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크 쥐스킨트 단편집, 「깊이에의 강요」의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짧은 단편 「깊이에의 강요」는 날 이상한 기분에 빠지게 만들었다. 더 이상한 건 왜 이상한 기분이 드는지 단번에 파악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가만 살펴보면 제목부터 뭔가 미묘하게 느껴진다. 깊이의 강요가 아니라 깊이'에'의 강요라는 제목은 어딘가 저자의 의도가 투영된 듯 느껴졌다. 깊이란 무엇일까? '깊이란 이것이다'라고 논하는 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기나긴 이야기의 여정이 필요한 일이고 내 역량 너머의 이야기다. 깊이를 정의 내리는 것은 결코 명료할 수 없고 설령 내가 내린 깊이라는 정의를 내린다 한들 내가 내린 정의에 쉽게 합의를 구하긴 어렵다. 그래서 난 깊이를 추구하는 과정이 만드는 '정신이 아득해지고 어지러우며 머리 아파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책 역시 깊이를 정의 내리기보단 깊이'에'라는 방향성(깊이를 의식하고 추구하는 과정)과 '깊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누가 그렇게 깊이를 추구하라 강요하는지, 깊이를 추구하는 과정의 모호함과 난해함에서 발생하는 고통, 결과적으로 깊이란 무엇인지를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깊이에의 강요」를 읽으며 느낀 즐거움이었다.
소묘를 뛰어나게 잘 그리는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젊은 여인이 초대 전시회에서 어느 평론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작가가 깊이에 대해 인식하게 된 시작점은 어느 평론가의 말에서부터였다. 하지만 처음엔 이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작가는 곧 잊었지만 이틀 후 그 평론가의 비평이 신문에 실렸다. 그러자 작가는 '깊이'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점은 깊이를 강요하는 건 누군가 내뱉은 단순한 한마디의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반인의 말보다는 평론가의 말이, 평론가의 말보다는 신문에 실린 비평이 크게 영향을 발휘한다. 신문에 비평이 실린 후에 눈에 띄게 깊이가 없음을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지만, 그들이 깊이에 대해 주체적 고찰을 한 번이라도 해봤을지는 의문이다.
신문이라는 상징자본이자 생산과 확산의 매체, 그리고 평론가라는 지위에서 비롯된 언어는 예술이라는 난해하고 폐쇄적인 세계에서 차별화되고 계급화된 힘을 얻고 있었다. 해당 분야의 영향력을 가진 누군가의 말이 확산되고 재생산되기를 반복하며, 한 사람의 '견해'는 어느새 '사실'로써 권위를 갖게 된다. 권위를 얻은 언어는 손쉽게 일반 관객에게 가치 평가의 기준으로 사용된다. 관객이 작품을 감상하며 상호작용하고 감정을 인지하려는 노력은 정해진 방법이나 정답이 없기에 피상적 상태에서 그치기 쉽다. 그렇기에 외부에서 가져온 권위적인 언어를 통해 작품을 명확하고 간편하게 재단해, 불명확한 감상에서 느껴지는 피로감과 종결욕구에서 벗어나려 한다. 또한 실제 평론가와 같은 감상을 하거나 같은 평가를 하지 않았더라도, 같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같은 지위와 지식수준을 공유하는 기분을 향유한다.
결국 권위적인 언어는 관객을 넘어 작가마저 지배하기에 이른다. 작가는 스스로 깊이 없음을 인정하고 작품 활동을 이어나갈 수 없게 되어버린다. 깊이란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작가는 깊이가 있다고 평가받는 것들을 찾아보고 자문을 구해보려 했지만 돌아온 것은 비웃음과 조롱뿐이었다. 끝내 깊이를 알 수 없었던 그녀는 고통의 수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녀를 돌봐 주어야겠어. 그녀는 위기에 빠져 있어. 인간적 위기이거나 그녀의 천성이 예술적인 것 같다. 아니면 경제적 위기일 수도 있어. 첫 번째 경우라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고. 두 번째 경우는 그녀 자신이 극복할 문제야. 세 번째라면 우리가 그녀를 위한 모임을 열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녀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일지도 몰라."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작가를 본 친구들은 천성이 예술적이라 그런 것이라면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말하며 작가를 위한 모임을 열고 초대하는 것으로 도움을 주려한다. 묘하게 생각을 사로잡는 지점은 깊이를 쫓다 영락해 버린 작가의 모습을 보며 친구들은 오히려 예술적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작가의 작품 활동은 멈췄음에도 어째서 작가를 '예술적'이라 말할 수 있었을까. 이들이 말하는 예술이란 예술활동과는 무관하게 어떤 전형적인 이미지를 지칭하는 건 아닐까. 혹시 사람들은 피폐하고 쇠약해진 예술가의 상(像)을 예술 그 자체로 여기는 걸까.
