

We will be crazy if we can't concentrate on anything. Be crazy at something you are interested in. 


뭐든 집중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삶은 해체와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성과는 집중의 결과였다. 몰두하지 않으면 마치 조각난 자동차의 고물덩어리들 처럼 달리지도 못한 채 폐기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탓하거나 자책한다. 사랑도 그 무엇에 몰두하려는 인간의 감성과 신체적인 반응이다. 진정한 몰두란 사랑에 빠지는 것 처럼 오직 그것에 전념하는 것을 의미한다. 목표와 집념이 아닌 절망과 폐허의 함정에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다. 자기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이 없다면 그 사람은 헛도는 체인처럼 헛되게 시간을 감는다. 그 사이에 인생의 값진 시간은 조각나도 빵부스러기가 되는 것이다.

망각 forgetting


비움은 채움보다 더 힘들다

Emptiness is harder than fillingness for everyone.


 잊어버리는 것에 우리는 자책한다. 모두 기억하면서 살면 우리의 생각은 뒤엉켜서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다. 불안증anxiety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삶에서 실존에 대한 질의는 존재의 의미로 나타난다. 상실을 감당하기 힘들어 하고 극복하지 못하면 절망은 그를 품에 안는다. 숨이 막히도록 답답해도 벗어날 수 없는 지경이 되고만다.

  언제 부터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 뜻대로 될 것이라 믿어왔던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일 수록 마음에 들지 않을 뿐더러 외곡되거나 채워지지 않는 텅 빈 공허감은 가중된다. 자기 스스로를 우리는 믿지 못한다.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이지만 덜 듣고 더 말한다. 듣기에 서투른 사람은 말 할 때 뭔가 자존감을 갖지만 어느날 후폭풍으로 자신의 말들은 자신을 겨냥한 칼날이 되기도 한다.


  공허함은 대상으로 부터 듣지 못할 때 온다


 우리가 언제 제대로 대화를 한 적이 있던가. 대화란 '존재를 인식하는 집'이라고 로버트 볼튼Robert Bolton은 말한다(2016, 어떻게 말할까, p.24 ). 존재의 인식은 실존에 의거, 인간 관계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누구는 대우받지도 존경받지도 못하고 누구는 존중받는다. 인간은 우쭐해지고 자신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속성이 있다. 그 누구도 자신이 존중받지 못하면 모멸감과 수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내공'이란 자신이 무엇이든 자신감있게 해낼 수 있는 능력의 탄탄한 힘이다.


   여백이 없으면 그릴 수 있는 상상도 없다. 시간과 공간이 없으면 쓰레기같은 쓸모없는 것들이 채워져 있다. 이제 비우고 여백을 만들어라 새로움이 거기에 있다.



소중한 것 조차 소중히 여길 줄 모르면 그 사람에게 소중한 것이 남아 있지 않다. 수많은 것들을 쉽게 놓쳐 버린다. 옥석을 가리지 못하고 분별력은 시간이 지날 수록 불명확하다. 나는 안 그럴 것이라 믿지만 실상은 더 중요한 것을 놓치기 쉽다. 사업의 성공과 실패도 그런 것이고 인생도 그렇다. 소중한 사람도 소중한 그 무엇도 존재하지만 그것이 누구인지도 무엇인지도 분별하지 못한다. 그것은 대상이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내게는 가장 소중하다는 생각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비탈진 길 아래로 차를 타고 가는데 개 한마리가 헤매고 있었다. 휘험한 상황, 자칫하면 찻길가이므로 교통사고라도 나면 죽을지도 몰랐다.

차를 세워서 개를 실어 안전한 곳에 내려 놓으려 했다. 근처가 집일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그곳은 외딴 곳이었다. 개는 큰 눈으로 금방이라도 울듯이 내려 놓는 나를 원망했다. 개를 무지 싫어하는 까닭은 어린 시절에 개에 대한 추억 때문이었다.

  늘 키우던 개는 정이 들었고 가족이나 다름 없었다. 소년시절 들판을 뛰어다녔고 연날리기도 했고 개는 외톨이던 내게 유일한 친구이자 마음을 쏟을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한 여름에 복날 그 개는 음식이 되었다. 이럴 수가 사람들은 이렇게 잔인할 수 있구나 싶었다.

  개가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제발 데려가러는 표정이었다. 문득 가족에게 버려진 내 모습같았다. 그건 동일시효과 sympathy effect 같은 것이었다. 몸 어느 부위는 상처투성이였다. 나는 세상에서 더 이상 적응하지 못했다. 부정응자, 나는 그렇게 나를 낙인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어울리는 것도 사귀는 것도 친분관계를 억지로 유지 하는 것도 싫었다.

  우리는 누군가를 배려하는 것에 길들여지지 않았고 학습되지도 못했다.


웃을 수 있는 것은 배려와 인내 끝없는 사랑에서 비롯된 선물이다


 개는 버려졌다. 소외감, 모욕감, 혼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늘 인식한다. 그것을 벗어날 길이 이기적인 내가 아니라 이타적인 배려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주인에게 버려진 개는 세상이 깨져버릴 듯한 상처로 인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마음에서 떠나면 방치되고 버려지고 결국에 무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나는 개처럼 버려졌다.

  개는 잘 짓어야하고 꼬리를 쳐야하고 순종해야 한다. 주인에게 마음에 들지 못하면 버려질테니까. 그러나 꼭 그래야 할까. 주인이 개를 한 생명의 대상으로 소중한 존재로 여겨주지 않으면 그 개는 탈출할 수도 있다.



 이제 상실된 자아에 대한 희망에 불을 지펴야 하는데 성냥이 없으며 여력이라 연료도 없다. 한동안의 시간이 지나야 한다. 회복이란 시간이라는 약을 먹고 기다려야 한다. 텅 빈 공허과 절망의 시간도 필요할지도 모른다. 반성과 성찰이 없는 회복는 거만함만 낳을 뿐이다. 애잔하고 초췌하고 어색하고 무안하지만 지나쳐야 하는 시간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것을 과정은 반드시 필요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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