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고
「멋진 신세계」는 인간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사회를 묘사한다. 인간은 공장에서 분류되고, 분류에 따라 역할이 부여되며, 그 역할과 개인의 욕구를 일치시키는 훈련을 통해 완벽한 안정을 실현하고자 한다. 모든 인간은 자유와 개성이 제거되고 공동체와 안정을 최우선 가치로 삼으며 살아간다. 사회 질서와 유지에 저해되는 사랑, 고독, 불안과 같은 온갖 원초적 감정은 억제되었고, 모든 욕구를 언제든 해소 가능하게 만든 시스템과 충분한 경제적 보상으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불만이란 존재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모든 인간은 스스로 주체성을 포기하고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했으나 이를 인지할 수 없었다. 간혹 생기는 불안과 걱정은 '소마'라는 약으로 해소 가능하게 되니, 문학, 예술, 철학, 종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완벽한 안정을 제공하는 사회 속 집단은 생산에 집중하고, 개인은 소비를 의무로 여기며, 모든 사회 구성 요소가 아름답게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하고 완벽한 기계를 이룩하고야 말았다. 일말의 걱정, 불안, 두려움을 비롯한 각종 부정적인 감정의 발현의 틈새를 소마라는 약으로 메우고 기름칠을 하니, 문명이라는 거대한 기계는 멈추지 않고 쉼 없이 그리고 끊임없이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문명의 바깥에는 원시 사회를 이루며 사는 보호 구역이 존재했는데, 그 야만인 보호 구역을 관광차 방문한 레니나와 버나드는 어째서인지 문명의 흔적이 느껴지는 야만인 '존'을 만나게 된다. 버나드는 존의 출생의 비밀을 밝혀내고 존을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문명사회로 초대한다. 「멋진 신세계」는 야만인이 문명사회를 체험하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난자 하나에, 태아 하나에, 성인이 하나 -그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보카노프스키를 한 난자는 움트고, 발육하고, 분열한다. 8개에서 96개까지 싹이 생겨나고, 모든 싹은 완벽하게 형태를 갖춘 태아가 되고, 모든 태아는 완전히 성숙한 어른이 된다. 전에는 겨우 한 명이 자라났지만 이제는 96명의 인간이 생겨나게 만든다. 그것이 발전이다.
보카노프스키 처리라고 부르는 생명과학기술의 혁신은 모체 생식이 비정상적이고 비윤리적이며 수치스럽게 여기는 사회를 만들어냈다. 이 혁신은 단순히 인간을 공장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어 인구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를 갖는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사회를 유지하고 지속하기 위해 가정을 이룰 필요가 없어지니, 생식을 통한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기본적인 관계성에서 벗어난 인간은 성질 자체가 바뀌어 버렸다. 여성은 임신이라는 생물학적 생존의 취약성과 자식과의 깊은 유대감에서 벗어났다. 남성은 헌신을 약속하고 가정에 종속되어 부양과 경쟁이라는 무거운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났다. 하물며 인간 사회를 구성하던 가장 기본적인 인간 관계인 가정이 제거된 인간에게 그 밖의 모든 관계가 어떤 의미를 가질 리 만무했다. 사랑하는 연인 관계도 우정으로 연결된 친구라는 관계도, 비전과 성취를 공유하는 동료 관계도, 민족적-국가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관계도 사라졌다. 존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관계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을 공유한다.'는 사회 안정을 위한 공동체 의식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뿐만이겠는가. 모든 인간의 결핍과 욕구를 해결해 주는 시스템과 충분한 경제적 보상을 제공하니 불만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을 공유한다는 강한 공동체 의식은 사랑과 고독의 의미를 잃게 만들었고, 노화가 없는 젊은 사회는 불안과 걱정이란 찾아볼 수 없었으며, 태아일 때부터 시작한 수면교육과 유아기 때 시행하는 죽음에 길들이는 훈련은 공포와 두려움마저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이따금씩 피어오르는 부정적 감정들은 소마를 통해 해소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정이 완벽하게 제한된 오로지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펼쳐졌다.