사람들이 흔히 표현하는 '창작의 고뇌'라는 말은 창작의 과정에서 수반되는 고통이 예술가라면 반드시 짊어지고 가야 할 멍에, 벗어날 수 없는 굴레라는 인식을 드러내는 표현인 듯하다. 하나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에 눈이 돌아버려 광기 어린 예술가의 상(像)을 당연시 여기는 외부의 시선이 작가마저도 창작의 고뇌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있진 않는가. 정답이랄 게 없고, 작가 스스로 만족해야만 끝이 나는, 반드시 이래야만 하는 이유와 꼭 그렇게 만들어져야만 하는 일을 하기에 고뇌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고뇌와 고통은 창작 활동의 부산물일 뿐 창작 활동 그 자체는 아니다. 창작과 고통을 동일시 여기는 인식이 작가 스스로 깊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고통이 아닌, 깊이를 인지하지 못했거나 깊이를 추구하지 않는 작가에게도 창작의 고뇌라는 가시왕관을 씌우고 고통의 길로 내몰고 있는 건 아닐까. 창작의 고뇌라는 말로 고통을 예술가의 숙명이자 예술 그 자체로 당연시 여기는 사회적 시선이 '깊이에의 강요'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작품의 본질을 바라보려 노력하거나 이해와 공감, 감정적 울림을 포착하며 진정성 있는 감상을 하려 했던가. 어려운 길을 피해 쉬운 길을 택하기 위해 누군가의 고통을 이용하고 있진 않았을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 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을 다 같이 지켜보아야 하다니, 이것은 남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다시 한번 충격적인 사건이다. (중략) 그러나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듯하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이고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깊이가 없다는 비평을 쓴 평론가가 작가의 죽음 이후 위 내용의 단평을 문예란에 기고했다.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내게 이 글은 콧웃음과 함께 입안에 씁쓸한 맛을 감돌게 만들었다. 평론가 자신이 '깊이에의 강요'를 했으면서, 사실은 작가 스스로 이미 자초하고 있었으며 안타깝게도 작가는 스스로 그 상황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신의 비평에서 비롯된 전도유망한 여류화가의 죽음이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또다시 글로써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는 듯한 이 단평은 비겁한 변명과 추잡한 책임 전가처럼 느껴졌다.
씁쓸함을 곱씹던 중 나는 격앙된 내 감정에서 치우침을 느꼈다. 차분히 생각해 보면, 이 감상은 사건의 전말을 모두 담은 이 단편을 읽은 독자이기에 가능하지 않나? 평론가는 자신의 비평에 의해 작가가 이렇게 고통받을 지도, 고통받았을 지도 독자만큼 면밀히 알 수 없다. 정말 평론가는 작가를 죽음으로 내몰기 위해 깊이를 강요하는 비평을 썼던 걸까. 혹시 어떤 악의를 담아내거나 차별화된 권위를 얻기 위해 쓰인 비평이 아니라, 오랜 시간 예술 시장에 머무르며 많은 작품과 작가를 봐온 업계 선배로써 정말 솔직한 감상을 비평으로 남긴 건 아니었을까. 평론가는 작가의 소박한 그림에서 보이는 기교에서 예술가의 사명감을 보았다고 말했다. 이는 화려한 기교나 기술적 측면의 개발에 집착하기보다 그녀의 작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그녀가 추구하는 세계관을 구축하며 깊이를 형성하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깊이가 부족함에도 마음에 와닿는 그녀의 재능을 향한 찬사와 함께 조언을 남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평론가의 말마따나 '깊이에의 강요'는 작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미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표현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깊이에 관하여 스스로 자문하기 마련이다. 깊이라고 명명하고 인식하고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표현의 탁월함과 다른 작가와 차별화된 고유한 언어를 만들고자 하는 작가라면 같은 결의 고민을 안고 활동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표현 욕구라는 자기만족으로 시작한 창작이라는 활동이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되면서 깊이에 대한 고찰은 더욱 깊어진다. 무엇을 표현할지, 왜 표현하고 싶은지, 어떻게 표현할지를 고민하며 더 나은 결과물을 추구하다 보면, '어떻게 견고한 자신의 고유한 언어와 세계를 구축할지' 그리고 '작가 자신의 경험과 감정 그리고 의도를 어떻게 관객과 사회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지' 같은 고민에 이르게 된다. 결국 깊이라는 주제에 대한 고민을 의식화하지 못했을 뿐, 작가로서 입지 얻고 탁월함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깊이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평론가의 비평에 의해 '깊이 추구'라는 주제가 무의식적으로 수행해 왔던 사명감에서 의식이라는 수면 위로 올라왔을진 몰라도, '깊이 추구'는 작가라는 삶을 지속하기 위해 언젠가 맞이해야 할 문제이자 벽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단편 속 작가는 스스로 '깊이 추구에 대한 인지와 필요성'을 느끼고 자의적으로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누구에 의한 '깊이에의 강요'인지는 몰라도 이야기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자살 사건, 바람에 날려 간 흥미로운 경로, 한때 전도양양했고 미모도 뛰어났던 여류 화가의 이야기라는 사실은 보도할 가치가 아주 높았다. 그녀의 집은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보였으며 기자들은 환상적인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널려 있는 수없이 많은 빈 병, 여기저기 파괴의 흔적, 갈기갈기 찢겨 나간 그림들, 벽면 어디를 둘러봐도 점토 덩어리, 심지어 방구석에는 배설물도 있었다!
