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조커> 감상문
2019년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군 영화 두 편이 있다. ‘기생충’과 ‘조커’. 아직도 이 두 영화를 보고 나서 들었던 온갖 감정과 전율을 잊지 못한다.
나는 두 영화가 굉장히 닮았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공통점은 사회 계층에 존재하는 수직적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기택 가족과 아서 플렉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그들의 위치를 보여준다. 기택 가족은 높은 언덕에 있는 박사장 집에 하나 둘 기생하게 되고, 아서는 계단을 오르며 언젠가는 찾아올 행복한 미래를 상상한다. 두 주인공들은 어떠한 일을 겪게 되는데, 그로 인해 기택 가족은 폭우 속에서 수많은 계단을 내려오게 되고, 아서는 미치광이가 되어 춤을 추며 계단을 내려오게 된다. '주인공들이 힘겹게 계단 위로 올라와서는 어느새 선을 넘고 다시 계단 아래로 추락한다'는 구조가 두 영화에서 모두 나온다는 것은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다.
미묘하게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도 두 영화의 공통점이다. 영화 내내 시청자는 무엇인가 불안한 감정을 계속 마음에 담아두게 된다. 기택 가족이 박사장 집에서 몰래 술 파티를 벌이는 때의 긴장감과, 아서가 게리를 살해하고 랜들과 단 둘이 남았을 때의 긴장감은 공포라는 감정에서 온다는 점이 비슷하다. 칼에 찔린 기정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당장 자신에게 풍기는 냄새에 코를 막는 동익과, 아서의 코미디 영상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조롱거리로 만든 머레이는, 주인공들의 살인이 어디까지 정당화되어야 하는지를 곱씹게 된다는 점에서 또 다른 불편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주인공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들이 절대적인 악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동익이 ‘지하철 타면 나는 냄새가 난다’ ‘냄새가 선을 넘는다’ 등으로 기택을 표현했지만, 본인 가택에서 한 말이며, 기택이 몰래 동익의 집에서 술판을 벌이다 숨어서 들은 것이기 때문에 누가 더 나쁜 것인지는 모호하다. 머레이도 마찬가지다. 아서의 지병을 알고 있었다면 스탠딩 코미디에 나간 아서를 희화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머레이한테 잘못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적어도 무지한 것이 죽을 이유가 된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말이다. 누구나가 모르는 것이 있고, 때때로 안일하며, 위선적이기도 하다.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뿐만 아니라 내용을 풀어나가는 방식도 비슷하다. 두 영화는 잔혹함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잔혹함이 현실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쨌든 창작물이라는 것을 인지시키기 위해 몇 가지 장치를 심어 놓았다. 방으로 올라갔던 다송이가 어느새 냉장고 문을 열고 케이크를 먹고 있다든가, 물에 잠긴 수석이 떠오른다든가, 현실에는 있을 수 없는 방식으로 장면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조커는 영화 장르 자체가 판타지이다. 경찰이 살인범 하나를 못 잡고, 아서가 지하철이든 병원이든 마음 편히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다는 것만 봐도 판타지임을 알 수 있다. 판타지는 현실 세계만큼 높은 밀도의 개연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서 아서의 상상이 현실과 섞여 직접적인 왜곡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사실 두 영화를 비교하면서 가장 재밌는 것은 공통점이 아니다. 공통점만큼이나 거대한 차이점이다. 나는 비슷하다고 느낀 두 영화에 대해 대중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기생충은 그 해 영화와 관련된 상을 휩쓴 데 반해, 조커는 범죄를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리곤 했다. 두 주인공 모두 어쨌거나 살인을 저질렀는데, 문제점은 한쪽에만 제시됐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듯하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의 각성 시점’이다. 기생충은 비가 오는 날 문광이 찾아오기 전까지, 그러니까 영화 중반부까지는 주인공들에게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는다. 중반부에 몸싸움을 하다가 결과적으로 충숙이 문광을 죽이게 되지만, 여기까지는 주인공이 의도하지 않은 사고였다. 그렇게 영화 후반부까지 위태위태하게 흘러간다. ‘냄새’와 ‘선’으로 인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불편함을 차츰 쌓아간다. 그런 상태로 마지막 부분에서 선을 강조하던 동익 본인이 선을 넘을 때, 불편함은 불쾌함이 된다. 불쾌함을 느낀 기택이 본인의 의지로 동익을 칼로 찌르면서, 살인자로 각성을 하고 그렇게 영화가 마무리된다.
기생충은 주인공이 영화 최후반부에 살인자가 된다. 두 시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꾸준히 불편함을 쌓고서 막바지에 감정을 터뜨린다.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은 정당화할 수 없다. 누구나 아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를 보며 쌓은 불편한 감정에 대해 외면하지 못한다는 것을 곧 느끼게 된다. ‘기택이 살인을 한 것은 정당한가?’ 그렇지 않다. ‘동익이 살인을 당할 만큼 나쁜 인물이었나?’ 전혀 아니다. 그런 질문들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해할 수는 있다. 기택이 동익을 찌르는 그 순간까지의 감정을 영화 내내 전달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조커는 주인공의 각성 시점이 영화 초반부에 등장한다. 영화 시작부터 동네 아이들에게 과한 장난과 폭행을 당하고, 상담가와 직장 상사한테 무시당하다가, 권총을 소지한 것을 들켜 직장에서 해고되기까지 한다. 그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하철 폭행 사건에 휘말리면서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그 주인공들의 각성 시점을 비교하면 큰 차이를 볼 수 있다. 불편한 감정을 후반부까지 천천히 쌓아간 기생충과 달리, 조커는 비극적인 아서의 상황이 초반부에 빠르게 몰아친다. 일반적으로는 조커가 영화이자 판타지임을 알고 주인공인 아서에게 감정을 이입해 아서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것이 곧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초반부에서 짧게 지나간 아서의 상황을 보며 느끼는 비극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더군다나 두 시간 동안 기택이 살인을 저지르기까지의 감정을 쌓은 기생충도 의견이 갈리기에, 그 과정을 함축시킨 조커는 그 잣대가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 아서의 살인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기택의 경우보다 빈약하다. 그래서 기생충에 좋은 평가를 내리면서도 조커에는 거부감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글이 어떻게 전달됐을지 모르겠는데, ‘그래서 조커보다 기생충이 낫다!’라고 의견을 주장하는 글은 전혀 아니다. 두 영화 모두 재밌게 본 사람으로서, 명확하게 보이는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정리해보고 싶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창작물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