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내가 세상에 전부였다.

내가 나만 생각할 때, 아이는 나를 갈망하고 있었다.

by 보통의 하루

나는 간만에 신나게 일에 몰두했다. 회사에서도 인정받고 있고, 아이들과 떨어져 기러기를 하다 보니 오롯이 일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풀 악셀 밟고 아우토반을 달리기만 하면 되었다. 회사 프로젝트를 함께 꾸려갈 팀원들도 한 명씩 채워나가며 하루하루 즐겁게 일에 매진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1시간 시차가 나는, 말레이시아에 있는 아이들과는 아침 등굣길과 저녁에 잠들기 전 항상 영상 통화를 했는데, 둘째 딸아이 생일인 11월에 어렵게 일정 빼서 일주일을 다녀온 후부터 둘째 아이가 영상 통화 할 때마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통화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거나, 등교 시간에는 항상 울고 교실로 들어간다거나, 남편은 엄마가 다녀가고 나면 언제나처럼 하루 이틀 엄마 앓이 하는 거니 이 또한 익숙해질 거라고 나를 위로해 줬다. 그러나 이번 '엄마앓이'는 예상보다 길고 험했다.


사람들은 너무 자주 아이들을 보러 가서 그렇다고 농담 아닌 농담을 했지만, 예민한 기질의 둘째 아이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이면 끝날 꺼라던 아이의 반항적 성향은 일주일을 꼬박 채우더니 2주 차에 들어서자 도가 지나치기 시작했다.


하루를 꽉 채워 미팅을 끝내고, 퇴근하기 전에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있을 때 남편으로부터 영상 통화가 왔다. 평소 통화하던 시간이 아직 안되었는데? 얼른 빈 회의실로 달려가 한껏 톤을 높여 "아가들~~~" 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첫째 아이가 눈물 콧물 범벅인 채로 말했다.


"엄마 여기 지옥 같아. 엉엉 엉엉. 맨날 소리 지르고 이유도 모르고 짜증만 부리는 둘째가 너무 미운데 아기니까 또 불쌍하고, 아빠는 화내고 혼내니까 무서운데 또 아빠가 너무 고생하니까 불쌍하고, 나 어떻게 해? 엄마가 좀 도와죠. 엉엉엉"


뒤로는 끊임없이 소리 지르면서, 아니 악을 쓰면서 울어대는 딸이 보이고, 이미 모든 걸 포기한 듯한 남편의 체념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둘째의 악다구니가 더 커지자 남편은 핸드폰을 꺼버렸다. 나는 안다. 남편은 지금 최대 한계치에 다다랐다는 걸. 그렇지만 그것보다는 내가 이 장면을 보고 신경 쓰고 마음 아파할까 봐 그게 먼저인 사람이라 통화를 종료해 버렸다는 걸. 이럴 때는 내가 다시 걸어봤자 남편 마음을 불편하게 할 뿐이라는 것을.


이번 겨울 회사 클로징에는 매니저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1주일 일찍 말레이시아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른 정리하고 퇴근길을 서둘렀고, 예상대로 아이들이 잠들고 난 뒤에 남편은 전화가 왔다.


"신경 쓰지 마. 이러다 말겠지. 이러면서 크는 거야. 오늘은 정말 힘들긴 힘들었다. 요새 부쩍 너무 심하네. 그래도 이 시기도 지나가겠지. 그냥 말도 안 되는 걸로 고집 피우기 시작하면 이제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아 버리고 첫째한테도 헤드폰 씌워주면서 아이패드 틀어줘 버려. 곧 악쓰기 시작한다는 신호니까."


20년 가까이 남편을 봐왔던 나는 안다. 저 무심하게 툭 던지는 말투 뒤에 고단함이 잔뜩 묻어 있다는 걸.


"내일은 저녁 통화가 어렵다고 그랬지? 일단 하루하루 잘 넘기고 있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 금요일 오전에 통화하자. 아! 금요일도 아침 일찍부터 회의라고 했나? 아무튼, 나도 오늘은 너무 피곤하네. 와이프도 얼른 자. 하루 종일 일하느라 애썼어."


다음날 나는 예상보다 일찍 저녁 회의가 끝났고, 아이들이 잠들기 직전 시간이라, 영상 통화보다는 조용히 CCTV를 켰다. 그걸 본 순간 나는 팀원들과 wrap up meeting은 내일 하자고 미안하다 인사하고 바로 빈 회의실로 달려가 영상 통화를 걸었다.

둘째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었고, 그 뒤로 벽 뒤에 붙어 아들도 엉엉 울고 있었고, 남편은 부엌 쪽 벽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듯하게 앉아있었다.


전화를 걸자 둘째가 핸드폰을 꼭 잡는다.


"엄마야? 엄마. 엉엉 엉엉. 보고 싶어. 와서 나 좀 안아줘. 나 지금 이렇게 울고 있잖아. 나 좀 안아달라고. 엄마랑 같이 안고 자고 싶어. 엉엉 엉엉. 나 이제 자러 갈게. 소리 안 지를게. 전화 끊지 마. 자장가 불러줘. 나 잠들어도 전화 끊으면 안 돼. 엉엉 엉엉"


그래 엄마 아가야. 엄마는 항상 여기 있어. 엄마 절대 안 끊을게. 푹 자자. 우느라 예쁜 목소리 다 쉬었네. 피곤할 텐데 얼른 자. 엄마가 자장가 불러줄게. 사랑하는 엄마 아가야.


터져 나오는 울음을 꾹 참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러주고, 계속 목소리를 들려줬다. 30분 즈음 지났을까. 고른 숨소리가 나더니 전화가 끊겼고, 아이들 잠들었다고 곧 전화하겠다고 남편의 문자가 왔다. 성인이 되고 이렇게 목 놓아 울어본 적이 있던가. 전화가 끊어지고 나는 엉엉 울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어린아이들을 타지에 두고 혼자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걸까.


조금 뒤 남편이 전화가 왔다.

그날 점심시간, 학교에서 전화가 와서, 아이를 데려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단다. 남편이 지체없이 바로 학교를 갔더니 울다 지쳐 아이가 양호선생님 품에 잠들어 있었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학교에서 항상 점심시간 전에 책 한 권을 읽고 점심을 먹는데 대략 엄마 토끼랑 아기 토끼가 헤어졌다 만난다는 이야기였나 보다. 엄마 토끼가 여기서 기다려. 했는데 아기 토끼가 자리를 옮겼다가 한참을 헤매다 다시 만나는 미아 방지 목적의 이야기였는데, 엄마랑 헤어지는 순간 갑자기 둘째가 펑펑 울면서 엄마를 찾았다고 한다. 아마도 아이가 아직 엄마와의 헤어짐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 복잡한 감정을 스스로가 잘 모르다가 엄마랑 헤어지는 장면에서, 이 감정이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는 대충 그런 말이었고, 그때부터 울기 시작한 둘째는 너무 울어 간식을 다 토하고, 좀 진정이 되나 싶어서 점심을 먹이려고 했는데 또 울기 시작해서, 결국은 아빠를 부른 거였다고,

전달해 주는 남편이나 이야기 듣는 나나 서로의 목소리 너머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 꾹꾹 누르고, 차분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남편에게는 아직 육아휴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를 하는 게 맞는 걸까. 프로젝트 리더인데 지금 시점에서 그만두는 건 회사에 크나큰 피해를 주는 게 아닐까. 내 평판은 어쩌고.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이대로는 어렵다는 건 자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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