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에서 찾은 내 삶의 태도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고 (2/2)

by 온명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고 (1/2)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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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평범함을 두려워하는가


스토너의 동료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 노장 교수들에게 스토너의 이름은 그들을 기다리는 종말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젊은 교수들에게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일깨워주지 않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도 전혀 없는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책을 다 읽고 다시 돌아보니, 스토너라는 인물의 삶은 결코 가볍게 평가될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째서인지 달라진 스토너에 대한 인상에 저는 소설의 도입부를 다시 펼쳤습니다. 스토너의 삶을 평가하는 문장을 다시 읽으며 저는 스스로에게 놀랐습니다. 분명 처음 도입부를 읽었을 때는 스토너의 삶을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평가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는데, 문장을 곱씹을수록 스토너의 삶을 부정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진 않았습니다. 그저 동료들은 특별하지 않았다고 말했고, 노장 교수들에게는 마지막을 떠올리는 이름이라 말했으며, 젊은 교수들에게도 동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는 말 뿐이었다. 이러한 주변인의 말을 보고 '특별한 인물로 기억에 남지 못하고 너무나 평범한 나머지 잊혀가는 이름이 되었으므로 지양해야 하는 삶'이라며 부정적으로 받아들인 건 온전히 저의 해석이었습니다. 스토너는 자신의 성과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고, 수업에 있어 엄격하고 공정한 교수였으며, 궂은 일과 불편한 일을 대신 처리하는 평범한 삶에 부정적인 의미 부여를 한 사람은 저였어요. 저 역시도 눈부신 성취와 주변에서 인정받는 삶을 쫓고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스토너의 삶은 그런 제게 분명하게 말해주는 듯합니다. 평범해 보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삶, 그니까 누군가 쉽고 가볍게 말하곤 하는 '평범한 삶'은 사실 매우 아름답고 본받을 만한 삶이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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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개인에게 '평범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할 때, 그 의미가 '너무 흔해서 대체할 수 있으며 고유성을 상실한 인간'이라는 평가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마치 유일무이해야 할 '나'라는 존재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만 같습니다. 평범은 어떤 기준에서 평균적이거나 보통의 상태로, 자연과 사회 현상에서 흔히 관찰되는 데이터의 분포인 '정규 분포'를 떠올리게 합니다. 평균과 평범은 분명 맥락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정규 분포상 평균값을 중심으로 한 전체 중 다수를 지칭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보편적이고 일반적 집단을 쉽고 빠르게 지칭한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어 일상 속에서 자주 마주하곤 합니다.

