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엔 아직 세탁기가 없다. 며칠 동안 모아둔 빨래로 부푼 파란 이케아 가방을 어깨에 메고 횡단보도를 건넌다. 더 놔뒀으면 이케아 가방의 배가 터졌을 거 같다. 코인 세탁기에 넣을 500원짜리 동전들이 바지 주머니에서 탬버린처럼 짤랑거린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린다. 한밤중에 선명하게 깜빡이는 횡단보도의 초록불을 바라보면 기분이 좋다. 빨래방 가는 길에 bgm을 빼놓을 순 없지. 유튜브뮤직에서 Imagine Dragons가 새 앨범을 냈다고 추천해준다. 10~12곡으로 꽉꽉 채워진 밴드의 정규앨범을 보기는 오랜만이다. 별생각 없이 1번 트랙부터 듣는데 고등학교 때 즐겨 들었던 밴드 노래들이 떠오르며 반가운 마음이 든다.
예전에 즐겨 들었던 노래들이 생각난다. 가요는 평범한 거 같아 싫었다. 외국 밴드 노래나 우리나라 인디밴드의 노래를 CD로 구워 CDP로 들었다. CD를 굽는다는 말도 그리운 말이다. 아주 오래전 즐겨 들었던 노래를 다시 들으면 과거 그 순간에 내가 경험하고 있던 것들이 꾸러미로 함께 온다.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를 하다 밤 10시가 되면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는 방송이 나온다. 거북이 등딱지처럼 잔뜩 부푼 책가방을 메고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들었던 넬 노래를 다시 들으면 마치 그 밤의 공기 냄새가 나는 것만 같을 때가 있다. 그때 즐겨 들었던 CDP는 도서관에서 도둑맞았다. 그때를 생각하니 슬프다. 나쁜 놈.
최근에 카드지갑을 잃어버렸다. 난생처음 판교 현대백화점 명품관에 혼자 줄을 서서 산 카드지갑이었다. 서윤이와 신나게 놀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집에 도착하니 지갑이 없었다. 어디다 흘렸지? 알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것에 생각 정리가 빠른 편이다. 좋지 않은 일이 잃어났는데 거기에 좌절, 분노까지 지불해야 하다니. 빚의 이자의 이자의 이자 같은 느낌이다. 애쓴다고 바뀔 것도 아닌데 왜 계속 끌어안고 있는가. 잃어 버린 것도 바보지만 그걸 끌어 안고 끙끙 거리는 것은 더 바보다. 그날 밤 새 카드지갑을 샀다.
잃어버린 걸 인정하고, 빨리 포기하고, 새 지갑을 빨리 사면 좋은 점이 무엇일까? 배송이 빠르다. 아등바등해도 소용없는 건 빨리 놓아주고 새로운 걸 잡는 게 낫다. 이튿날 문 앞에 놓인 납작한 택배박스에 눈인사를 건넨다. 들인 돈에 비해 상당히 가볍다는 생각을 하며 택배를 책상 위로 옮긴다. 택배를 열기 전에 약간 설레는 마음이 박스를 두들긴다. 툭툭.
그 지갑은 지금 잘 들고 다닌다. 그런데 택배를 뜯기 전, 뜯은 바로 후, 뜯은 그날의 설렘과 만족이 지금과 같을까? 같지 않다. 그리고 이 설렘은 1년 뒤, 2년 뒤,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기만 하지 커지지 않는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들었던 노래는 어쩌다 다시 들을 때면 여전히 좋거나, 더 좋을 때가 있다. 좋은 노래를 들었을 때의 첫 감동이 나중에 옅어질 순 있다. 시간이 흘러 어쩌다가 그 노래를 다시 듣는 양이면 오히려 그때보다 더한 울림을 줄 때가 있다.
노래엔 많은 걸 담을 수 있다. 그 노래를 들었을 때 나의 나이, 상황, 시간, 날씨, 냄새, 입고 있던 옷, 내일 있을 일, 어제 있던 일 나의 것들을 많이 담을 수 있다. 최근에 산 지갑엔 꽤 여러 가지 카드와 신분증을 넣을 순 있으나 아직 다른 것은 넣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보면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담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아직은 몇 년 전에 즐겨 듣던 노래가 지금 나를 더 고양시키고, 기쁘게 한다. 그 노래는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공짜다.
한밤중에 정재일의 Wonderful Days Theme III 를 틀고 가만히 들으면 대학생 때의 생각이 난다. 이 노래가 너무 좋아 싸이월드 bgm으로 해놨었다. 그때는 스마트폰이 없을 때라 싸이월드 bgm을 켠 채로 검은 천장을 바라보며 잠에 들었다. 언제 잠을 시작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눈을 뜨면 여전히 같은 노래, 피아노 소리가 컴퓨터에서 흘러나왔다. 집에서는 왜 컴퓨터를 켜고 자냐며 구박을 했지만 난 싸이월드 bgm을 듣기 위해 켜고 잤다. 지금 이 노래를 가끔 다시 들으면 난 대학생으로 돌아간 것만 같고, 지금은 스마트폰이 없는 세상인 것만 같고, 여전히 그때처럼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정말 좋은 말이다. 그리고 가장 개인적인 것이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해 줄 것들이라 생각한다. 마음에 들어 돈을 주고 산 지갑은 배송이 오기 전까지 마치 여우와 어린 왕자처럼 설렘을 주더니 며칠 지나니 데면데면한 권태기 부부가 되었다. 어릴 때 즐겨 듣던 노래는 가끔 다시 들어도 내 어린 시절부터 마당에 심어진 나무 그늘처럼 편안함을 주고, 과거를 떠올릴 시간을 준다. 개인적인 것에서 작지만 단단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 분명하다. 나는 나의 이 축복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과 나눌 생각이다. 그럼 그들도 자신의 너무나 개인적이고, 작은 것들을 나에게 보여주고 나눠줄 것이다. 새로운 것을 사 모으기보다 사소하지만 개인적인 것들을 소중히 갈무리 해두자.
너무 깊숙히 묻지 말고 자다가 뒤척거리면 슬며시 주머니에서 튀어나올 정도로만 묻어두자.
더할 나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