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청휘청 외줄타기 엄마라서
'시댁'과 '할머니집'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그 둘은 분명히 같은 장소이다. 하지만 내가 보는 관점과 우리 아이들이 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장소가 되기도 한다. 누구나 그 두 단어를 떠올리면 그것이 주는 어감과 상징적인 이미지의 차이를 느낄 것이다.
며느리인 나에게는 남편의 예전 집이자, 남편의 부모님이 살고 계시고, 남편의 친척들이 모이기도 하는 그곳이 솔직히 편하지만은 않다. 내가 자란 집과는 크고 작은 문화적인 차이가 있고, 그 차이에 웬만하면 내가 맞춰서 지내주었으면 하는 무언의 분위기가 있다. 그리고 나에게 자동적으로 생기는 역할 같은 것이 있고, 그것을 크게 벗어나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부담스러운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어디를 가더라도 그 정도의 차이와 의무는 있기 마련이지만, 시댁이 다른 곳 보다 좀 더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 그곳에서 나는 가족이면서도 그들의 핏줄은 아닌 뭔가 어정쩡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나의 아이들에게 그곳은 나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른 장소이다. 바로 듣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할. 머. 니. 집.이다.
그곳에서 우리 아이들은 어머님과 아버님의 둘도 없는 핏줄이자 그분들 인생의 꽃봉오리이다. 우리 집에서는 엄마 말 잘 들어야 하는 보통 아이들이지만(누나 꼬물이 서열 3위, 동생 말랑이 서열 4위) 할머니집에만 가면 꼬물이와 말랑이는 공주님과 왕자님으로 바로 신분이 급상승한다.(공동 서열 1위)
나는 다른 건 모범 며느리 기준에 못 미칠지 몰라도 시댁 방문 횟수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시어머니와 껄끄러울 때도, 남편이 보기 싫은 때에도 꿋꿋하게 꾸준히 시댁에 아이들 할머니집에 갔다.
누구를 위해서? 물론 나를 위해서.
아이들이 커서 중학교, 고등학교 들어가서 고액 과외 시켜주는 것보다 조무래기 시절에 조부모님 사랑을 듬뿍 받고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굳이 비교하자면 더 크고 확실한 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커서 자신만만한 마음으로 스스로 잘 먹고 잘 살 수 있어야 내 노후도 편안할 것이기에 주기적인 할머니집 방문은 나 포함 모두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평소에 요리와 별로 안 친하면서도 몸에 좋은 건강한 음식만 추구하는 엄마가 주는 음식만 먹어야 하는 우리 아이들. 내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요리가 5가지 정도 있는데 카레, 미역국, 삼계탕(전기밥솥 필수), 김치돼지찌개(김치는 시어머니표), 라면(쫄깃쫄깃 맛있게 끓임)이다. 아, 계란 프라이까지 6가지네. 그 외에는 주로 샐러드나 과일, 두부, 우유, 견과류 같은 것만 주는 편이다.
그래도 다행히 할머니집에 하면 짜자잔~ 할머니가 끝내주는 음식 솜씨로 온갖 산해진미를 다 구해다가 맛있는 것을 많이 만들어 주신다. 말만 하면 과자도 아이스크림도 할머니가 빛의 속도로 뛰어가서 구해 오신다.
할머니 집만 가면 아이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되어서 엄마인 내가 보기에 너무 심하게 까부는데? 저건 너무 버릇없는데? 싶은 행동을 할 때도 있다. 그때 자동적으로 눈에 힘을 딱 주고 눈꼬리를 올리는 나와는 전혀 다르게 할머니는 여전히 자애로운 미소를 한가득 띠고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손주들을 보고 계신다. 말로는 아이들이 귀할수록 엄하게 키워야 된다고 하시면서도 막상 내가 따끔하게 제지하려고 하면 '이번에만 봐주고, 다음부터' 혼내라고 말려 주신다.
아휴~ 당연히 할머니집에서는 아이들 훈육이 잘 안 되지만 한 번씩은 그럴 때도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 거기 가면 나도 못 이기는 척 넘어가곤 한다.
아이들도 집에서는 이것저것 나름의 의무가 있다. 하루종일 지켜야 할 규칙과 제한도 꽤 있다. 숙제도 해야 하고, 시간 맞춰 학교나 학원에 가야 하고, 자기 물건은 스스로 치워야 하고, 아파트이니 집에서는 되도록 뛰지 말고 걸어 다녀야 하고 등등.
그러다가 주말에 주택인 할머니집에 가면 아래층도 없고, 옥상이 있다는 특징 만으로도 많은 자유가 생긴다. 하물며 집의 주인장이자 관리인도 눈꼬리 올라간 엄마가 아닌 세상 만만한 할머니와 할아버지이다. 무엇을 해라는 잔소리도, 무엇은 하지 말아라는 잔소리도 없이 마음대로 온 집을 어지르면서 하루종일 그냥 논다.
아무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왜? 거기서 만큼은 최고 서열의 왕족이니까!
첫째 꼬물이가 내년에 중학교에 들어간다.
이번 다가오는 설에 시댁에 가서는 평소처럼 열심히 설거지라도 하고 난 다음 두둑한 감사를 담은 용돈 봉투를 준비해서 드려야겠다.
그동안 아이들 주말마다 봐주신다고 애쓰셨다고,
내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내고 기를 써도 도저히 못 주는 넉넉하고 푸짐한 사랑을 아낌없이 주신 덕분에 이렇게 잘 자라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