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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순만 Apr 07. 2023

3.기독교의 인간론

제 3 장 은혜 언약안의 인간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창세기」 1장 26절       


저자 이효범/공주대학교

                  

1. 구약 성서에 나타나는 인간   

 

1) 하나님의 자기 결의로 창조된 인간

  구약 성서에는 통일된 인간론이 집성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성서의 모든 독립된 문서는 저마다 독특한 인간상을 지니고 있을 뿐 하나의 발전해 간 인간상의 흔적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을 향해 분명하게 질문을 제기하는 성서의 본문 자체에서 인간에 관한 주요 개념들의 의미를 찾음으로써 성서의 인간론이 지닌 기능들이 드러날 것이다.

  독일의 유명한 구약학 교수인 발터는 이러한 방법으로 인간의 창조를 창세기를 통해서 그리고 개인의 출생을 시편과 욥기 등을 통해서 이해한다. 그는 인류의 창조를 나타내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내용들은 시대적으로 수백 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고, 전자를 ‘제관계(諸關係) 문서’ 후자를  ‘J(제이 혹은 야웨)문서’로 구별한다.


[( 참조: 제이J문서는 오경의 주요 설화자료 중 하나이다. ‘J’라는 기호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이름 여호와(Jehovah)에서 그 머리 글자를 따온 것으로 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이 J문서의 특징이다.(성서백과대사전, p.700.) ]


 이런 구별에 대해 또 다른 프랑스의 유명한 성서 주석학자인 즐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창세기의 첫째 이야기(우리가 제관계 전승 즉 P전통이라고 규정하는 것)는 온 세상의 창조를 장엄하게 이야기하며, 질적으로 점점 향상되어 가는 순서로 결국은 창조의 정점인 존재의 맨 꼭대기에 아담과 에와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세상의 왕은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이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模像, 신을 닮은 인)으로 나타나며, 그 하느님과는 같을 수 없지만 다른 모든 동물들을 지배할 수 있는 존재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대단히 심리학적인 것이지만 어떤 점에서는 대단히 유치한 내용으로, 창세기 2장에서 하느님이 반죽하고 형상을 만들어 준 아담과 (그 아담의 갈빗대에서 뽑아 낸) 여자를 그리고 있다. 우리는 이것이 성경 안에서 주어진 내용을 최초로 종합한 이야기라고 해서 야휘스트(Yahwist)전승, 즉 J전통에 속한다고 비판적으로 말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창세기 1장부터 2장 3절까지는 하느님을 지칭하는 히브리어가 복수형인 ‘엘로힘(elohim)’으로 나와 있는데, 2장 4절 이하에서는 단수형인 ‘JHWH’(이것은 히브리어 자음만 나열한 것으로 ‘야웨(Jahw도)’라고 읽는다)로 나와 있어, 창세기가 최소한 두 가지의 다른 출처로부터 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창세기 2장을 쓴 J기자가 보고하는 인간의 창조 내용에는 출생의 과정과 관련된 내용이 전혀 없다. J기자의 관심은 인간이 처음부터 자기의 인간됨을 깨달아야 했다는 점으로, 그는 인간됨의 여러 관계들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인간은 태양신의 눈물 방울에서 생성된 존재도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 것이다. (뉴 톰슨, 뉴 톰슨 관주 주석성경 편찬위원회, <관주 주석성경>, 성서교재간행사, 1987(이 장에 나오는 성경의 인용문들은 이 책에 따름), 창세기 2장 7절.) 그러므로 인간이 어떤 상황 속에서 살게 되더라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말은 인간은 연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짐승과의 관계이다. 동물들은 인간을 돕는 자로 인간에게 제공되었고, 인간이 그들의 이름을 불러서 동물의 세계를 정리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이름이라.”


셋째는 신이 인간에게 아내를 창조하여 줌으로써 형성된 동료와의 관계이다. 여호와는 남자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아내를 만들었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에게 일회적인 결혼 관계로서 아내가 된다는 의미이며, 여자는 본래부터 남자에게 속한 것임을 강조하는 예이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내적인 결합을 반영해 준다.


