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가까운 것과 먼 것을 전제한다. 경험한 모든 것이 간격 없이 현재로 존재한다면 즉 가용한 상태라면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다. 54p
나는 서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서사는 이야기를 어렵게 말하는 표현 정도로 알고 있진 않았나? 서사가 무엇이기에 위기에 처해있다고 저자는 말하는 걸까? 저자는 정보와 지식을 구분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정보와 지식을 구분 짓는 '간격'이라는 개념이 재미있게 다가왔다. 이 거리감이 책 전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틀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보와 나 사이엔 거리가 없다. 정보는 언제 어디서 마주하더라도 의미와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정보의 무간격성이 곧 정보의 가치이기도 하다. 정보는 내용 전달을 위한 언어의 최소 단위로 왜곡을 줄여준다. 하지만 지식과 나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이 간격은 시간과 공간이며 그 속에 경험과 의도가 녹아있다. 지식은 누가 말하느냐, 언제 말하느냐,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전달된다. 지식과 나의 거리만큼 수많은 이야기가 가득하다.
'낮말을 쥐가 듣고 밤 말은 새가 듣는다'는 속담을 예로 들어보자. 이 속담엔 '말조심하라'는 지식을 담고 있다. 이런 지식은 과거엔 말을 주의해야 한다는 개념이 물리적 공간에 국한되어 사용되었다. 하지만 현재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가상공간, 디지털세계를 포함해 더 확장된 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이는 시간이 흐르며 시대적 변화와 함께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이 더해진 결과다. 반면 정보는 지식을 파편화시킨다. 낮과 밤은 몇 시부터 몇 시를 의미하는지, 쥐와 새는 어떤 종인지, 어떤 내용을 들었는지와 같이 의미를 잘게 쪼갠다.
정보는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성향을 띠며 정보와 나 사이에 어떤 개입도 허용하지 않는다. 경험과 의도가 투영되면 정보는 더 이상 정보의 객관성을 잃게 된다. 이런 무간격성의 성질을 가진 정보는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며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무한히 확산-재생산하게 되었다. 정보는 바다라는 비유와 함께 현대 사회에 범람하고 있다. 정보는 현실의 모든 것을 잘게 쪼개며 투명하게 비췄고, 이야기와 나 사이 간격 안에 정보를 빼곡히 채웠다. 알아두면 좋다는 정보, 알아둬야 한다는 정보, 나와 타인 사이 격차를 느끼게 만드는 정보, 현재 나의 직업과 경제적 지위로 예측되는 미래에 대한 정보, 남들이 어떻게 살고 얼마나 잘 사는지에 대한 정보, 삼시세끼 챙겨 먹고 있음에도 내 삶이 위태롭다는 정보 등 내 눈 속으로 무수히 쏟아지는 정보들은 관심을 독점하고 이야기를 소외시킨다. 그렇게 이야기는 사라진 건 아니지만 서서히 잊혀지고 있다. 서사의 위기는 우리가 이야기를 외면해서 생겨난 위기인 셈이다.
오늘날의 정보 쓰나미는 우리를 최신성에 도취된 상태로 추락시킴으로써 서사의 위기를 악화시킨다. 정보는 시간을 잘게 토막 낸다. 시간은 현재의 좁은 궤도로 단축된다. 37p
잠깐, 정보보다 서사가 더 중요한 게 맞나? 내 삶과 관련되고, 당장 내 삶을 개선하고, 더 나은 삶을 만드는 데 필요한 건 정보 같은데? 정보는 그렇게 나의 시선을 빼앗는다. 정신없이 정보를 수집하고 쫓다 보면 나를 위해 뭔가 열심히 한 것 같은데, 막상 돌아보면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다. 내 지식을 축적하는 서재에 필요한 정보가 엄청 저렴하고 양도 방대하길래, '완전 거저잖아?'라 생각이 들어 범람하는 정보를 미친 듯이 소비하고 수집하게 만든다. 그렇게 모아온 정보들은 정말 내게 중요하고 필요한 곳에 사용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대부분 그렇지 않다. 일단 내 서재에 필요한 정보를 선별하고 분류하고 배치하는 과정을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저 겨울을 앞둔 다람쥐처럼 그저 모으고 쌓아두고 대부분은 어디에 두었는지조차 망각한다. 또한 막상 서재에 배치하려고 보니 내 서재의 분류 체계에 맞지 않는다. 그렇게 버려지고 방치되는 정보들로 서재를 채우니 서재가 너무 가득 차버렸다. 기존에 잘 사용하던 지식도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할 때가 생긴다. 주의산만, 브레인포그, 무기력…. 쏟아지는 디지털 세계의 콘텐츠를 열심히 쫓은 사람들이 곧잘 느끼는 증상이다. 이야기를 잊고 정보에 취한 현대인은 병들어가고 있다.