"공동체, 동일성, 안정성." 화려한 미사여구. "만일 우리들이 보카노프스키 처리를 무한히 실행하는 단계에 이른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결핍과 욕구를 채우기 위한 노력이 필요 없고 온갖 부정적 감정으로 비롯되는 고통에서 해방된 사회는 얼핏 이상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질적인 인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도저히 '과연 이들을 나와 동일한 인간종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사라지질 않았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하고 판단할 필요 없이 단지 주어진 그대로 살면 그뿐인 존재, 원하는 것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으니 의지도 의미도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온갖 감정, 의구심, 향상심, 탐구심, 저항심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의지를 상실했다. 자유 의지가 없는 이들을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 소설 속 신인류를 보며 더 이상 나와 동일한 인간으로 보기 어려웠다. 인간과 똑같이 생겼을 뿐 완전히 다른 인류처럼 여겨졌다. 삶 속에서 늘 상상하고 꿈꿨던 ‘고통에서 완벽히 벗어난 이상적인 사회’가 보여주는 건 오히려 결핍과 욕구가 제거된 인간은 전혀 인간 같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중략) 웬일인지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훨씬 더 중요한 무엇을 해낼 능력을 지녔다는 기분이랄까요. 그래요, 훨씬 강렬하고 훨씬 격렬한 무엇을요. 하지만 그것이 무엇일까요? 내가 해야 할 더 중요한 말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우리들은 글로 써야 할 그런 대상들에 관해서 어떻게 정열적으로 행동할 수가 있을까요?"
늘 풍족하고 충만한 삶은 갈증이 없다. 헬름 홀츠는 알파계급임에도 고독을 느끼는 인물로, 강해진 자의식이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살아온 그를 목마르게 하고 있었다. 결핍과 욕구가 열렬히 성취하고 싶은 소망과 의지를 만든다. 의지를 가져야만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강해진 자의식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다는 생각,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 우선시 되어야 할 가치를 선정하고 선별할 수 있는 가치관이 자기 자신을 타인과 구분 짓고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가치를 담은 표현을 하고 싶다는 욕구는 나라는 개인의 차원에서 일상적으로 내뱉는 말과는 엄연히 다르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고 공감을 이끌어낼 의미를 찾고, 보다 효과적이고 명확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언어와 표현 방법으로 구성되어야만 한다. 꼭 그 단어로 쓰여야만 하는 이유를 알고, 그런 단어로 구성된 문장이 담고 있는 의미를 깨닫고, 그 의미가 문장을 읽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큰 울림을 만든다. 이 연쇄작용이 만드는 울림의 끝에 변화라는 아름다움이 피어난다. 울림은 변화를 끌어낸다. 셰익스피어를 읽은 존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 어휘들의 마력은 강렬했고,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에서 우르릉거렸다. 웬일인지 그는 여태껏 포페를 진심으로 미워한 적이 없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따지고 보면 얼마나 포페를 미워하는지 적절하게 표현할 길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를 미워하지 않은 셈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는 이런 어휘들이, 북소리와 노래와 마법 같은 어휘들이 생겨났다. 그가 알게 된 어휘들과, 그리고 바로 그런 어휘들로 엮어진 (그것들이 무엇인지 그로서는 알 길이 없었지만 여하튼 멋지고도 멋지며) 이상하고도 이상한 이야기들은 포페를 증오해야 할 이유를 그에게 마련해 주었다.