넷째는 인간과 밭에 있는 흙과의 관계이다. 인간은 아담adam이고 밭의 흙은 아다마adama로서 둘 다 dm(붉다)라는 동일한 어원에서 나온 비슷한 발음이다. 인간은 흙에서 창조되었고, 그 밭의 흙을 경작해야 하고, 죽을 때에 그 밭의 흙으로 되돌아간다.


창세기 2장의 이 모든 관계는 인간과 창조자와의 근본적인 관계에서 온 것이다. 창조자는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였으나, 인간 남녀하고만 특별히 대화하였다. 다른 피조물과는 대화한 일이 없다.

창세기 1장인 제관계 문서가 묘사하는 인간 창조에서도 하나님과 인간 관계가 주도적이고 포괄적인 주제를 이루고 있다. 하나님은 뭍동물과 똑같은 날에 인간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물고기와 새들에게 선포하였듯이 인간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을 내리고, 인류와 뭍동물에게 똑같은 양식을 지정해 주었다.

그러나 동물은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질 때 땅 속에서 솟아 나왔다. 반면에 인간은 하나님의 자기 결의에 의해(하나님은 인간창조를 위해 자기 결의를 3번이나 반복한다), 이미 주어진 어떤 재료와도 상관없이 또 땅과의 공동 작업도 필요 없이,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창조되었다. 축복의 내용도 28절의 인간의 것과 22절의 물고기와 새들의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번성의 능력을 준 것은 똑같지만 인간의 축복에는 정복과 치리治理의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 특히 통치의 위탁은 인간과 짐승의 결정적인 차이를 나타내 준다. 또한 인간만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는 직접 말씀을 하셨으나 동물에게는 간접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인류는 처음부터 양성으로 창조되었고, 양성으로서의 인류가 다른 모든 피조물을 자유롭게 다스리라는 지배의 위탁을 받았다.


이처럼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에 관한 내용들은 다른 세계관의 전제들과 설화의 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강조하는 세 가지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즉 인간은 동물과 직접적으로 가까운 입장에 속해 있으나, 동시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특수한 태도 때문에 인간은 끝없이 동물과 구별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인간은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 인류를 이룰 때에야 비로소 완전하고 효력을 발생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종으로서의 인간의 창조 이외에 시편 139장은 고대의 창조 사상들을 현실화시켜서 개인의 출생이라는 구체적인 관점으로 끌어들였다. 시인은 하나님이 캄캄한 밤까지도 대낮같이 밝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이 도피할 수 있는 캄캄한 곳이 전혀 없다는 확신을 설명하기 위해서 근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자기의 사사로운 출생 설화를 인용하고 있다.     


 주께서 내 오장육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     

  

  이곳에는 인간이 생성되는 밀실로서 모태와 나란히 ‘땅의 깊은 곳’이 등장한다. 이것은 인간이 곡식처럼 땅 속에서 솟아났다고 보는 고대의 신화적인 인간 생성론을 반영하는 것이다.

욥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개인적인 창조 신앙의 고백이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새롭고도 더 정확하게 출생과 출산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만드사 백체를 이루셨거늘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 하셨나이까. 가죽과 살로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뭉치시고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여기서 특수한 표현은 쏟아져 나온 젖이 엉긴 젖처럼 단단하게 응고된다는 표현이다. 이것은 젖과 같은 정액이 여성의 성기 속으로 쏟아져 들어간다는 면과 수태 후에 나타나는 태아의 단단한 몸집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저자는 출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아버지나 어머니 또는 양친의 뜻에 돌리지 않고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 하셨나이까”하고 여호와에게 소급하고 있다. 하여간 욥기 10장은 시편 139편과 같이 창세기의 일반적인 창조 신앙을 자기 자신의 출생과 관련시켜 자신의 유래를 이해하고 있다.     