토드 로즈의 「평균의 종말」에서는 '노르마(Norma)'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노르마는 1945년 미국의 의사 로버트 L. 디킨슨과 조각가 아브람 벨스키가 이상적인 체형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1만 5천여 명 여성들의 신체 데이터를 통계적으로 평균하여 만들어진 '평범한' 여성의 조각상입니다. 평균값을 통해 미의 기준을 표방하려 했던 조각상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노르마의 신체 지수와 가장 가까운 여성을 뽑는 공모 대회에서 체형이 일치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심사 위원들의 예상과 달리 9개 항목의 치수 중 5개 항목에서 평균치에 든 여성은 전체 지원자인 3,864명 중 40명도 되지 않았고, 9개 항목 모두 평균치에 가까운 여성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즉, 평범함을 말할 때 떠올리는 상(像)은 결코 평범함을 대표할 수 없습니다. 「평균의 종말」에서 말하듯 평균이란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평범함은 전체 중 다수가 공유하는 일반적인 특징을 의미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이 개인의 고유성을 해칠 순 없습니다. 평범함이란 개인을 설명하는 여러 특성 중 하나가 될 수는 있어도 평범함이 개인의 모든 걸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평범함을 대표하고자 했던 노르마가 평범한 사람 중 아무도 대표할 수 없었듯, 어떤 사람이 평범하다고 해서 평범함이 그 사람의 전부가 될 수 없고, 평범하다 평가받는 모든 개인들이 같을 수 없습니다. 결국 '평범하다'는 어떤 사람을 설명하는 수많은 수식어 중 하나일 뿐, 그 수식어가 개인의 고유성을 훼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평범하다는 말이 좋다 혹은 나쁘다는 가치 판단의 대상이 되는 것 또한 이상한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히 평범함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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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제가 성취와 성장을 지향하는 사람이기에 평범함이 성공한 개인의 모델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시대적-사회적 배경이 제게 영향을 미친 결과이기도 합니다. 「시대 예보: 호명 사회」의 송길영 저자는 현시대의 '시뮬레이션 과잉'이 만든 무한 경쟁 사회를 말합니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는 개인의 삶을 더 선명하고, 더 구체적인 시뮬레이션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시뮬레이션은 개인에게 제시된 선택과 뒤따르는 결과를 투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삶에서 주도적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게 되는 시점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결과를 제시해 줍니다. 성찰이 아니라 탐색 위주로 진로가 결정되는 까닭에 우리는 보다 타인과 비교를 통해 보다 나은 미래를 평가하고 선택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뮬레이션은 인생을 효과적으로 공략하는 도구로 활용됩니다. 시뮬레이션은 시행착오를 줄이고, 더 효율적이고, 더 가치 있다고 평가받는 선택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만들거나 발견한 선택지가 아닌, 사회가 제시한 선택지라는 점에서 개인적 가치보다 사회적으로 더 중요하게 인정받는 가치가 더 높게 평가되는 걸 막을 수 없습니다. 또한 제시된 선택지 외 다른 선택지의 가능성에 제한을 만듭니다. 자연스럽게 개인은 사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되고, 이에 부합하는 삶이 성공적이라 평가받으며, 이에 역행하는 선택을 하기란 어려워지게 됩니다. 제한되고 유도된 선택지와 향상된 시뮬레이션은 진로 선택 단계에서 모든 게 결정된 미래로 개인을 이끕니다. 개인의 삶의 방향이 모두 같은 기준으로 결정되며 한 점으로 모이게 되자, 자연스럽게 경쟁은 강화됩니다. 그렇게 발생하는 '상호 경쟁의 인플레이션'에 '시뮬레이션 과잉'이 더해지자 무한 경쟁 시스템이 지배하는 사회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개인은 사회적-경제적 성공이 삶에서 추구해야 할 당연한 목표가 됩니다.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는 사회적 성공과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경제적 성공이 미덕인 사회에서는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 옆집에 사는 이웃보다 탁월해야만 합니다. 그런 사회는 행복이 아니라, 불안과 피로 그리고 고통을 양산합니다. 무한 경쟁 시스템은 '평범'이라는 단어에 도태와 패배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경쟁에 뒤처진 개인은 불안, 피로, 고통을 피하려 하지 않는, 노력하지 않고 게으르며 나태한 인간으로 포장됩니다. 결코 좋거나 나쁘다고 평가할 수 없는 '평범'이라는 단어에는 어느새 지양하고 경계해야 할 부정적인 가치가 담긴 특성을 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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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기대하는가


무한 경쟁 시스템 속 피로, 걱정, 불안이 만연한 현대인의 삶을 돌아보며 「명상록」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너의 인생 전체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놓고 생각해 봄으로써 네 마음이 짓눌려서 압도되게 하지 말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남긴 문장이 현대 사회에서도 효과적인 조언이 된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 옛날에도 더 나은 미래를 선택하고 싶은 마음에 눈이 멀어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사는 사람이 많았다는 건, 인간에게 걱정과 불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감정이라는 걸 말해주는 듯합니다. 하지만 미래를 섣불리 예단하는 게 걱정과 불안을 줄이긴커녕 현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들고 개인의 주체성을 상실하게 만들고 있진 않나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런 불확실성과 혼란이 만연한 가운데, 우리는 스스로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한 개인의 가치관과 이에 부합하는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스토너처럼 삶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해 보입니다.