감정이란 강렬한 에너지로 머무를 때는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 실존에 이르지 못하고 흩어지고 만다. 감정을 적확한 언어로 정의 내리고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 때, 이를 표현한 나와 관계를 맺고 실존할 수 있게 된다. 존의 포페를 향한 증오도 그랬다. 어머니를 고통스럽게 만든 포페를 향한 증오를 담아낼 언어를 찾지 못했을 때와 셰익스피어를 읽고 자신의 증오를 담아낼 언어를 찾은 후를 비교하자면, 이전의 증오가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천지차이였다. 비로소 명확하게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언어를 갖게 된 존은 진정한 의미로 포페를 증오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에게 관계는 감정을 유발하는 요인이었고 욕구는 감정에 취약한 상태로 만든다. 감정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 힘은 자의식을 유발하고, 의지를 만들고, 자신을 알아갈 수 있는 길잡이가 될 수도 있다. 흔들리고 요동치는 감정의 폭풍 속에서 만들어진 경험과 성찰이 자신을 구체화시키고 가치관을 형성하며, 파도와 바람에 휩쓸리지 않는 안정되고 성숙한 내면세계를 만들어낸다. 분명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는 합리적이고 안정적일지도 모른다. 또한 감정이 만드는 불확실성은 우리를 불안과 걱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며 고통에 몰아넣기도 한다. 그럼에도 감정의 끝에 피어난 나의 의지는 역경을 뚫고 해내야만 하는 이유를 찾게 하고,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을 해내게 만들며, 고통을 헤쳐 나온 나를 더 성장하고 성숙하게 만든다.
9년 전쟁 이후에, 그때부터 과학이 처음으로 통제를 받기 시작했지. 그때는 사람들이 식욕까지도 통제를 받을 각오가 되어 있었으니까. 조용한 삶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좋다는 식이었어. 우리들은 그 후부터 통제를 계속해왔어. 물론 그것은 진실을 위해서는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지. 하지만 행복을 위해서는 아주 좋은 일이었어. 인간은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필연적으로 대가를 치러야 해. 행복은 대가를 치러야만 성취할 수 있다고.
통제관은 완벽히 안정화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야만인을 불러들인다. 야만인과 문명인 사이 존재하는 존을 흥미롭게 생각한 통제관은 대담을 통해 자신이 수호하는 세계를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존이 비극으로 여기는 문명사회는 끝없는 갈등과 분쟁의 역사 끝에 도착한 인류가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다. 존이 추구하는 삶과 통제관이 제안하는 삶, 그 어디에도 정답은 없었다.
존은 자유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결핍과 욕구에서 의지가 발현된다. 부족함이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고 싶다는 의지를 만들고, 더 나아지기 위해 목표를 세우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실천하며, 실천을 통해 부족한 현실에 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목표를 세우고 실천으로 옮기는 단계에서부터 문제 투성이다. '무엇을 목표로 삼는가'에 대한 의사결정을 위해 충분한 근거와 실현 가능성을 고려하는 과정에서 '자아성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메타인지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목표를 설정하게 되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우여곡절 끝에 도달하더라도 원치 않는 목표에 마주할 수 있다. 애초에 성찰이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고행에 가까운 일이다. 나는 무엇이고, 왜 사는가에 관한 물음에 답을 내리는 과정이다. 과정이라 말하는 이유는 정답이 없는 끝없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성찰에서 끝나지 않고 실천이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세상사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세상뿐만 아니라 내 몸조차도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게 현실이다. 당장 아침에 눈을 뜨고 잠자리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쉽지 않은데, 어찌 삶을 변화시킬 행동을 다짐 대로 실천할 수 있을까. 결국 성찰과 실천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삶에 고통을 초래한다. 끝없이 삶의 의미를 묻고,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무얼 해야겠다 마음먹어도 실천하지 않는 자신에게 좌절하기를 반복한다. 결국 더 나아지기 위한 고민은 해결되지 않고 만성적으로 곁에 남아 현실에 안주하게 되는 게 인간이다. 이런 시련과 고난 끝에 목표를 찾고 실천하여 성취를 하면 마침내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다. 하지만 행복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고 삶은 또 다른 문제와 결핍으로 안내한다. 하지만 찰나의 행복이 주는 달콤함은 인간이 계속해서 다음으로, 또 그다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한다. 자유는 성취의 부산물인 행복을 맛보기 위해 끝없이 달리는 인간상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난 불편한 편이 더 좋아요."