2) 네페쉬와 바사르, 그리고 루아흐

이렇게 창조된 인간은 네페쉬nfsh(혼魂)와 바사르basar(육肉)라는 두 요소로 이루어진 단일 유기체이다. 본래 목구멍을 뜻하는 네페쉬는 복잡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인간 속에 있는 생명의 원리를 가리킨다. 히브리 성서에서 결국 이 말은 ‘인간의 내적 존재’ ‘살아 있는 존재’를 의미하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네페쉬’가 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네페쉬’는 의식의 중심, 생명력의 중심으로서 생기 있는 활동을 하게 되는 구체적인 인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다음으로 몸, 육, 육신, 육체를 뜻하는 ‘바사르’는 ‘네페쉬’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결코 혼에 대치하는 개념이 아니다. 사람은 바사르를 통해 영혼을 알게 된다. 바사르는 인간과 동물이 다같이 소유한다. 그러나 그 일차적인 의미는 인간의 몸을 지칭하며, 무한하신 하나님과 구별되는 연약하고 덧없는 존재로서의 제한된 인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적 인간 이해는 헬라적 관점과는 달리 이른바 영과 육이라는 이원론적 긴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영육 복합체에 지속성을 주는 것이 ‘루아흐ruah(움직이는 공기, 바람, 입김, 숨결, 영)’이다. 루아흐가 없다면 네페쉬­바사르란 복합체는 살 수 없고 그 존재를 지속할 수 없다. 이 용어는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 사용된다. 하나님의 루아흐는 세상에서 일하시며(사사기 40장 7절) 생명을 창조하시고 지탱케 하신다(시편 33장 6절, 104장 24~30절). 인간의 루아흐는 살아 있는 존재를 지탱시켜 주는 활력으로 위에서 내려온 것이다. 그러므로 루아흐는 인간이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생활 원천이 된다. 히브리인들은 앓는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에는 오직 루아흐의 많고 적은 차이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병은 죽음의 시작이라고 여겼다. 죽음은 이 루아흐, 즉 숨결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죽을 때는 루아흐가 최대한으로 빠져나가 마치 혼자서 서 있을 수 없는 빈자루처럼 된다는 것이다.

성경의 부활에 대한 착상은 이와 같은 인간학적인 전망 속에서 이루어졌다. 고성소古聖所인 ‘셔올sheol’에서 인간은 생활력이 거의 다 상실된 희미한 삶을 산다. 그렇지만 이들은 네페쉬이다. 이러한 네페쉬의 지속되는 존재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새로이 루아흐를 불어넣어 주시고 그를 당신의 영으로 다시 채우실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부활이 주장될 수 있었다.     


3)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여러 해석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만들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형이상학적, 신학적, 성서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을 가리키는데, 여기에 따라 사람이 만들어졌으므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나 속성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내재한 하나님의 본질은 영혼, 정신, 로고스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적 존재의 문제로서 인간의 죄를 강조함과 동시에 인간이 신의 모습과     똑같이 만들어졌음을 인정한 미국의 신학자 니버Rienhold Niebuhr는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의 정신적 능력 안에 있는 고도의 자기 초월성’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초월성이란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하나님과 만남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사람이 처음부터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교리학에 있어서 타율주의와 사변을 배격하였으며 기독교적 사회 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독일의 신학자 틸리히Paul Tillich는 바로 이 사실을,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세기 1장 26절)에서 ‘우리의 모양’을 가리키는 시미리튜도 similitudo(닮음)의 의미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그 의미 부여에 있어서 다양성을 띤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 등은 하나님이  주신 어떤 ‘실체적인 요소’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다. 어거스틴은 이성과 자유의지가, 루터와 칼빈은 어거스틴의 입장을 수용하되 에베소서 4장 24절과 골로새서 3장 10절에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과 지식들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신정통주의자인 에밀 브루너E. Brunner와 칼 바르트Karl Barth는 하나님의 세 위격간의 관계성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사람은 이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또 다른 사람들 간의 인격적인 관계성 속에서 존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마틴 부버M. Buber의 대화주의에서 영향을 받아, 한 인간이 세계 안에서 태어나 다른 인간을 만나는 것이 그의 삶의 시초라고 주장한  브루너는, 하나님의 형상을 ‘형식적 하나님 형상’과 ‘실질적 하나님 형상’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형식적 하나님 형상은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격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물음에 책임 있게 응답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그러나 사람은 실질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 안에 있는 존재로서 사람 자신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르트도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존재와 구조, 성향과 능력 등에 관한 인간학적 기술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거부하고 인간존재의 만남 기능 속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장 27절)에서처럼,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 대해 나와 너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또한 인간과 인간이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서로 대면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대면적 관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그리고 하나님 안의 세 위격 간의 관계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성서적 해석을 들 수 있다. 폰 라트von Rad는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가 어떤 것이냐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전후 관계로 보아 그 목적에 강조점이 있다고 보았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은 목적은 세계의 통치권을 인간에게 맡기기 위한 데 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여기서 하나님 모습이 ‘초상’을 뜻한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의 위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님이 그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는데, “남자와 여자를 지어냈다”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함께 어울리어 ‘공동체’를 형성하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4)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구약 성서의 문학은 천 년 동안에 형성된 것으로 그 양식이 다양하게 바뀌고 견해 차이가 복잡하며 용어마저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사명에 대한 대답은 동일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와 심판자로서, 인간의 창조자와 보호자로서 여호와는 사람들을 자기의 사자로 내세워 인간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알려 주었다.

