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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부엉 Nov 04. 2018

그만 둘래요, 꾸밈노동.

예쁘지 않은 이런 우리도 '여자' 임을 끊임없이 전시해야 한다.

'자고로 여자는 일단 예쁘고 봐야해.' 라는 말의 변주를 나는 어릴 적부터 수없이 들어왔다. 어른들로부터, 미디어로부터, 친구들 사이에서, 급기야 스스로에게까지. '미(美)' 는 여자만이 지닐 수 있는 강력한 무기라는 학습된 편견, 뿌리깊은 사회적 관습 때문이었다.


매년 미스코리아와 슈퍼모델대회가 생중계되고 누가 선발되느냐에 사회의 지대한 관심이 집중됬다. 그것이 성 상품화의 전형인 줄도 모르고 우리는 미스코리아 진으로 선발된 이를 칭송하며 부러워했다. 만천하에 입증된 여성의 미(美)를 발판삼아 방송계 진출은 물론 부잣집 며느리는 따놓은 당상이라고 모두들 입모아 미스코리아의 핑크빛 미래를 그리느라 바빴다. 벅차오르는 표정으로 수상소감을 말하는 그녀들은 공통적으로 '세계평화'를 이야기했고, 어린 나는 '아, 여자가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려면 우선 예쁘고 봐야하는구나.' 라는 단편적이고 그릇된 편견을 무의식중에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무의식이 잘못되었음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없었고, 오히려 계속해서 입증할 만한 상황들만 마주하며 학창시절은 보냈다.


하지만 학창시절 내내 나는 아름다운 여성이 되려는 노력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머리를 파마해서도 안되고, 틴트를 바르기라도 하면 생활지도부 선생님에게 틴트를 뺏겼기 때문이다. 나는 본디 예쁜 사람이 아니기에, 노력이 필요한데 학교 규정상 불가하니 얼마나 선생님들이 미웠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감사하다. 알다시피, 요즘은 초등학생도 화장하는 시대. 교복에는 틴트 주머니까지 디자인되어 나오는 시대이다.)

분출되지 못하는 꾸밈 욕구를 억누르며 스무살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예쁜 대학생이 되어 남학생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예쁜 대학생이 되어 남자친구와 캠퍼스를 거니는 상상도 했다. 행복한 상상의 가정에는 '예쁜 나'가 전제되어 있었고, 이는 잠재적 꾸밈욕구를 더욱 극대화시켰다.

취업준비를 할 때도 그러했다. 얼굴이 예쁘면 면접은 쉽게 통과된다는 말에 의문과 분노를 표하면서도, 면접날이면 새벽부터 일어나 헤어와 메이크업을 유난히도 신경썼다. 몇 번의 면접을 거치면서 나는 면접날의 꾸밈노동은 아주 당연한 절차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면접장에 온 대부분의 여성들이 얼마나 분주한 새벽을 보냈을지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의문과 분노는 무의식중에 '그래야만하는'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게 성인이 된지 N년이 지난 지금 나는 꾸밈 노동의 달인이 되어 있다.그리고 나는 이제서야 의문을 던진다.


왜 여자는 아침저녁으로 스킨, 로션, 앰플, 수분크림, 아이크림... 을 발라야만 피부관리가 되는걸까? 남성 화장품 시장에는 올인원제품이 파다한데, 우리는 왜 아침저녁으로 겹겹이 바르고 바르는 이 '비효율적인 행위'를 평생 반복해야만 하는 것일까.


왜 여성 의류 시장은 이리도 빠르게 돌아가는 것일까? 아니 무엇보다 우리는 왜 이 속도를 맞춰야만 트렌디한 여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일까. 남자는 그저 단정하게만 입어도 댄디남이라 칭송받는데, 왜 우리는 매년 옷을 사고 시즌이 지나면 안'예뻐'보인다며 다시는 입지않는 행위를 반복해야만 하는 걸까.


왜 여성의 화장은 예의를 차리는 행위가 되어버린 것일까? 화장을 하지 않고 맨얼굴로 출근을 하거나 결혼식장을 가거나 선을 보러 나가면 왜 기본도 모르는 성의없는 여자가 되어버리는 걸까. 언제부터 화장이 '성의' 표시가 되었으며 과연 그 성의는 누구를 향한 것일까.


왜 여성의 꾸밈노동이 자기관리의 기준이 되는 것이지? 남성들은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취미생활을 가지며 자기계발을 하는데, 왜 여성은 자기관리의 첫번째 기준이 외모가 되는 것일까. 뚱뚱한 남자를 보며 (대게는) 자기관리를 못한다고 욕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뚱뚱한 여자를 보면 (대부분) 자기관리에 실패한 사람이라며 패배자로 만든다. 왜 우리는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며 비참한 목소리를 내야하는 것일까.


왜 여성은 어떤 상황에서도 예뻐야 하는 것일까? 유튜브를 조금만 둘러보면 이런 제목의 영상들이 수두룩 빽빽하며, 심지어 조회수도 매우 높다. 소개팅 메이크업, 수영장 메이크업, 운동 메이크업, 클럽 메이크업, 면접 메이크업, 상견례 메이크업 ... 셀 수도 없다. 예뻐야 하는 상황은 끝도 없으니 말이다. 우리는 왜, 누구를 위해 수영장에서조차 예뻐야 하는 것일까?




예쁜 여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여성의 본능이라고 생각했다. 남성이 권력을 탐하는 것처럼, 여성이 아름다운 외모를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욕망이기 이전에 강요다. 여자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학습된 강요, 사회 곳곳에 뿌리깊게 스며들어 강요라는 것을 전혀 인지할 수 없게 만든 남성 중심 사회에 의한 교모한 강요이다.


'예쁘지 않은 여자는 여자가 아니다' '못 생긴 여자는 여자가 아니다' '가슴 없는 여자는 여자가 아니다' '나이든 여자는 여자가 아니다' ....... 끝없이 이어지는 이 등식에 무엇을 대입하든 그것은 오직 하나의 간결한 명제,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 여자는 여자가 아니다' 로 환원된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여성의 존재 가치는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에 있다'는 단순한 명제가 된다.

- 우에노 치즈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중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은 객체화, 타자화된다. 그 결과 여성의 가치는 남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여성이 남성에게 간택당하기 위한 결정적인 요소는 능력, 학벌, 집안도 아닌 '외모'였다. 이 여성 혐오적인 역사의 줄기를 더 이상 지속할 수는 없다. 우리는 창녀가 아니고, 배우지 못한 것도 아니며, 자립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여성 스스로가 깨고 나가 주체적인 존재가 되어야한다. 그러나 말 뿐인 선언만으로는 이 구시대적인 줄기를 절대 끊어낼 수 없다. 전시가 필요하다.


머리가 짧은 여자도 있고, 맨 얼굴에 안경을 쓰고 다니는 여자도 있고, 노브라 차림의 여자도 있고, 가슴이 작은 여자도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우리도 '여자' 임을 끊임없이 전시해야 한다.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 학습된 편견을 타파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 꾸밈노동을 그만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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