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전해준 선물

워킹은 바꿀 수 있는데 맘은 바꿀 수 없잖아.

by 보통의 하루

힘겨운 밤을 보내고, 밤새 마음을 정리했다. 사실 고민할 거리가 전혀 아니었다.

이토록 치열하게 일하는 이유도, 아이들을 해외로 보낸 이유도 모두 결국 가족과 아이의 행복 때문이었기에, 답은 정해져 있었다. 오늘의 이 상황은 회귀본능으로 망설이는 내게 그러면 안 된다고, 아이가 알려준 것일지도 모른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나를 붙잡고 "엄마도 우리랑 같이 행복한 걸 찾아보자!" 하고 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불철주야 몸을 갈아 넣으며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도저히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던 아이가 마지막 발악을 한 거라고.


마음은 결정했지만, 현실적인 문제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살던 집, 하던 일 급하게 정리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남편에게는 육아휴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주말인 내일 당장 말레이시아로 들어간다면 연말 클로징 전에 다시 한국에 돌아오는 건 어렵겠다. 그렇다면 이번에 가면 우선은 클로징까지는 무조건 virual working을 요청해야 한다. 그리고 회사에서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가능한 virtual로 업무 인수인계를 하고, 육아휴직을 내야 하며, 현재 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successor도 근거 기반으로 2-3명 정도 미리 정리해 보고 내 나름의 대안책을 제시해야 한다.


새벽에 회사를 출근해서 차분한 마음으로 하나씩 하나씩 정리를 해나갔고, 매니저가 출근하기 10분 전쯤 메신저로 미리, "출근하시고 시간 괜찮으시다면 오전 중에 10분 정도 면담 할애 가능하시겠습니까? 가능하신 시간 알려주시면 제가 맞추고 미팅 콜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남겼고, 출근한 그는 텍스트에서 내 마음 상태를 느끼셨는지 당장 미팅이 가능하다고 답신이 왔다.


회사 맨 구석 조그마한 회의실을 예약하고, 정리한 내용을 노트북에 띄워 가지고 회의실에 들어섰는데, 다급함을 느낀 그는 먼저 회의실에 와 계셨고, 그의 걱정스러운 눈빛과 마주치자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회사에서는 감정을 잘 안 드러내는 평소와 달리, 화장이 번지도록 콧물 눈물을 쏟아내며, 덕분에 알아듣기도 힘든 지경에서 아이의 상태를 이야기하며 육아 휴직을 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가족보다 소중한 게 어딨 어요? 오늘은 사장님과 중요한 미팅이 있으니 그것만 끝내면 바로 정리해서 아이들한테 가요. 내가 HR 한테도 이야기해 놓을 테니 우선은 연말까지 vitrual로 근무하고, 아이 상태 봐서 연초에 다시 논의하는 걸로 하죠. 엄마 마음도 이렇게 힘든데, 어린아이 마음은 오죽하겠어.


매니저의 깊은 배려에 나는 더더욱 아이처럼 눈물이 났다. 매니저가 먼저 회의실을 나가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서 마음을 진정시킨 후, 자리로 돌아왔다.


차마 부서원들을 볼 용기가 안 난다. 마주하고 이야기를 하면 또 눈물이 펑펑 쏟아질 것 같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해야 한다. 매니저가 HR과 이야기를 하고 나면 소문이 날 텐데, 다른 경로로 듣게 해서는 안된다. 최대한 마음을 진정하고, 회의실로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이야기를 했다. 최대한 눈물을 참았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떻게 컨트롤이 안된다. 같은 엄마인 직원이나 공감 능력이 뛰어나 평소에도 감정 이입이 남달랐던 몇몇은 눈과 코가 빨개지면서 같이 울어준다.


당장 그만두는 건 아니다. 일단은 100cm 조금 넘는 꼬맹이 둘째부터 더 이상 생채기 나지 않게 보호막이 되어주러 가는 거고, 가서도 나는 내 몫을 여기서 보다 더 충실히 열심히 해낼 거다. 그게 도리고 의무니까.


잠시 난 틈에 남편에게 상황을 카톡으로 설명하고, 저녁에 통화하기로 했다.


평소보다도 더 정신없는 하루를 마무리하고 영상 통화를 켰는데, 근래 한 번도 보여주지 않던 둘째의 환한 웃음이 젤 먼저 나를 반긴다.


"엄마 정말 와? 비행기 언제 타는 거야? 내가 아까 집에 와서 그린 그림이다!!! 이것 봐봐. 나는 아기 코끼리야. 정말 귀엽지? 멋진 춤도 출 수 있는 아기 코끼리인데 한번 보여줄까?"

재잘재잘. 조잘조잘.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하늘을 찔렀다가 땅을 찔렀다가 궁둥이를 흔들었다가 안 되는 코끼리 코를 만들어 보다가 안되니 다급하게 아빠한테 도움을 요청하며 내가 시선이라도 뗄까 봐 1초도 쉬지 않고 떠들어댄다.


그래, 아가야 엄마가 내일 오후에 비행기 타고 출발하면 밤에 자다 보면 엄마가 옆에 있을 거야. 그동안 울지 않기! 떼쓰지 않기! 아빠랑 오빠 말 잘 듣고 있어야 해.


일 년을 더 떨어져 지내야 할 것 같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아이가 그러지 말라고 경고를 날려줬다. 일이 재밌어졌다고, 착각하면서 가족을 위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가스라이팅하면서,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며 기러기맘인 내 하루는 새벽 5시부터 새벽 1-2시까지 매일매일, 주말도 예외 없었다. 그렇게 4개월을 풀 악셀로 달리다가 급브레이크를 밟고 말레이시아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앞을 보니 나는 벼랑 끝까지 와서 서 있었다.


일단 최소 한 달은 돌아오지 못할 집을 제일 먼저 정리해 놓고, 점심시간 활용해서 조금씩 사뒀던 아이들 선물과 여름 옷거리 대충 챙겨 다음날 비행기에 올랐다. 실컷 울고, 마음속으로만 간직하던 육아 휴직을 공식적으로 뱉어내고 나니 뭔가 가슴이 뻥 뚫린 느낌이다. 두려움과 막연한 불안함도 당연히 있겠지만 그보다는 뭔지 모를 살아있음에 행복했다.


인천에서 쿠알라룸푸르까지 6시간 40분.

승무원께 물 두병만 미리 받고는 방해 금지 요청을 하고, 책을 실컷 읽었다. 당장 다음 주 월요일부터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회사일을 해야 하겠지만, 가족 옆에 있다는 것. 끝을 공식화했다는 것.

그 자체로 나는 내게 "또 다른 시작과 희망"을 선물했고, 그게 참 설렜다.


그렇게 나의 쿠알라룸푸르에서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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