우선 인간은 죽음의 것이 되지 않고 살도록 생명으로 결정된 존재이다. 여호와는 위협적인 죽음의 운명 속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수고한다. 여호와는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오직 생명을 원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문제가 구약 성서에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인간이 살 수 있도록 결정되었다는 방향은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동료를 사랑하고 모든 증오를 극복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자기 동료들과 함께 살도록 결정되었다. 이런 사명을 그르치지 않기 위하여 이스라엘은 언제나 새로운 지시를 받았다. 그것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나그네도, 심지어 원수도 배제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또한 인간은 인간 이외의 피조물을 지배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사명이 있다. 하나님의 찬양이 중지되는 곳에서는 인간이 자기의 허약성과 자기의 능력 사이에서 나타나는 긴장을 오인하게 된다. 그런 곳에 있는 사람은 다시 비인간화되고 만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인간의 궁극적인 사명을 시인은 자기의 찬양으로 포착하였다. 그 찬양이 「시편」으로 전승되었다. 여기서 시인은 역사와 피조물 속에서 겪은 경험을 통하여 성소로 들어가며, 하나님 앞에서 털어놓은 모든 탄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홀로 자비로우신 분’을 찬양하고 있다.

인간은 찬양을 함으로써 아직도 탐구하여 얻지 못한 비밀을 얻는다. 그것을 통해 자기의 부분적인 지식은 하나로 온전해진다. 그러므로 찬양은 미지의 지식을 제공하며, 늘 위협받는 자기의 지식이 완전한 상태에 이르도록 해준다. 이처럼 찬양은 인생 최후의 사명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세계 통치의 궁극적인 사명도 나타난다. 즉 다양하고 분리된 온 인류가 사랑에서 결합되어야 할 사명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연합될 때 비로소 성취된다. 찬양에서 인간의 사명이 진실로 인간적인 성취에 이르게 된다.                

    

2. 신약 성서에 나타나는 인간     


1)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


신약 성서 속에 나타난 인간에 대한 근본 교의들은 죄와,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와, 그에 뒤따르는 은총에 의한 초자연적 차원에서의 삶의 새 모습과, 인간의 세계 종말론적 재창조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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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간주하고, 엄격한 회개를 위한 신의 요구에 인간을 순종케 한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구원과 멸망 사이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스도는 심판자이자 자애로운 아버지인 신 앞에 인간 존재의 모순을 드러낸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결정적인 위기로 몰아넣는다. 그리스도는 구체적이며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인간과 관계하며 그러한 인간에게 회개를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은 단적으로 말해서 회복되어야 할 존재이다. 인간이 회복되어야 할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인데, 창세기에는 그러한 인간을 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죄인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인간 그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병든 자로 보았다.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2) 자기 부정과 자기 희생의 길, 바울의 인간론

타락과 구원 사이에 있는 인간의 구원이 갖는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후에 요한, 바울 등 사도의 가르침으로 계시된다. 바울은 로마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대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 등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 숨어 있는 신학적 인간론을 명확히 한다.

불트만R. Bultmann에 따르면 바울의 그리스도 구세론인 그리스도 신학은 인간의 구원 신학이고, 그의 하나님에 대한 모든 주장은 동시에 인간에 대한 주장이다. 따라서 불트만은 바울의 신학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인간학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은 구원 신학 속에서 인간을 그리스도가 오기 이전의 구원되지 않은 인간과,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된 인간, 즉 성서의 용어로는 ‘옛인간’과 ‘새인간’으로 대립시킨다.

