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은 내게 현재가 멋지다고 유혹했다.

불확실한 미래의 불안함은 관성에 더욱 힘을 보탠다.

by 보통의 하루

회사를 언젠가 떠나겠다.라는 마음먹은 후, 아이러니하게 나는 회사에서 더욱 인정을 받았다. 정말 그 어떤 누구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던 프로젝트 1차 고비도 보란 듯이 성공했고, 업계의 관계자들은 모두들 대단하다고 했다. 팀워크가 만들어낸 환상의 결과였다.


회사에서는 그런 내게 회사 전체 프로젝트 책임자를 맡겼고, 나는 계획보다 더 길게 회사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회사에서는 아이들이 해외에 있다는 것을 알고,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리전으로 갈 수 있는 기회도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내가 그렇게 가고 싶을 때는 한 번도 먼저 제안을 받은 적도 없고, 매니저와 1:1을 할 때면 아직 영어 실력이 부족하다는 feedback을 받으며 상심하는 일만 있었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예전 회사 선배가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평소 종종 연락하던 사이도 아니라서 전화번호도 몰랐는데, 아는 지인을 통해 내 번호를 알아서는 본인도 이직을 했고 마침 나와 회사가 가까워졌으니 커피 한잔하자는 연락이었다. 그렇게 만난 선배에게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아이들도 해외에 있고, 육아 휴직도 혼자서 고민하던 찰나여서 이직은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자, 쿠알라룸푸르에서 6개월, 서울에서 6개월 근무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링크드인을 통해서 경쟁사 HR이 연락이 왔다. 지금 직급보다 승진하는 자리를 제안했다. 이직 의사가 없다고 하자 사장님과의 인터뷰 한 번만 하고 결정하라고 설득했다.


이른바 승승장구하는 시기가 왔다. 치열하게 살아왔던 지난날을 보상해주기라도 하듯이, 갑자기 많은 기회와 혜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래, 어쩌면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노력의 결실을 포기하려고 하니 이게 내가 가야 하는 길이 맞다고 알려주는 것일 수도 있잖아?

40여 년을 이렇게 살아온 내 습관, 관성은 나를 달콤하게 유혹했다.

새로운 길에 대한 막연함과 불확실함은 두려움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관성에 힘을 실어줬다.


애초의 내 계획은 24년 11월 경 첫 번째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딸아이 생일에 맞춰 쿠알라룸푸르에 가서 남편에게 육아휴직을 내고 싶다고 설득할 생각이었다. 내 일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남편이기에 내가 얼마나 바쁜지, 하루 스케줄이 살인적인지 아는 만큼, 일을 하면서 부업을 시작해 보는 것은 쉽지 않다는 걸 알 거고, 일 년 동안 아이들 옆에서 집중해서 무언가 행복 찾기와 그로 인한 수입 창출을 해본다면, 앞으로의 삶에 후회가 없을 것 같다고 설득할 요량이었다. 만일 실패하더라도 다시 돌아가면 되니 현실적인 남편에게도 먹힐만한 제안일 수 있고, 남편이 예상치 않았던 희망퇴직 프로그램을 통해 퇴직금도 조금 더 받았으니 1년 정도는 수입 없이 살더라도 해볼 만한 도전이 아니겠냐고,

완벽한 시나리오를 짜뒀었는데,


나는 결국, 최소한 25년 상반기까지는 지금 그대로 한번 살아보자. 그럼 누가 알아? 더 좋은 승진이나 이직 기회가 나에게 올지 라며 관성이 승복하는 결론을 내렸다.


이미, 내 행복 따위, 행복 프로젝트 따위는 잊혀갔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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