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에서 배우는 삶의 태도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고 (1/2)

by 온명





기대에 못 미치는 삶


삶은 왜 이리도 고되고 힘든 걸까요?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 너머에는 행복해 보이는 것들로 가득해 보입니다. 마치 저만 행복하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해요. 만연한 행복이 행복을 당연하게 만들고 세상은 그런 저를 구렁텅이 밀어 넣듯 행복을 좇는 알고리즘을 계속해서 가져옵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제가 선망하는 삶을 정신없이 구경하다 보면, 행복은 점차 구체화되더니 어느새 실체를 갖고 제 눈앞에 강림해서는 직접 제게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실체가 없던 제 상상 속 행복은 알고리즘 속 온갖 행복해 보이는 것들을 기워 붙이고 짜깁기된 행복 누더기가 되어 진짜 저의 행복인양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근데 우스꽝스럽게도 그 행복 누더기가 너무나 그럴싸해 보여서 저 자신도 그게 진짜 행복이라고 믿고 숭배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를 둘러싼 현실은 벗어나고 싶고 벗어나야만 하는 지옥이 되어버렸습니다. 현대인이 겪는 우울과 무기력은 모두가 소망하는 이상적인 삶과 자신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의 삶 사이의 괴리만큼 크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눈 깜짝하면 산더미처럼 쌓여버리는 불안과 피로, 그 위로 속절없이 쌓여만 가는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들. 그걸 마주하고 있노라면 제가 정말 좋아하고 소망하는 것들을 쫓는 삶은 사치가 됩니다. 정말 이상해요. 제 손에서 밝게 빛나는 작고 네모난 창에서는 분명 삶의 아름다움과 찬란하게 빛나는 꿈을 예찬하는데, 저는 어째서인지 그 빛만큼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서 허우적거릴 뿐입니다. 이상적인 삶만이 인정받는 이상한 평균의 기준이 지배하는 이곳에서 저는 아주 잘못된 사람이 됩니다. 이토록 가혹한 이곳에 적응하려 자신을 쉼 없이 채찍질하다가 지쳐 쓰러져 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가리키며 잊혀버린 패배자의 삶,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삶, 경종을 울리는 삶처럼 여기며 평범해서 잊히는 삶이라 말하며 경계하는 말이 번져갑니다. 「스토너」는 영문과 교수 윌리엄 스토너의 삶에 대한 평가로 시작합니다.


스토너의 동료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 노장 교수들에게 스토너의 이름은 그들을 기다리는 종말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젊은 교수들에게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일깨워주지 않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도 전혀 없는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스토너의 삶


“다행이군. 기록에는 자네가 원래 농과대생으로 입학했는데, 2학년 때 문학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으로 되어 있네. 맞나?”
“맞습니다.” 스토너가 말했다. (중략)
“모르겠나, 스토너 군?” 슬론이 물었다. “아직도 자신을 모르겠어?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일세.” (중략)
“그런 걸 어떻게 아시죠?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이건 사랑일세, 스토너 군.” 슬론이 유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아주 간단한 이유지.”


스토너의 삶은 지극히 평범한 삶을 평가되었지만, 그 삶을 자세히 바라보자면 그 누구보다 근면하고 성실하게 삶을 산 사람이자, 교수이자, 아버지였습니다.

젊은 스토너는 자신의 의지보다는 누군가의 의지로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수동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평범한 농부의 자식이었기에 당연히 농부로 살아갈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있던 스토너에게 아버지는 대학 진학을 권유했습니다. 스토너는 반발하지도, 반기지도 않고 아버지의 의견에 따라 대학에 갑니다. 스토너의 아버지는 아들이 대학에서 얻은 지식과 기술로 자신보다 더 나은 농부의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스토너는 영문학개론 수업에서 문학과 사랑에 빠져버립니다. 그제야 스토너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눈을 뜨게 됩니다. 어찌나 푹 빠졌는지 단지 영문학개론 수업을 좋아했다에 그치지 않고 농과 대학이 아닌 문학도로 졸업하기에 이릅니다. 이건 스토너가 남이 아닌 스스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한 첫 번째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을 뿐 여전히 대학 졸업 이후의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스토너는 자신의 문학의 길로 이끈 아처 슬론의 제안에 따라 교수가 됩니다. 정해진 경로에서 벗어나는 시도는 했지만 그의 수동적인 면은 여전했던 것입니다.