바울이 대립시키고 있는 두 인간 유형을 논하기 전에, 우선 우리는 바울이 자신의 생의 체험인 기독교의 특유 경험을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 철학적 용어를 구사하여 표현했기 때문에, 그의 인간에 대한 설명의 진의를 파악하는 데는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래드G. E. Ladd는 바울의 인간관이 세 가지 방식으로 이해되어 왔다고 말한다. 그 첫째는 주로 지난 세대의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던 삼분설적三分說的인 견해요, 둘째는 헬레니즘적인 이원론을 배경으로 하여 인간을 혼과 몸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는 견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몸, 혼, 영과 같은 용어들은 분리될 수 있는 여러 능력들이 아니라, 전인全人을 언급하는 다양한 표현 양식들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다. 이처럼 래드가 지적한 바울의 인간론에 대한 해석의 세 가지 방식들을, 통용되는 조직 신학적 술어로 바꾸어 표현한다면, 삼분설三分說(de trichotomie), 이분설二分說(de dichotomie), 그리고 단일론單一論(de monotomie)으로 불려질 수 있다.

인성 구조에 있어서 이른바 삼분설적 개념은 헬라 철학적 배경 속에서 배태되었다. 이상계理想界와 현상계現象界를 이원론적으로 파악했던 헬라의 우주관은 인간 이해에 유추 적용되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몸과 영의 관계는 신과 물질계의 관계로부터 유추 해석되었는데, 신은 제3의 중간 존재인 로고스를 통하여 물질계에 연결된다고 생각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도 영은 혼을 매개로 하여 몸과 연관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매개체로서 혼은 육과 가까워지느냐 아니면 영과 가까워지느냐에 따라 물질적 존재로 간주되기도 하고, 비물질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여 결국 영육靈肉적인 성격의 것으로 파악되었다.

인간이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삼분설적인 견해에 의하면, 첫 번째 요소는 물리적인 육체로서 인간은 이 물리적인 본성을 동물 및 식물과 더불어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이며, 인간은 한층 더 복잡한 물리적 구조를 소유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요소는 혼이다. 혼은 이성과 감성의 근거요 또한 사회적 관계를 가능케 하는 기반으로서의 정신적 요소이다. 동물은 초보적인 혼을 가지고 있으며, 이처럼 혼을 가진다는 사실이 인간과 동물을 식물로부터 구별시키는 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혼은 동물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더 큰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나, 그 종류에 있어서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별시키는 요인은 인간이 단지 더 복잡하고 발전된 혼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세 번째 요소인 영靈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한다. 이는 종교적 요소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영의 일들을 분별하고 인식하게 한다. 또한 영적인 자극에 반응하게 하는 개인적인 영성靈性의 좌소坐所로서 이 영으로 말미암아 인격적인 특징이 비로소 혼 속에 자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두 요소, 즉 물질적 관점의 육체와 비물질적 요소인 영이나 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 견해는 삼분설보다 훨씬 더 폭넓게 주장되었다. 뉴톤 클락은 인간은 분명히 두 개의 서로 다른 실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인간은 영이나 혼과 동일시 될 수 있는 것이지 몸과 동일시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헤롤드 더울프도 영육이원론을 제창한다. 이러한 종류의 이원론은 혼이 몸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다행히 몸의 부활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은 사후死後 영혼이 몸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상태를 잠정적인 것으로 인정한다.

단일론자들은 인간 존재를 여러 요소들로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불가분적不可分的인 유기적 통일체로 파악한다. 단일론자들은 삼분설이 영육 대립의 이원론적 배경을 가졌고 따라서 인간 본성의 통일성을 깨뜨렸다고 비판한다. 마찬가지로 이분설 속에도 여전히 이원론적 긴장이 표출되어 있다고 말한다. 즉 이분설도 필연적으로 이원론적이어서 결국은 중재의 변증법을 포함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인간 본성의 통일성이 깨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에 기반을 두어야 할 인간 이해가 인간의 구조 속에 분극적 긴장이 내포되도록 의도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원성에도 불구하고 구조의 통일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철학적 논의를 접어 두고, 이제 다시 바울이 구분하는 두 유형의 인간에 대해서 말해 보자. 바울이 나눈 두 개의 인간 그룹 가운데 하나는 육이 명하는 바에 따라서 사는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영에 따라 사는 인간이다. 전자는 자연적인 인간이고, 회개하지 않은 자이며, 아담으로부터 유래한 세상의 사람들로서 구원받지 못한 자이다. 후자는 회개한 자이며,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한 하나님의 아이들로서 구원받은 자이다.