"우린 그렇지 않아요." 통제관이 말했다. "우린 편안하게 일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자유를 쫓는 인간사회 필연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통제관은 안정이야말로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수많은 인간이 자유를 쫓으며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길 희망했고, 더 많은 것을 손에 넣기 위해 타인에게 해를 가하며 끝없는 갈등과 혼란을 빚어내고 있었으므로. 자유는 성공을 개인의 능력으로 돌린다. 모두가 원하는 만큼 성공할 수 없었고, 성공하지 못한 자에게는 모두가 무능력하다 말했다. 어느새 자아실현을 통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것이 인간사였다. 눈부신 과학 기술의 발달로 끝없는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기회가 찾아왔다. 결핍과 욕구를 제거함으로써, 인간은 더 이상 무언가 이뤄야 할 목표를 찾지 않아도 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게 되었으니 고통을 느낄 원천을 차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결핍과 욕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변화를 야기하는 모든 것을 제한해야만 했다. 결핍과 관계를 제거함으로써 감정을 유발하는 모든 것을 제한했다. 오래된 것, 아름다운 것, 특별한 것, 지켜야 할 것을 제거함으로써 욕구를 느끼게 하는 모든 것을 제한했다. 과학, 예술, 철학, 종교를 제한함으로써 목적의식을 느끼게 하는 모든 것을 제거했다. 결국 인간은 자유를 희생해 완벽한 안정에 도달하게 되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 같은 사회가 주는 보상은 영원히 고통, 불안,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이 약속은 보상은 될지언정 행복이 될 수 없다. 자유는 성취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일시적일지라도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지만, 안정은 결핍과 욕구를 제거해 고통 발생의 원천을 막아두었을 뿐 성취를 대신 이뤄주진 않는다. 통제관의 말마따나 대가 없는 행복은 없었다. 그래서 이 멋진 신세계는 소마를 만들어냈다. 소마 한 알이면 언제 어디서든 당장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소마라는 인공적인 행복을 더하자, 모든 사회 구성 요소가 한 치의 오차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완벽한 기계와 같은 모습으로 신세계는 쉼 없이 그리고 끊임없이 작동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인간이 만일 행복에 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재미있을까!'라고 생각했다.
통제관과 야만인의 대담은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나 역시 인간으로 살기에 자유 의지를 당연하게 생각하며 존의 행복관에는 쉽게 동의할 수 있었지만, 통제되고 제한된 사회가 이상적이라고 말하는 통제관의 생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통제관이 말하는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모순에 대해 공감했다. 인간은 자유를 쫓으면서도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기에 통제관이 제안하는 고통 없는 삶에 대한 항구적 약속은 자유라는 무게추와 같거나 더 무거울지도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통제관이 말하는 약속은 현실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꿈이다. 게다가 스스로 성취하지 못하면 결코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없다. 그래서 현실에서 안정을 추구하는 것은 「멋진 신세계」의 통제관이 약속한 안정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현실 속 안정은 성찰과 실천이 수반된 성취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만약 현실에서 사회가 제공하는 안정에 의해 생존 가능한 삶을 생각해 본다면, 전과 200범 정도의 갱생불가능 판정을 받은 수감자뿐일 것이다.
인간은 개인의 목표인 자아실현과 사회적 목표인 고통 분담이라는 상반된 목표로 인해, 자유와 안정 사이를 오가며 방황하는 존재가 아닐까. 자유는 책임감과 고독의 무게에 고통받는 인간을 만들고 이들은 짊어진 고통을 분담할 수 있는 안정을 희망한다. 안정은 고통뿐만 아니라 자율성과 성과도 분담하기에, 안정 속 인간은 자신만의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자유를 꿈꾼다. 고로 자유를 쫓을 때는 고통을 덜어내고자 안정을 희망하게 되고, 안정을 추구할 때는 자유와 자아실현이 주는 행복감을 꿈꾼다. 자유를 꿈꾼다고 온전히 자유만을 좇을 필요도, 안정을 희망한다고 온전히 안정만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자유와 안정의 비중을 어떻게 구성해야 내 삶을 행복으로 이끌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라는 물음을 쫓으며, 나는 고통의 길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