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부엉부엉 Mar 14. 2019

영화 '레이디버드'  

크리스틴과 레이디 버드, 그리고 크리스틴

몸이 자라고 눈이 떠지고 머리가 커지면서, 우리는 더 넓은 곳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욕구를 갖게 된다. 내가 숨쉬고 있는 이 작은 방과 매일 거니는 아스팔트 길이 그렇게 갑갑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반복되는 삶이 지겨워서 매일 삼시세끼를 먹어야하는 인간의 숙명조차 애달프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이곳을 벗어나, 더 넓은 세계로 나가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더 큰 꿈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현재를 벗어나야할 이유는 벌써 끝이 없다. 그저 맹목적이게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고, 그것은 또 다시 이곳을 벗어나야할 이유가 되어 버린다.

부푼 꿈을 지니고 있을 때의 나는 이미 내가 아니다. 이미 내 안의 나는 이 작은 방을 벗어나 넓은 세상 속에 살고 있고, 그렇게 나는 새로운 자아상을 만들어간다. 레이디 버드는 크리스틴에게 아마 그런 존재가 아니였을까.


그런데 왜 뉴욕의 레이디버드는 다시 크리스틴이 되었을까.


엄마아빠의 딸, 크리스틴이니까요.

18번째 생일을 맞은 날, 크리스틴은 슈퍼마켓에서 당당하게 신분증을 내밀며 담배와 플레이보이 잡지를 산다. 그렇게도 바라던 '자유'를 가장한 합법적인 일탈(?)은 세크라맨토의 슈퍼에서 시작된다.

운전면허증을 취득한 날, 레이디버드는 시험감독관에게 '감사합니다.' 를 연발하는데 과연 감독관을 향한 말이었을까. 두 다리가 아닌, 자동차의 네 바퀴로 더 넓은 반경으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 것이었을지도. 그렇게 첫 운전대를 잡고 세크라맨토를 드라이브 하던 날, 크리스틴은 어쩌면 처음으로 고향의 정취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노을 지던 풍경, 작은 내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주택가 사이로 펼쳐진 울창한 가로수길. 내가 자라고 난 세크라맨토의 모습이 이렇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크리스틴의 마음이 이미 고향을 떠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발 떨어져 바라보는 정경은 언제나 아름답게 그려지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그 찰나의 기억은 오래도록 기억되었을 것이다. 비단 뉴욕에 가서도 말이다.

낯선 뉴욕 땅에서 술을 진탕 퍼먹은 뒤 교회를 향하던 크리스틴의 발걸음은 이미 예견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향을 향한 그리움,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어했던 성모고등학교의 일상, 익숙하고도 낯설게만 느껴지는 뉴욕에서의 찬송가. 이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크리스틴은 더 이상 레이디버드이고 싶지 않다.

세크라멘토를 벗어난 공간에서 자신의 뿌리를 목소리내어 확인하고 싶은 순간, 레이디버드는 크리스틴이 되고 그녀를 늘 크리스틴이라 부르던 엄마에게 '사랑해요' 목소리를 낸다.



이제야 비로소 '나' 니까요.

우리의 생은 끊임없이 자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10대, 20대, 30대 시간이 흐를 수록 지향하는 가치가 바뀌고 인생의 목표도 미묘하게 변하게 된다. 누군가는 그저 계속해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기 위한 탐색의 시간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 이 변모의 과정은 궁극의 '나'를 완성해가는 여정일 뿐이다. 레이디버드에게 세크라맨토에서의 시간은 후자였을 것이다. 이 시골 동네서 벗어나 뉴욕의 대학생으로 제2의 인생을 펼치고 싶은 나, 그것이 진짜 '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레이디버드라는 호칭으로 압축된 것은 아니었을까.

마침내 뉴욕의 대학생이 된 그녀가 새로운 친구에게 자신을 '크리스틴' 이라 소개한다.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크리스틴이 아니라 '레이디버드'라 불러달라 꽥꽥되던 그녀인데 말이다. 과도기에서 방황하던 레이디버드는 이제 없다. 그토록 바라던 레이디버드가 진짜 '나'가 되었으니, 그녀는 이제 스스로를 크리스틴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취향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