바울은 첫인간이 살아 있는 영혼(psyche)이 되었고,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pneuma)이 되었다고 한다.     

기록된 바 첫사람 아담은 생명있는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이 귀절은 두 아담이 병행하고 있다. 먼저 첫사람 아담은 생명있는 존재이고 본질상 흙에서 나왔으며 흙으로 만들어지고 땅에 속하며, 천상 왕국에 맞지 않는 모든 것, 즉 육신, 혈육, 부패 같은 것을 특징으로 갖는다. 반면에 뒤에 나오는 마지막 아담은 그리스도로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이고 천상 세계에 속하며, 천상 왕국에 맞고, 우리를 이 천상 왕국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인간이다.

인간은 육에 따라 살 수도 있고, 영에 따라 살 수도 있다. 만일 인간이 육을 중심으로 살아가면 죄가 된다. 바울에게 있어서 죄의 기원은 역사적인 기원이라기보다는 실존적인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아담은 인간의 대표로서 모든 인간과의 연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죄의 기원은 피조된 인간이 자기의 인간된 본분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처럼 되려 하거나,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지 않고 섬기려 하거나, 모든 창조 질서에 위배되는 행위로서, 이것은 창조주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는 도덕적 악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의식적으로 범함으로써 세상에 들어왔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죄의 기원을 소급하여 올라가면 천사의 세계까지 가게 된다. 타락한 천사의 우두머리격인 사탄은 원래는 피조된 천사들 중 가장 완전하고, 지혜롭고, 권세 있는 세 천사(미가엘, 가브리엘, 루시펠)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않았다. 그렇게 타락한 천사는 하나님과 사람의 대적자가 되었다. 결국 하늘에서 추방을 당하여 암흑과 세상의 왕이 되어 사람을 유혹하고 범죄를 저지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을 사망에 이르게 하려고 맹활약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범한 최초의 죄는 사탄의 유혹을 받아서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生과 사死가 인간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있음을 교시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가장 완벽한 의미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하면 영육간에 영원한 죽음에 처해진다는 사실이 인간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통해 명시된 것이다. 인간은 간교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다. 하나님이 만든 들짐승 가운데 뱀이 가장 간교했는데, 사탄은 이것을 매개체로 하여 계약의 당사자인 아담을 꾀려고 하와에게 접근하여 그럴듯한 거짓말로 유혹하였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최초에 지은 죄의 결과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인 참지식과 의義와 거룩을 상실하였고, 전인격이 부패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영적인 선행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이 죄책을 짊어지고 사망의 법 아래 종 노릇하게 되었다. 생명 나무로 접근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다. 이후 저주받은 세상에서 얼마 동안 인생고를 겪으면서 살다가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바울은 이러한 기원적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죄의 종이 되었고, 죄는 관계의 파괴와 상호 분리인 사망을 낳았다고 말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죽음)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이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을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삶의 덧없음과 일시성을 하나님을 배경으로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허망한 것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바로 옛사람이다.

  이에 대립되는 새사람이란 하나님을 중심으로 그를 향해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원리’에 지배받는 사람이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인 것이다. 바울은 서신 속에서, 생명력을 주는 영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인의 가장 긴밀한 결합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러한 새사람을 ‘그리스도 안에’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여 묘사한다. 즉 그는 죄와 죽음의 지배하에 있던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통하여 구속받은 사람임을 강조한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에 참가한 자이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음과 부활의 경험을 나눈 자이다. 이 사람이 바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자이다.

