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épuisé
"소진된 인간은 피로한 인간을 훨씬 넘어선다. 단순한 피로가 아니다. 나는 단순히 지친게 아니다. 높이 올라오긴 했지만. 피로한 인간에게는 더 이상 어떤 (주관적인)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는 최소한의 (객관적인) 가능성도 실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가능한 것 모두를 실현시키지는 않기 때문에 최소한의 가능성은 남는다. 가능한 것을 실현하면서 또 다른 가능한 것이 생겨나게할 수도 있다. 피로한 인간은 단지 실현을 소진했을 뿐이다. 반면 소진된 인간은 모든 가능한 것을 소진하는 자이다. 피로한 인간은 더 이상 실현할 수 없다. 그러나 소진된 인간은 더 이상 가능하게 할 수 없다. ..." 소진된 인간 p.23
"일반적으로 우리는 가능한 것, 곧 가능성으로 존재한다고 여겼던 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된 것을 실재라고 생각한다. 즉 먼저 어떤 가능성이 전재되고, 그다음 그것이 실현되어 실재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오류이다. 존재하 않음을 의미하는 무에 대해 '무의 존재'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오류이다. 가능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실현이 예정된, 실현해야 할 미지의 어떤 새로운 것이 아니다. 가능한 것은 사실상 실재하고 있는 것에서 출발해 그로부터 재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 이 가능하다' 고 말할 때 우리는 이미 주어진 것들, 실재하는 것들로부터 어떤 가능성을 유추 혹은 파생해냈을 뿐이다. 결국 가능한 것은 실재를 재구성한, 실재와 유사한 것, 곧 재현의 사유에 속한 것이다. ..." -소진된 인간 p.108
"스피노자에 따르면, '가능한 것'은 자신을 존재하게끔 하는 원인들에 대한 인식의 결여에서 생겨난 것이다. 즉 어떤, 것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만 이 원인이 실제로 현실에 존재하는지 알 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을 '가능한 것'이라 말한다. ...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가능으로서의 능력은 허구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 사고와 활동은 사실상 이 부적합한 관념인 가능한 것에 대한 믿음, 가능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언어이다. 언어는 우리의 일반적 통념과는 달리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언어는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할 수 있는 것, 존재 '가능한 것'을 말한다. ... 예를 들어, '나는 걸을 수 있다' 고 말하는 것은 항상 가능하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가능으로서의 능력은 허구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걸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실제로 걸었다면, 그는 단지 '걷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지 '걸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 아니다. 그는 걷지 않거나 걷는 것을 보여줄 수 있지만, '걸을 수 있음'을 보여줄 수는 없다." -소진된 인간 p.109
"가능한 것과 혼동하지 말아야 할 개념이 '잠재적인 것' 이다. '잠재적인 것'의 의미는 아직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 현실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화하지 않았을 뿐 실재하는 것이다(실재하므로 실현, 실재화될 필요가 없다). 잠재적인 것은 실재하므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화해야 한다.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은 사실상 세계(실재)의 두 가지 존재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세계(실재)는 잠재적이거나 현실적이다.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는 '가능한 것의 실현' 처럼 선택이나 제한에 의해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 행위들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현실화 계열들을 창조' 함으로써 '구체화'되어야 한다." -소진된 인간. p.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