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의 홍은성

벌레 먹은 집은 내 마음에도 구멍을 냈다.

by own scene

냉장고도, 에어컨도 없이 사는 중에도 벌레는 틈틈이 등장했다. 특히 자주 나오는 곳은 정화조 옆에 위치한 (옛)침실이었다. 걸레받이나 천장 몰딩 틈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집주인의 아버지는 틈날 때마다 건물 어딘가를 손보고 있었다. 내가 외출하고 돌아온 어느 날, 그는 건물 외벽의 갈라진 틈을 실리콘으로 메우고 있었다.

“할아버지, 뭐 하세요?”
옆에 서서 지켜봤다. 금이 간 외벽에 실리콘을 바르고, 스패튤러로 슥슥 펴고 계셨다.

“할아버지, 집에 벌레가 계속 나와요. 벌어진 걸레받이 틈에도 실리콘 좀 쏴주시면 안 돼요?”
그는 지금 당장 해주겠다며 나섰고, 나는 앞장섰다.

방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자, 할아버지는 그 방이 손녀딸들 방이었다며, 신경 많이 쓴 공간이라며 못내 섭섭해하셨다. 문제가 생긴 걸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말했다.
“할아버지, 그거… 10년 전이잖아요.”

그제야 실리콘을 쏘셨다. 사실 모든 걸 뚝딱 해결해주시는 분이라, 내가 까맣게 잊고 있었다. 92세 할아버지가 실리콘을 정갈하게 쏘실 리는 없었다. 투명 실리콘으로 마감된 방에 회색 실리콘이 군데군데 덧대졌다. 도저히 못 봐주겠어서, 실리콘 건을 빼앗아 직접 쏴보니, 내 솜씨가 더 나았다. 더 해주시겠다는 말에, 이쯤에서 정중히 감사를 전하고 마무리했다. 그날로 고급형 하얀 실리콘을 주문했다. 할아버지가 해준 실리콘 마감이 영 눈에 거슬려, 결국 내가 다 뜯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1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다. 무려 4시간이 걸렸다. 욕을 하다 웃고, 다독이다가 또 욕하며 마무리했다.

문 쪽 실리콘도 지저분해서 뜯었더니, 맙소사. 문짝에 주먹만 한 구멍이 있다. 그 안에서는 젖은 휴지가 끝없이 나왔다. 사진을 찍어 집주인에게 문자로 보냈다. 곧바로 전화가 왔다.

“이게 대체 어디서 난 건가요? 우리 집에 이런 게 있다니, 내가 이런 집을 샀다는 거예요?”

자신이 피해자라는 듯 억울함을 토로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그건 10년 전이니까, 당신 문제는 아니겠지요.’)

집에 수리기사를 보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저녁 늦게 도착한 기사님은 말했다.

“건물이 오래돼서 문틀이 다 썩었고, 벌레가 파먹었네요. 이 방만이 아니라 다른 방문도 아마 다 이렇습니다. 두 개 문틀 교체해야 해요. 요즘 문틀 사이즈랑 달라서 맞출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설치하면 바닥이 2cm쯤 올라올 겁니다.”


이미 울퉁불퉁한 바닥 위에, 2cm라니. 시멘트로 매끈하게 정리 안 되냐고 물었다.
가능하단다. 하지만 비싸단다.

“얼마예요?”
“240만 원.”

이게 비싼가 싶었지만, 집주인에겐 비쌌나보다.
다음 날, 집을 나가라는 통보가 왔다.

“한 달 반 드릴 테니, 집 알아보세요.”
“다짜고짜 나가라고요?”
“이사 비용 50만 원 드릴게요.”

어이가 없었다. 이 집에 오느라 공기청정기, 제습기, 세탁기 다 샀다. 2개월 만에 나가라니, 다 버리란 말인가.

결국 이사 비용, 가전 감가비, 중개비 등 합의해서 마무리 지었다. 그날부터 집 주변 부동산을 돌기 시작했다.

연희, 응암, 일산까지 발품을 팔았다. 자연이 눈앞에 있었으면 했지만, 창밖마다 회색 건물뿐이었다. 그래서 경기 광주를 지나 이천, 원주까지 훑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홍은성을 떠나야 한다는 것.

문틀에 난 커다란 구멍처럼, 내 안에서도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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