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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wnscale Jun 28. 2019

일을 참 열심히 했었다

실존하는 삶

     일을 열심히 했다. 같은 동기들이나 선배들이 빨리 퇴근하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을 눈으로 배웅하고 회사 불을 끄며 퇴근했다. 퇴근하며 끈 불을 출근하며 다시 내가 켜기도 했다. 주어진 일을 100프로가 아니라 150프로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평범한 일을 받아 평범한 결과물을 내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평범한 과제든 비범한 과제든 비범한 결과물을 내고 싶었다. 비범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주변의 인정을 바라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했나 되물어 보면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고, 어느 정도는 틀린 말이다. 주변이 모두 인정하더라도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면 오히려 불편했다. 모두가 인정하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의도대로 일이 마무리되면 만족스러웠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렇게까지 해야 한다고 판단한 일에는 낮이고 밤이고 새벽이고 주말이고 없었다. 반대로 이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어도 흥미가 들지 않거나 굳이 내가 아니어도 끝날 일에 대해서는 지지부진했다. 편식하듯 하지만 난 하루 종일 무언가를 먹으며 쉬지 않고 편식하는 거 같았다. 8시까지 출근해서 10시 퇴근하고, 12시 퇴근하고, 어떤 날은 새벽 4시 퇴근하고 다시 8시에 출근하기도 했다.


     승진 때문이었나 임원이 되고 싶어서였나 물어보면 그건 아니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싶었다. 회사는 물리적이든, 상징적이든 장소에 불과하다. 회사를 떨어 뜨리고 스스로를 판단했을 때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가 더 중요하다.


     나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고 싶다. 존재는 단순히 있으면 된다. 공간을 차지하거나, 우리가 인지하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존은 존재 그 이상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실존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은 채로 그 본연으로서, 혼자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의자는 존재하나 실존하지 않는다. 인간이 의자로써 사용하지 않으면 본연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존재하는가 실존하는가?


     회사에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다라며 살며 그건 존재의 길이지 실존의 길은 아니다. 나의 외적인 것에 의해 나의 존재가 결정된다면 실존은 아니다.


     그렇다고 회사생활 적당히 해야 한다라는 말은 위험한 말이다. 일주일에서 우리가 깬 시간(수면시간 7시간 기준)은 119시간이다. 일주일 중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은 50시간으로 일주일의 42% 정도를 차지한다.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매주 시간의 42%를 적당히 보낸다는 것은 매우 아깝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는 자유이지만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스스로의 계획(의도)이 있어야 한다.


     일과 삶의 균형은 이상한 말이라 생각한다. 삶 속에 일이 있는데 마치 저 문장은 시소 위에 그 둘을 동일한 무게로 태우려고 하는 듯한 시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삶 속에 일이 차지하는 부분을 어느 정도로 하느냐에 대한 고민이 일과 삶의 균형으로 표현되는 것 같다. 그런 접근도 의미는 있겠지만 아예 일을 삶 속에 녹이면 어떨까? 42%에 쏟아붓는 시간도 최대한 나머지 58%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려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42%와 58%를 별개로 생각해서 산다면 나는 절반만 사는 것이 아닌가?


     어쨌든 일을 참 열심히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이 목표다. 그것이 어떤 도구인지를 통해서인지는 모르겠다. 일을 통해서든, 단순히 밖에서 누군가와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는 것을 통해서든 내 주변의 사람들이 행복하고 그 행복에 내가 조금 기여하면 나도 행복해지는 거 같다. 훌륭한 분들이 봉사나 기부를 하는 것과는 결이 다른 거 같다. 나는 나의 행복에서 시작한다.


     일주일의 절반을 소모하고 싶지 않고, 나머지 58%의 연료로써 사용하고 싶지 않아 역설적으로 일을 참 많이 열심히 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엔 지금 회사에 인생을 바친 사람 같아 보였을 것이다. 정작 나는 회사는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기 위한 과정의 하나로 5년 만에 회사를 옮겼다. 주변에서는 매우 놀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임원을 목표로 하고 있는 줄 알았던 것 같다. 


     이직 후 첫 출근이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된다. 처음부터 잘할 순 없겠지만 항상 첫 번째보단 두 번째를 더 잘했던 거 같다. 똑똑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어쨌든 어제의 나보다는 나아지고 있다. 새로 옮긴 회사에서도 일을 참 열심히 할 거 같다. 그러나 역시 일을 위해서라든가, 회사에서의 위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목표를 위해서일 거 같다.


     나의 주변에 혹은 더 넓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실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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