바울은 이러한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 영은 자연적으로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 때 얻은 선물이다. 인간이 스스로 새로워질 수는 없다. 하나님은 재탄생의 목욕과 성령의 새로워진 집에 의해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인간이 비물질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삶의 태도와 목표를 가진 전인이 된다는 뜻이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노와 악의와 훼방, 또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쫓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바울은 빌립보소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한 삶의 원리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그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모시는 자는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기 희생과 사랑이 넘치는 교제와 서로를 섬기는 겸손과 박해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은 믿음의 성숙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마음의 중심에 두는 것이 삶의 기쁨 그 자체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새롭게 하는 힘으로 인간은 미래에, 영혼뿐만 아니라 몸을 포함하여 전인이 부활한다. 바울은 ‘부활의 몸’에 관해 말할 때 현재의 몸과는 달리 ‘영적인 몸’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고, 자신의 정당성을 버리고 신의 자비에 응하여,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새로운 체험을 했을 때,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는 죽음을 넘어 부활이 약속되어 있으므로 희망이 있고 또한 진정한 자유와 화평이 있게 된다.

바울이 말하는 새사람은 공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자주 사용된 ‘제자’의 의미와 어떤 점에서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하늘로 승천하기 전에 그의 지상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명령 가운데 하나를 그를 따르던 추종자들에게 위탁하였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종종 지상 명령으로 불리는 이 명령 속에서 예수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자기가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고 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예수가 요구하는 전형적인 인간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과연 제자는 어떤 존재일까?

마가는 예수의 열두 명의 제자를 제외하고 아무도 제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들은 예수의 부름을 받고 자신들의 친족이나 동료 또는 모든 생계 수단을 버린 사람들이다. 즉 한층 더 고상한 가치를 위해 자기 희생을 무릅쓰는 헌신의 행위와 신앙의 결단을 수행한 사람들이다. 마가는 제자라는 명칭을 좁은 의미로 사용하고 그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과거의 열두 제자 이야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오늘을 살아가는 제자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래서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제자라고 부르고 있다. 즉 예수의 개인적 제자뿐만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에 들어와 예수의 인격과 가르침에 헌신하는 신자들은 모두 제자인 것이다.

사실 예수는 제자만 부른 것이 아니라 무리들도 불렀다. 또 그는 제자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무리들도 가르쳤다. 그리고 제자만 예수를 좇은 것이 아니라 무리들도 예수를 좇았다. 이렇게 그는 제자나 무리들에게 동일한 교훈을 주었고 동일한 요구를 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무리와 제자를 함께 부르고 이렇게 요청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그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자기 부정과 자기 희생의 길은 단지 열두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름지기 그를 따르겠다고 결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요청되는 길이다. 그래서 만일 무리들 가운데 예수의 부름을 듣고 그와 같이 자기 부정과 자기 희생의 길을 좇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그들은 비록 제자라는 명칭이 붙지는 않을지 몰라도 분명히 예수의 제자인 셈이다.    

 

3) 인간에 대한 인간의 부정과 긍정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따라서 죄와 죄책 그리고 수치의 옛 삶은 끝나고 거룩함과 용서와 자유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인정한다면, 새로운 자아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요구는 명료하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예수의 제자들은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 이것과 반대로 어떤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좇지 않으면 그는 그 분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로마의 모든 식민지에서 십자가형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십자가형을 선고 받은 모든 반역자들은 자기 십자가나 또는 적어도 십자가용 목재를 지고 형이 집행되는 곳까지 가야만 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은 사형 선고를 받아 형장으로 가는 사람의 입장에 자신을 놓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만일 어깨에 십자가를 메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면 가고 있는 곳은 단 한군데, 바로 십자가 처형장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며, 신앙으로 복종하며, 남을 위한 존재로서 고난을 함께 하는 것이 현대의 신앙이며 새로운 인간의 모습이라고 역설한 본 훼퍼 Dietrich Bonhoeffer가 말하듯이,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을 부르실 때 그는 그 사람에게 와서 죽으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의 명시적인 명령 곁에는 자기를 긍정하라는 암시적인 명령도 있다. 복음서를 전체적으로 읽는다면 예수가 인간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졌다는 인상을 받을 수 없다. 오히려 정반대임을 알 수 있다. 예수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하고 추한 것들에 주의를 집중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경멸하지 않았고, 아무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세상이 존경하지 않는 사람들을 존경했고, 문둥병자들을 가까이 오도록 했으며, 어린아이들을 사랑했고, 창녀가 그에게 기름을 붓고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을 허용했다. 그리고 그는 섬김을 받으러 세상에 온 것이 아니고 섬기러 왔으며, 끝내 사람들의 대속물로 고난받고 죽기까지 하였다. 예수가 인간을 위해 죽기로 결심한 것보다 인간에 대해 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한 것은 따로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처럼 인간은 인간에 대해 부정과 긍정을 함께 행하여야 한다면,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 인간은 부분적으로는 창조의 결과인 하나님의 형상이고, 부분적으로는 타락의 결과인 손상된 형상이다. 우리 인간이 부인하고 포기하며 십자가에 못박아야 할 자아는 타락한 자아, 곧 예수 그리스도와 양립할 수 없는 모든 것이다. 또 인간이 긍정하고 존중해야 할 자아는 인간의 창조된 자아, 곧 예수 그리스도와 양립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때문에 참된 자기 부인은 자멸의 길이 아니라 자기 발견의 길이다.