스토리텔링의 생산물로서 서사는 오히려 정보의 특성을 많이 띤다. 정보처럼 덧없고, 임의적이고, 소모적이다. 삶을 안정시킬 힘이 없다. 134p
어라? 현대 사회야말로 이야기가 넘치는 사회가 아니었나? 이야기가 잊혀서 생긴 서사의 위기라니 인정할 수 없어!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정보를 엮어 만들어진 이야기가 기존 이야기를 대체가능하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오산이다. 그렇게 도구화하고 상업화해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는 결코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정보를 아무리 엮어봐도 이야기로 연결될 수 없다. 정보의 무간격성이란, 본질에 닿지 못한 채 표면만을 잘게 쪼개 파편화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런 부스러기들을 아무리 붙여봐야, 이는 텅 비어 있는 사건의 나열이 된다. 본질과 표면의 간극만큼 간격을 갖는다. 진짜 이야기는 이 간격 속에 경이롭고 의미심장한 무언가를 담아낸다. 이야기가 갖는 강렬한 에너지의 원천이자 아우라의 정체다.
연결해야 할 것은 표면과 표면이 아니라 표면과 본질이다. 표면과 표면을 연결한 이야기는 동의를 얻을 수는 있지만, 표면과 본질을 연결한 이야기는 이해를 돕고 질서를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질서는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나와 세계가 관계를 맺도록 돕는다. 이야기가 현존재의 존재 양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해를 거듭하다 보면 인류 진보의 서사를 마주하게 된다. 인류 진보의 서사는 마치 탑을 쌓는 것과 같다. 현 인류의 과제는 언제나 탑 위에 새로운 층위를 쌓아올리는 일이다. 어떻게 쌓는지, 어디로 쌓아올려 나아가는지, 무엇부터 쌓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탑 위에 벽돌 하나 새로 올릴 수 없다. 이 서사를 이해해야만 다음 벽돌이 놓일 자리를 알게 된다. 새로운 층위를 쌓는다는 건, 기존의 이론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뛰어넘는 개념이 제시됨으로써 시작된다. 새로운 지각은 새로운 개념을, 새로운 개념은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점이 된다. 새로운 개념이 세계에 구현되며 미치는 영향과 세계가 변화하는 과정이 모두 이야기가 된다. 변화 과정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이야기가 탑에 새로운 층을 쌓는 것, 그 자체이다.
정보는 탑을 쌓는 듯한 인류 진보의 서사를 이해하기보다, 진보의 서사라는 탑의 존재와 그 탑의 질서를 인지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정보에 길들여진 사람은 탑을 쌓는 게 아니라, 오히려 탑을 해체하면서도 스스로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저자는 이런 경향을 가진 현대인을 '경험의 빈곤이 만든 야만인'이라 말한다. 이 야만인은 탑의 존재와 질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자기 삶의 안전과 편의를 보장하지 않는 현대사회의 불합리를 말한다. 이들은 주체성을 잃은 채 스스로를 약자로 여기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를 바란다. 현대사회에서 서사의 의미가 퇴색되며 관심을 잃고 소멸해 가는 현상은 단순히 서사의 소멸로 그치는 게 아니다. 서사의 '위기'를 논하는 이유는 진보의 서사에 퇴보를 바라는 자기파괴적인 방향성이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경험의 빈곤을 환상 없이 현실적으로 직면하고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에 열광하는 근대의 예술가와 작가 이름을 열거한다. 이들은 구식 시민계급에 단호히 작별을 고하고 '더러워진 기저귀를 찬 채 소리만 질러대는, 마치 신생아처럼 벌거벗은 이 시대의 동시대인들에게 집중'한다. 이들은 투명성과 '비밀 없음'을, 즉 '아우라 없음'을 신봉한다. 31p
정보의 범람은 현대인들의 눈을 가리고 이야기가 설 자리를 잃게 했다. 이야기를 잃은 현대인은 점차 삶의 본질을 잊는다. 예를 들자면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산다. 모든 면에서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삶 속에서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는 언제나 뒷전이 된다. 꽉 쥐고 있어도 모자를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놓아버렸다. 내가 무엇을 할지, 어디로 나아갈지에 대한 결정권을 자신이 아니라 외부에 의존하고 더 나아가 위탁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이야기도 본질을 잃었다. 본질을 담은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하기 위한 이야기, 심지어 더 많이 선택받기 위한 이야기가 양산되며 이야기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왜'라는 물음을 잊은 인간은 허무주의로 향한다. 만연한 피로와 무기력은 본질을 탐구하고 주체성을 회복할 의지마저 스스로 놓게 만든다. 때마침 그들이 손 뻗으면 닿는 가까운 곳에는 이런 복잡한 생각을 잊게 할 수많은 유희거리가 있다. 시간과 주의력을 빼앗는 현대사회는 현대인의 존재 가치 상실에 박차를 가한다. 서사는 개인에게는 주체성을 회복하고 삶을 지속할 힘을 제공하고, 인류에게는 협력의 구심점과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한다.
아도르노는 이를 근대의 만연하는 세속화 과정에 대한 은유적 이야기로 해석한다. 세계는 계속 탈신비화되어 간다. 신화적 불은 꺼진 지 오래다. 더 이상 기도하지 못한다. 내밀한 명상 역시 하지 못한다. 숲속의 신화적 장소도 잊혔다. 오늘날은 여기에 더 결정적인 것이 추가된다. 이제 우리는 신화적 장면을 회고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이야기할 능력마저 상실해 가는 중이다. 88p
「서사의 위기(2/2) : 서사를 회복한다는 건」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