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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은 거

「서사의 위기(2/2)」:
서사를 회복한다는 건

by 온명



「서사의 위기(1/2) : 서사와 위기」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기억의 표지판

사건들 사이에 강한 관계를 형성하는 이야기는 텅 빈 채 흘러가는 시간을 극복하게 한다. 이야기하는 시간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야기할 능력의 상실은 '우연성'을 더 많이 경험하게 한다. 그러면 허무와 우연성이 강해진다. 70p


모든 것이 운명처럼 정해져 있고 의미 없는 우연처럼 여겨지게 된다면, 삶은 역동성과 주체성을 잃게 된다. 무언가를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뭔가 해봐도 의미를 갖지 못한 채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야기는 의미를 만들고 의미는 기억 위에 표지판을 세워준다. 기억할 만한 순간들은 현재와 과거 사이에 세운 수많은 표지판이 되어 쉽고 빠르게 그때 그 시간 속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돕는다. 타지에서 홀로 생활하는 나를 상상해보자. 외로운 나날 속에서 익숙한 냄새에 이끌려 처음 보는 밥집에 들어간다. 낯선 공간에서 먹은 밥이지만 그 안에서 어머니의 손맛을 떠올렸다. 익숙한 냄새와 밥맛이 과거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던 행복한 그 날이라는 표지판으로 추억 여행을 돕는다. 향과 맛을 매개로 과거의 기억을 생생히 불러일으키며 그때 나눴던 말과 따뜻한 온기마저 되살아난다. 인상적이고 강렬한 기억은 내재화를 도와주고 이야기의 계승을 할 수 있게 만든다.


무기력한 삶은 기억 위에 더 이상 표지판을 세울 수 없게 만든다. 표지판이 없는 사람은 서사적 장력을 잃고 삶이란 시간의 폭이 수축한다. 쳇바퀴 돌 듯 그저 반복하는 나날은 정신없이 바쁘고 하는 일이 아무리 많아도 당장 어제 뭘 했는지, 뭘 먹었는지,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도 생각이 안 나게 한다. 돈을 벌어 생계를 해결하고, 남들 한다는 것 따라 하고, 뒤처지지 않게 열심히 주변을 곁눈질하고, 노후 준비에 필수라는 것들로 하루를 가득 채우고 나니 진정으로 나를 위한 것은 하나도 없다. 고단한 하루의 보상이라곤 요즘 잘나간다는 트렌드 아이템을 사고 고칼로리 배달음식을 먹는다거나 요즘 OTT에서 핫하다는 콘텐츠를 보다 잠드는 일이다. 그때는 분명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는데, 어째선지 기억엔 남질 않는다. 행복이라 믿었던 것들은 그저 잠시 나를 고양감에 취하게 만들고 사라져 버리는 감정과 자극이었다. 기억할 만한 일을 만드는 건, 나 자신의 서사 위에서 가능하다. 나의 서사를 회복하고 지속하기 위해선 '과거의 구제'를 수행해야만 한다.






나를 되찾다

우리는 과거의 구제를 수행해야 한다. 과거를 현재에 끌어내어 엮고 현재 안으로 계속해서 작용하게 하는, 즉 소생하게 만드는 서사적 장력이 필요하다. 41p


행복이란 무엇일까? 과거로부터 찾은 ‘나’, 그렇게 찾아낸 ‘나’로부터 확장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온 연속성 속에서 자아실현의 실천을 통해 행복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과거에서 나를 성찰하고 본질을 탐구하여, 자아 실현을 위한 실천적 목표를 세워보자. 이 과정에서 맞이하는 몰입과 성취가 만족과 행복을 줄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엮어 미래와 연결하는 순간 ‘나’를 되찾고, 회복한 주체성은 서사적 장력을 통해 삶이 흩어지는 것을 막는다.


앞서 예시로 말했던 '우연히 타지에서 먹은 밥'으로 이어가자면, 밥을 통해 가족의 향수를 마주한 순간부터 나와 밥집의 관계는 더 이상 우연이 아니게 된다. 낯설고 외로운 공간과 익숙하고 소중한 추억이 연결되어 만들어진 특별한 순간이 현재라는 기억 위에 표지판을 세운다. 고독한 타지 생활 중 고향과 가족을 떠올릴 수 있는 소중한 인연으로, 미래로 함께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과거와 현재가 이어져 미래를 꿈꾸는 것, 이것이 삶을 소생하게 만드는 서사적 장력이다. 이를 확장하면 인류가 진보의 서사라는 탑을 쌓는 원리와 같다.


지겨워진 배달음식에서 벗어나 나를 위해 손수 차린 나만의 밥상에서 소중한 사람에게 직접 한 끼 만들어주는 꿈을 꾸게 된다거나, 내가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덕질로 위안을 받았던 기록과 흔적들을 SNS로 세상에 노출시켰다가 성공한 덕후에 대한 일화라든지, 스트레스를 푸는 수단으로 집 안 청소에 대한 강박증이 생긴 사람이 탁월한 정리와 청소 능력으로 사업까지 벌이게 된 이야기 등 지극히 개인적이고 작고 사소해 보이는 자신의 과거에서 현재 나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할 단서를 찾은 사례를 주변에서 볼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면 미래로 향하는 방향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서사는 개인의 삶에서 주체성을 되찾게 돕는다.