농부의 삶이 아닌, 새로이 펼쳐진 문학도라는 미지의 삶의 경로는 스토너에게 수많은 선택을 하게 만듭니다. 만일 스토너가 농부가 되었더라면 농부 아버지라는 훌륭한 롤모델을 따라 편안하게 성장하고 효율적인 선택을 할 수 있었겠지만, 문학 교수라는 삶을 선택한 스토너는 입대와 학업 사이 결정, 교수로서의 첫걸음, 처음으로 쓰는 자신의 책에 이르기까지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삶을 헤쳐나가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의 선택이 최고의 선택일 수는 없었습니다. 도움을 줄 가까울 사람도, 결정을 대신해줄 사람도 없던 스토너는 개척자처럼 보였습니다. 농부가 되진 않았지만, 농부의 기질은 사라지지 않고 스토너의 바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농부라는 토양은 근면하고 성실하며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되어 스토너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투에 자신감이 붙었고, 그의 내면에서는 따스하면서도 단단한 엄격함이 힘을 얻었다. 10년이나 늦기는 했지만, 이제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차츰 알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발견한 새로운 자신은 예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훌륭하기도 하고 더 못나기도 했다. 이제야 비로소 진짜 교육자가 된 기분이었다.


스토너의 근면하고 성실하기만 했던 자아에 눈에 띄는 변화가 생긴 건 그의 딸, 그레이스 덕분이었습니다. 그레이스를 낳고 병약해진 아내 이디스를 대신해 육아를 도맡아 하게 된 스토너는 그레이스와 특별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스토너가 집에서 일을 하거나 글을 쓰고 있으면 그레이스는 그런 스토너를 지켜보는 게 일상이었고, 그러다 자연스레 둘은 대화를 나누곤 했습니다. 서재에서 이뤄지는 아이와 조용하고 진지한 대화는 곧 좋은 수업이 되었습니다. 그레이스를 가르치며 스토너는 교수라는 정체성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전까지는 스토너 스스로 좋은 교수라고 여기지 못하며 자질을 의심해 왔습니다. 딸을 가르치며 스토너의 교수라는 정체성이 구체화되었고, 그의 성실하고 올곧은 정체성과 통합되기 시작하면서 성숙하고 견고한 자아가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성숙하고 건강한 자아는 스토너의 말과 행동, 그리고 태도에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인지하는 '나'와 외부에서 인지하는 '나' 사이 차이가 줄어들자, 그의 삶은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변화에 스토너는 학교에서 좋은 평판과 학생들의 신임을 얻게 되고, 스스로도 좋은 교육자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 달도 안 돼서 그는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1년도 안 돼서 결혼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렸다. 그는 침묵을 배웠으며, 자신의 사랑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불행해 보인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가 이런 말을 꺼내면, 그녀는 그것을 자신에 대한 질책으로 받아들여 그가 사랑의 행위를 할 때처럼 침울한 표정으로 마음을 닫아버렸다. 그는 자신이 서투른 탓에 그녀가 마음을 닫았다고 한탄하며 그녀의 기분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수동적인 인물에서 주체적인 인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스토너였지만, 자신에게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임에도 무심한 방관자처럼 보이곤 합니다. 스토너의 아내인 이디스는 강박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미국 상류 사회의 교양과 지식을 채우고 말과 행동을 따랐지만, 정작 이디스 안에는 자신의 것이라 부를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강압적인 주입식 교육을 받은 이디스는 주체성을 갖지 못한 채, 자아에 공백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기에 미숙하고 서툴렀던 스토너의 갑작스러운 접근과 고백, 심지어 결혼까지도 감정적 동요 없이 덤덤하게 받아들일 뿐이었습니다. 스토너의 미숙함은 경험하지 못한 데서 온 서투름이었다면, 이디스의 미숙함은 마땅히 겪었어야 할 주체적인 경험의 부재로 인한 미완성된 인간성에 의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완벽한 인간이 어디 있겠냐만은, 이디스의 인간성은 인간이라는 그릇이 깨져 이어 붙인 것 마냥 어딘가 이가 빠지고 곳곳에 틈이 있는 모습 같습니다. 특별해 보였던 모습은 점차 특이하게 느껴지다가, 어느 순간 기행처럼 묘사됩니다.