작가는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야 전례 없는 주목을 받게 되었다. 물론 그 관심은 작가의 삶 자체를 조명하는 것이 아닌 작가의 죽음을 둘러싼 여러 의문과 충격적인 흔적을 향했다. 어째선지 나는 '깊이에의 강요'에 의해 내몰린 죽음에서 '깊이'가 형성되는 인상을 받고 있었다.
작가의 삶이 죽음으로 서사를 완성하며 깊이가 형성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죽음을 둘러싼 모든 것에 사람들은 의문을 품고 해석하며 추측을 이어갔다. 그렇게 작가의 죽음을 소비하며 '유망한 젊은 예술가의 고뇌, 그리고 결말'이라는 작품을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이 감상하고 있었다. 깊이는 서사에서 비롯되며, 죽음은 서사의 완결을 만든다. 하지만 정말 소설 속 작가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깊이라면, 죽음을 통해 작가의 서사가 완성되며 깊이를 획득함과 동시에 작품으로써의 깊이는 상실하고 있진 않은가. 작가의 죽음은 스스로 작품으로 의도된 바가 없기에 작품이 아닌 '사건'에 머무르고 있었다.
화제가 된 것은 '전도유망한 미모의 여류화가의 죽음과 충격적인 남겨진 흔적들'이었다. 그녀가 죽음으로써 그녀의 예술관이나 작가로서의 삶의 궤적이 서사로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대상이나 사회를 향한 일갈을 남긴 것도 아니었다. 또한 거센 바람에 날려 방송탑 아래 광장에 떨어지지 않고 넓은 귀리밭을 가로질러 숲 가장자리까지 날려간 사실은 많은 관심과 흥미를 끌었지만, 그녀 스스로 자신의 죽음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만들기 위해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고 그 말도 안 되는 경로를 스스로 계산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죽음이 시사하는 바는 죽음 그 자체가 만드는 깊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 그 깊이 마저도 스스로의 어떤 의도도 없었기 때문에, 죽음이 만든 깊이라는 가치는 끝까지 그녀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은 예술가의 죽음으로 아름답게 기록되기보단 한순간 끓어올랐다가 증발되어 흔적 없이 사라질 사건으로 남은 게 아닐까.
작가의 죽음 이후 펼쳐진 아수라장은 마치 죽음이 말을 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실현하고자 한 가치는 문장이 되고 죽음이라는 형상은 마침표가 되어 하나의 서사를 완성한다. 그래서 죽음에서 피어난 마지막 표현은 강하게 이목을 끌고 목격한 이들의 감정에 깊이 관여하는 힘을 갖는 게 아닐까. 소설 속 작가의 죽음 역시 강한 이끌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만 작가로서 고유한 세계를 아직 구축하지 못한 채 맞이한 죽음이었기에 완성된 서사는 성숙한 작가로서의 마지막 표현이 아닌 영락한 인간의 자기 파괴적인 흔적이 주는 충격에 그치고 말았다. 때문에 예술적 깊이를 부여받지 못하고 화제성 높은 가십거리로 소비되지 않았나. '어떤 내용을 담아 나의 이야기를 완성할 것인가' 이게 깊이에 대한 추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결국엔 스스로 자문하게 만든다. 깊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