기억은 사건을 항상 새로이 연결하고 관계망을 만들어내는 서사적 실천이다. 83p






회귀가 아닌 회복

디지털은 현실, 허구, 상징이라는 라캉의 삼분법을 급진적으로 개조한다. 디지털은 현실을 해체하고, 공동체적 가치와 규범을 체화시키는 모든 상징을 허구의 것을 위해 점차 사라지게 한다.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침식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97p


책을 읽다 보면 '우리는 점차 병들어가고, 스스로 극복하긴 어려워 보이고, 현 사회의 문제가 심각하고,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이 모든 문제를 가속하면서 파국으로 향하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현 사회를 부정하고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전편에 언급한) 탑을 해체하는 야만인과 다를 게 없다. 과거와 현재를 엮고 함께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결국 주어진 과제는 범람하는 정보와 파편화를 가속하는 디지털 세계에서 개인의 주체성을 되찾고 흩어지는 세계를 응집시킬 새로운 질서를 찾는 것, 즉 서사를 회복하는 것이다.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지. 하나는 우리가 어떤 주제에 대해 직접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련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라네. (중략) 인터넷이 축소시키고 있는 것은 존슨이 말한 첫 번째 종류의 지식이다. 우리 스스로 깊이 아는 능력, 우리의 사고 안에서 독창적인 지식이 피어오르게 하는, 풍부하고 색다른 일련의 연관 관계를 구축하도록 하는 바로 그 능력 말이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213p


디지털의 역기능을 언급한 책이 「서사의 위기」가 최초는 아니다.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역시 일맥상통한 주장을 펼친다. 나는 과거에 읽었던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하나의 기회를 상상할 수 있었다.


구어 문화에서 문자와 글쓰기 문화으로 이동하던 시기에 소크라테스는 '외부 기호가 내부 기억력을 대체하면서 글쓰기는 우리의 피상적인 사고의 소유자로 만들며, 우리가 진정한 행복과 지혜로 향할 수 있는 지적인 깊이를 획득하는 데 방해가 될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소크라테스는 문자로 인해 외부 세계에 기억을 의존하는 것을 크게 우려했다. 또한 구어 문화의 문학성을 문자와 글쓰기 문화가 해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우려와는 반대로 문자가 성숙하며 스크립투라 콘티누아에서 띄어쓰기와 문법과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고 '깊이 읽기'라는 의미를 창출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발달시켰다. 생각의 독창성과 표현의 창의성이 발달하게 되며 구어 문화에서는 도달하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에 도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구어 문화의 수호자인 소크라테스가 감지한 그 시대 속 ‘서사의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문자에서 디지털로 이동하는 현재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현 시대야말로 소크라테스의 우려가 현실이 되는 시대이다. 기억을 인쇄물에서 웹이라는 더 크고 방대하며 효율적인 외부 매체로 옮김으로써 암기에서 더욱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서사는 현재에 이르러 또다시 위기를 맞이했다. 과거 '깊이 읽기'와 같은 진정한 의미의 ‘서사의 회복’은 불가능한 걸까?


문자의 대중화를 우려한 소크라테스가 세상을 떠난 기원전 400년부터 13세기 무렵 스크립투라 콘티누아가 사라지기까지 1700년 가까이 걸렸다. 문자가 성숙해 ‘깊이 읽기’에 도달하기 까지 1700년 가까이 소요된 것에 비하면, 디지털의 역사는 디지털의 개념을 제시한 라이프니츠부터 계산해도 300년 남짓이다. 학자마다 디지털의 시초를 논하는 것은 모두 다르지만 보통 1995년에 Window 95 등장과 함께 일일이 명령어를 입력하는 CLI 방식에서 GUI 방식으로 변화되었고 PC가 처음 대중화되었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90년대 중반부터 디지털 매체가 발달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문자의 대중화 시기와 동일하게 디지털의 대중화를 기준으로 보자면 40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다. 디지털 시대가 완연한 성숙기를 맞이했다고 하기엔 아직 가야 할 길이 더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성숙기의 핵심에 인공지능이 있다는 상상을 한다. 과거 '깊이 읽기'가 빽빽한 문자 틈에서 띄어쓰기와 문법이 읽기에 수월하게 만들어주자, 뇌가 남는 힘을 의미 해석에 사용할 수 있었던 것처럼, 빽빽한 정보에 파묻혀 필요한 정보를 찾고 분간하기에 급급했던 시기를 끝내고 '사고와 사유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한다. 또한 AI 활용 능력은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를 감지하는 능력과 정보 활용의 주체성 그리고 자기표현의 수단으로써 창의성을 요구한다.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서 요구하는 능력은 해체가 아닌 응집을 요구하기에 인공지능이 현대사회의 고질적인 여러 문제를 타개할 수 있지 않을까. 독서 후 떠오른 막연한 상상이라서 정답이라 생각하긴 어렵지만, 이렇게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고 시도하는 과정이 서사를 회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말한다. "행복은 우리와 함께 산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숨 쉰 그 공기 안에서만 상상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행복의 표상은 구원의 표상과 공명한다. 우리의 삶은 역사적 시간 전체를 수축시킬 힘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근육과도 같다. 또 다른 말로 하자면, 역사적 시간에 대한 진정한 개념은 구원의 이미지에 온전히 그 뿌리를 두고 있다." 40p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는 차치하고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건 개인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루와 그다음 하루, 사건과 사건이라는 단순한 나열이 되지 않으려면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어야 한다. 목표는 고행에 이유를 만들고, 이유는 고행을 지속할 수 있게 만든다. 그래야만 고행의 끝에서 행복이라는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방향과 목표가 없으면, 삶은 이유 없는 고행으로 가득찬 지옥이 된다. 과거를 구제하고 현재와 연결하면 미래에 나아갈 방향을 얻게 된다. 성찰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엮고 정렬해 만든 연속성 위에 삶의 이유와 목표라는 비전을 만들어 내야 한다. 잃어버린 삶의 주체성을 회복하고 과거-현재-미래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써내려가자.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함께 미래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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