스토너의 미숙한 첫사랑이 결혼까지 도달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미숙하지만 서로 다른 둘은 문제가 생기면 대화하고 조율하기보다는 더 이상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외면하고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둡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지만, 계속해서 쌓여만 가는 오해와 실수들은 둘을 앙숙에 가까운 관계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결국 스토너는 이디스와 적당한 거리를 찾고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기고 침묵하기를 선택했지만, 이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지붕 아래 살며 언제고 반드시 찾아올 재앙을 기다리는 거소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스토너는 서서히 미숙함을 벗어나고 안정된 자아를 형성하게 되었지만, 이디스와 관계를 개선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방치할 뿐이었습니다.





한 편 아이에게 강박적으로 집착하던 이디스의 태도가 조금 느슨해졌기 때문에 아이도 가끔 미소 지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편안한 태도로 이야기를 건넬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가끔 이만하면 살만하다고,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레이스를 두고 둘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습니다. 스토너가 성숙해질 수 있도록 기여할 만큼 그레이스는 그에게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문제는 그런 스토너의 변화를 감지한 이디스였습니다. 그녀는 성숙하고 안정적으로 변화한 스토너에게 시기심을 느낍니다. 특히나 스토너와 그레이스 사이 특별한 유대감을 질투했습니다. 그래서 스토너가 가진 것들을 공격하고 빼앗기 시작합니다. 스토너가 만들고 가꾸며 애정이 담긴 서재를 빼앗고, 자신의 이웃과 친구들에게 스토너를 음해했고, 그들의 자녀들이 스토너가 준비 중인 새로운 저서를 훼손하도록 방치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이디스는 사랑과 염려라는 말을 앞세워서 스토너로부터 그레이스를 단절시켰습니다. 이디스로 인해 고통받고 야위어가는 그레이스르 바라보는 스토너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낍니다. 하지만 이디스에게 깊은 죄책감을 갖고 있던 스토너는 그녀를 제지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이디스를 자극하지 않고 시야에서 멀어지기를 선택합니다. 그러자 그레이스를 향한 이디스의 강박이 느슨해지는 것을 보고 만족합니다. 그렇게 스토너는 자신과 긴밀한, 아주 가까운, 매일 같이 보는 소중하고도 중요한 관계를 스스로 포기합니다. 자신이 원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갈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배려라는 이름 아래 그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모두 시간 위로 떠내려가지만, 스토너는 그 모습을 그저 바라보는 방관할 뿐입니다.


바깥세상이 점점 조여 들어오는 동안 두 사람은 그 세상의 존재를 덜 의식하게 되었다. 함께 느끼는 행복이 너무 커서 바깥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작고 침침한 캐서린의 아파트, 육중하고 낡은 주택 밑에 동굴처럼 숨어있는 아파트에서 두 사람은 시간을 벗어나 자기들이 직접 발견한, 시간을 초월한 우주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중략)
스토너는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멍하니 무감각한 상태로 핀치를 찾아갔다. 그에게 닥친 일은 정말이지 단순하고 전형적이었다. 스토너가 미리 짐작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일.
"로맥스야" 핀치가 말했다. "그 개자식이 어디서 소문을 듣고는 물고 늘어질 태세야."


캐서린은 스토너가 마흔 살이 넘어서야 찾아온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스토너는 자신의 수업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찰스 워커와 갈등 이후 학과장인 로맥스와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로맥스로 인해 그는 학교에서 서서히 고립되고 있었습니다. 억울했지만 스스로 처한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더불어 일과 가정 어디에서도 위로받을 수 없던 스토너는 지독한 공허와 고독에 빠져 있었습니다. 캐서린 그런 스토너를 절망에서 꺼내준 사람입니다. 로맥스에 의해 교수로서 앞날이 캄캄하던 중에 스토너의 처지와 배경, 나이, 사회적 지위 등 그 어떤 것도 상관없이 그를 온전히 바라보고 순수하게 사랑해 주었습니다. 두 사람에게는 순수한 사랑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륜이자 교수와 제자의 불건전한 관계로 비칠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스토너를 학교에서 쫓아내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로맥스가 두 사람을 가만히 둘 리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스토너에게는 가정의 평화를 지키고 교수라는 직함을 유지하거나 혹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진정한 사랑 사이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토너는 스스로 선택하기보다 방관함으로써, 선택할 기회조차 잃어버리고 그저 최악의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로맥스에 의해 불륜 사실이 학교에 널리 퍼졌고, 그 소식은 이디스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세상에 둘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던 캐서린을 떠나보냈습니다. 스토너는 아무리 소중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관계일지라도 또다시 방관할 뿐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 기억 밑에 고생과 굶주림과 인내와 고통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그가 분빌에서 농사의 존재로서 근면하고 금욕적으로 살다 간 선조들에게서 혈연을 통해 물려받은 것에 대한 지식이 항상 의식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선조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을 보여주자는 공통의 기준을 갖고 있었다.