죄를 부정하는 자기 부인이나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하는 자기 긍정은 모두 자기 희생의 수단이다. 십자가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 안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결국 자신을 주는 사랑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예수는 시종일관 역설적으로 이 ‘사랑’으로 인간을 부른다.

한 율법사가 예수에게 다가와 율법 가운데 어느 것이 크냐고 물었을 때 예수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 말은 전인격을 가지고 온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명할 뿐 아니라, 이웃을 하나님 사랑하듯이 동등하게 사랑하라는 의미이다. 그러면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며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더 읽을거리>     

▪송기득, <인간>, 한국신학연구소, 1984.

▪심상태, <인간 : 신학적 인간학 입문>, 서광사, 1989.

▪Albert Gelin, 이성배 역, <성서의 인간>, 분도출판사, 1984.

▪Jose Comblin, 김수복 역, <그리스도교 인간학>, 분도출판사, 1988.

▪Hans Walter Wolff, 문희석 역, <구약성서의 인간학>, 분도출판사, 1981.     



  신앙의 영역은 늘 믿음을 담보로 한다. 믿느냐 마느냐가 기독교인들의 관건이다. 불교적 측면에는 깨달음을 통한 해탈인 것이 비아여 신앙faith의 여부이다.

  갖가지 종교의 영역은 자신에게 복이고 기도를 통해 복을 받기 바라는 기복이다.


  복을 한국민족문화대사전에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복이 ‘운수’나 ‘행운’과 관련된 것으로 풀이되고 있는 것은 복이 인간의 힘을 초월한 천운(天運)에 의해서 저절로 돌아가는 기수(氣數:길흉화복의 운수)로 이해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 복은 ‘아주 좋다’거나 ‘오붓하다’는 말에서 풍기고 있는 것처럼 필요한 것이 허실(虛失) 없이 두루 넉넉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복이란 한자는 원래 ‘시(示)’와 ‘복畐’의 회의문자(會意文字)이다. ‘시’는 하늘[天]이 사람에게 내려서 나타낸다는 신의(神意)의 상형문자이고, ‘복’은 복부가 불러 오른 단지의 상형문자라 한다.

‘복’의 한자 어원도 역시 복의 뜻이 가지는 두 함축, 곧 사람의 힘을 초월한 운수라는 뜻과 오붓하고 넉넉하다는 뜻의 함축을 풀이해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슨 일이든 잘 풀리기를 바라는 것은 종교적 영역에서 동일하다.

  

  믿을 만안 요인은 신뢰를 쌓음으로서 형성된다. 종교적 영역에서도 종교 자체 보다 종교를 통한 활용은 복을 기저로 하여 정신적 힐링과 치유를 목적으로 한다.

  사후세계에 천당이다 지옥이다 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면 이는 천당에 갈테니 착하게 살아라는 의미다. 죽고 나서 천당에 가니 지옥에 가니는 삶을 착하게 살라는 근원적인 강제적 강요이면서 부분적 협박이고 위협이라도 인간 자체가 선한 존재라고 단언할 수 없다.

   

  4단 7정이나, 사성제, 세례, 입적, 입도, 108배, 예배 등은 종교적 의식ritual에서 중요하다. 어떤 식으로든 의식을 치루면 뭐든 성스럽게 여겨지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을 하면 인간은 행복한가에 대한 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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