한걸음 떨어져 삶을 바라본다는 게 단지 미래를 염두하며 살라는 건 아닙니다. 끊임없이 성찰해서 견고하고 성숙한 자아를 갖춰야 스토너처럼 감정과 이성을 분리하고 자신의 삶을 한걸음 떨어져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 자신을 강하게 흔드는 욕망에 삼켜지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스토너의 그런 관조적 삶의 태도가 정답이나 진리처럼 느껴지진 않습니다. 스토너는 어떤 결과가 다가오든 받아들이고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더 나은 선택지는 찾지 못하고 모든 기회를 스스로 흘려보내는 방관자이기 때문입니다. 지속적으로 문제를 만드는 근원을 제거하거나 더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능동적으로 해결책을 찾지 않습니다. 한걸음 떨어져 바라보는 삶의 태도는 고통을 줄이는 데 도움은 되지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부족해 보입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 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 그런 생각이 하잘것 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중략) 주위가 부드러워지더니, 팔다리에 나른함이 조금씩 밀려들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감각이 갑작스레 강렬하게 그를 덮쳤다. 그 힘이 느껴졌다. 그는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자신을 알고 있었다.


스토너가 스스로 계속 되묻던 '넌 무엇을 기대했나?'라는 물음이 꽤 오랜 시간 동안 제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젊은 스토너는 전쟁에 참전할지를 고민하며 내면을 성찰하는 일이 힘들고 싫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넌 무엇을 기대했나?'라고 스스로 질문하며 성찰하는 모습은 젊은 스토너와 매우 상반되어 보입니다. 스토너는 선택의 기로 앞에서 늘 성찰하며 최선을 다해 결정을 내렸고 그 결과에 책임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성찰하는 힘을 기르며 성장해 온 스토너는 죽음 앞에서도 꽤 만족스러운 삶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평범하다고 말했던 스토너의 삶은 사실 꽤나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이라고 부를 만했습니다. 자신을 매료시키는 일을 찾고 평생 그 일을 했으며 끝까지 그 일을 사랑했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끝까지 가정을 지켰고 원수와 같던 아내는 죽음의 순간까지 그의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비록 끝이 좋을 수 없었던 비운의 사랑이었지만 진짜라고 부를 만한 사랑을 했고, 끝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준 진정한 친구와 자신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이뤄지는 완벽해지는 삶이 얼마나 될까요? 완벽한 삶이란 아마도 평범함을 대표하려 했던 노르마와 같이 허상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은 분명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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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삶에서 무얼 기대하고 있는 걸까요? 스토너의 삶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스토너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성찰한 끝에,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만족스러운 삶이라고 느낍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스토너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며 따라 한다고 해서 제가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리 만무합니다. 제겐 저만의 삶이 있습니다. 스토너의 삶은 제게 따라야 할 정답을 제시하고 있다기보다는, 저만의 삶을 살기 위한 하나의 단서를 남겨주었습니다. 제가 스토너의 삶을 엿보는 동안 내내 아쉽고 답답하게 느꼈던, 무심하고 방관자 같은 태도를 떠올려 봅니다. 그것에는 제가 관철하고 지켜야 할 신념과 태도를 찾으라는 조언과 그 방향에 대한 단서가 담겨 있었습니다.

스토너는 삶을 떨어져 바라보았기에 소중한 사람에게 때론 무심하고 문제해결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쉼 없이 자신을 흔들고 고통을 주는 일에서 멀어짐으로써 정서적 안정은 얻었지만, 그런 문제에 맞닿아 해결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수많은 행복을 놓쳤습니다. 스토너는 행복 추구에 있어 수동적이었고 결과에 순응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스토너의 관조적인 삶의 태도와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실천적 삶의 태도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균형 잡힌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멀어지면 태산 같아 보이던 문제도 낮은 둔덕이 되어 넘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멀어지면 자신의 존재가 너무나 미약하게 느껴져 주체성을 잃고 무기력에 빠지기도 합니다. 반대로 너무 가까우면 작은 돌부리에도 걸려 넘어져 다치기도 하고, 넘어볼 만한 둔덕도 태산처럼 느끼며 좌절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삶을 밀접하게 느끼고 바라보는 관점은 날 넘어뜨린 돌부리 옆에 피어난 꽃 한 송이에 미소와 용기를 얻게 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삶에 몰입해야 불어노는 바람에도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다가올 변화를 반갑게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눈앞의 작고 사소한 일에 웃기도 울기도 하면서도, 너무 고통스럽고 좌절에 빠져있을 때는 잠시 멀어져 이성적 사고를 하며 침착하고 차분하게 목표로 나아가는 상상을 해봅니다. 마치 장대를 들고 삶이라는 외줄을 타는 사람처럼, 끊임없이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고 균형 잡고 나아가는 삶을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