캐서린과 이별한 후 스토너는 생애 처음으로 병을 크게 앓았고, 후유증으로 청각 일부를 잃습니다. 자신의 일부가 죽었다고 느껴질 만큼 고통스럽고 힘들었지만, 스토너는 다시 교단에 섭니다. 비록 수척하고 앙상해져서 급속히 늙어 보였지만, 교수로서 스토너는 더욱 성숙해졌습니다. 거센 폭풍처럼 모든 걸 끝내버릴 것 같았던 시간 후에도 삶을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하지만 삶은 늙고 병든 인간일지라도 가만두는 법이 없습니다. 로맥스는 여전히 스토너를 무시하고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고, 이디스는 집에 머무는 스토너를 공격하더니 숨어버립니다. 그레이스와의 관계는 멀어지다 못해 그녀의 갑작스러운 임신과 함께 훌쩍 떠납니다. 점차 혼란이 가중되던 세상은 또다시 전쟁이 터지더니 그레이스 남편의 목숨을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끝도 없이 찾아오는 고난과 역경에도 스토너는 더욱 단단해지고 있었습니다. 그건 뼛속 깊이 각인된 스토너의 근면 성실함 덕분이었습니다.

세월이라는 굳은살은 사람을 무심하게도 만들지만, 고통에 내성을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굳은살은 어느 날 갑자기 마법처럼 짠하고 생기지 않습니다. 그건 아파서 눈물도 흘리고, 고통에 소리를 지를 만한 일들이 하나씩 켜켜이 쌓여서 단단하게 굳어버린 흔적입니다. 그렇게 단단해진 경계를 따라 내가 나답게 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게 됩니다. 그 단단한 경계는 나다운 삶과 성숙한 자아를 지켜주는 견고한 벽이 되어줍니다. 외부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고 단단하고 무던한 모습은 그의 고단한 삶과 치열한 투쟁의 증명인 셈입니다.


스토너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마치 방금 의사에게서 들은 일이 조금 거추장스러운 일에 불과한 것 같았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끝내기 위해 어떻게든 에둘러 돌아가야 하는 장애물 같은 것.


암을 선고받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마주했지만 스토너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근면 성실함이 그의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면, 삶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태도는 고통과 불안에서 한걸음 떨어져 바라볼 수 있게 했습니다. 그 거리감 덕분에 그는 중요한 결정의 순간마다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는 선택을 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 스토너였기 때문에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떨지 않고, 아쉬움과 억울함에 저항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당장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렸습니다. 스토너는 눈앞에 닥친 고통과 밀려오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삶에서 정말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선택합니다.




삶을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스토너의 관조적 태도는 관계에 있어 무심하고 방관자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삶의 태도가 스토너를 쉼 없이 괴롭히는 고난과 역경에도 쓰러지지 않게 했습니다. 덕분에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얽힌 문제 앞에서도 스토너는 자신의 신념을 관철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 소설의 도입부에서는 스토너의 삶이 특별하지 않으며 너무 평범해서 잊힐 사람으로 여기는 듯했지만, 스토너의 삶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켜본 독자로서 감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토너는 올곧은 신념을 갖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한 특별한 사람이었고, 수많은 고난과 역경에도 포기하지 않고 삶을 근면 성실하게 살았으며, 그는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책임감이 투철하고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의 죽음에 애도하고 곁을 지켜줄 친구와 가족이 있었습니다.

흔히 평범하다 말하는 삶을 떠올려봅니다. 모든 인간의 삶을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는 조그마한 개인이 있고, 희로애락이 담긴 드라마가 있으며, 삶을 관통하는 의미와 간절히 소망했던 바람이 있을 것입니다. 스토너의 삶은 멀리서 바라봤을 땐 평범해 보였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평범하지 않았듯, 우리네 모든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평범함을 벗어날 수 없고 평범한 삶을 살 수밖에 없지만, 어째서인지 평범함에는 마치 부정적인 인상이 강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한 인간으로 보자면 특별하지 않지만, 똑같은 삶 하나 없는 유일무이한 각자의 서사를 풀어내는 특별한 삶을 삽니다. 특별함을 선망하기에 평범함을 부정하려 애쓰지만, 세상 위에 발을 딛고 사는 현존재로서의 우리는 이미 특별하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듯합니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고 (2/2)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