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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bk Sep 07. 2023

소진된 인간

L´épuisé

https://youtu.be/4ZDRfnICq9M?si=RluQRTwCeyzfWZTe



 위 영상은 고도를 기다리며로 유명한 아일랜드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단막극 '쿼드'의 일부분이다. 색색의 천을 뒤집어쓴 네 명의 사람이 차례차례 등장하며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의 배열과 움직임을 수행한 후 어둠 속으로 퇴장한다. 언뜻 보기에 기괴한 움직임의 반복을 통해 베케트는 무엇을 우리에게 표현하려 했을까? 베케트의 단막극들을 인상 깊게 감상한 철학자 질 들뢰즈는 <소진된 인간>이란 에세이를 통해 베케트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표현하여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다.



"소진된 인간은 피로한 인간을 훨씬 넘어선다. 단순한 피로가 아니다. 나는 단순히 지친게 아니다. 높이 올라오긴 했지만. 피로한 인간에게는 더 이상 어떤 (주관적인)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는 최소한의 (객관적인) 가능성도 실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가능한 것 모두를 실현시키지는 않기 때문에 최소한의 가능성은 남는다. 가능한 것을 실현하면서 또 다른 가능한 것이 생겨나게할 수도 있다. 피로한 인간은 단지 실현을 소진했을 뿐이다. 반면 소진된 인간은 모든 가능한 것을 소진하는 자이다. 피로한 인간은 더 이상 실현할 수 없다. 그러나 소진된 인간은 더 이상 가능하게 할 수 없다. ..." 소진된 인간 p.23



 들뢰즈는 피로한 인간과 소진된 인간을 구별한다. 피로한 인간은 일정 시간의 휴식을 취하면 다시 무언가를 실현시킬 수 있다. 아직 그는 단지 지쳤을 뿐, 가능성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진된 인간은 가능성을 소진한 자이다. 소진된 인간은 휴식을 취하여도 무언가를 다시 실현할 수 없다. 무언가를 실현시킬 가능성 자체가 소진되었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소진된 인간은 곧 죽음을 뜻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들뢰즈는 가능성에 대한 오해 때문에 사람들이 소진된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다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오해했으며, 소진된 인간이 죽음이 아니라면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가능한 것, 곧 가능성으로 존재한다고 여겼던 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된 것을 실재라고 생각한다. 즉 먼저 어떤 가능성이 전재되고, 그다음 그것이 실현되어 실재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오류이다. 존재하 않음을 의미하는 무에 대해 '무의 존재'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오류이다. 가능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실현이 예정된, 실현해야 할 미지의 어떤 새로운 것이 아니다. 가능한 것은 사실상 실재하고 있는 것에서 출발해 그로부터 재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 이 가능하다' 고 말할 때 우리는 이미 주어진 것들, 실재하는 것들로부터 어떤 가능성을 유추 혹은 파생해냈을 뿐이다. 결국 가능한 것은 실재를 재구성한, 실재와 유사한 것, 곧 재현의 사유에 속한 것이다. ..." -소진된 인간 p.108



 '가능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가능성의 전재는 그것의 실재성이다. 우리는 실재하고 있는 것의 가능성만을 사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능성에서 현실성이 유추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성이 전제되어야만 우리는 가능성을 사유할 수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가능한 것'은 자신을 존재하게끔 하는 원인들에 대한 인식의 결여에서 생겨난 것이다. 즉 어떤, 것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만 이 원인이 실제로 현실에 존재하는지 알 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을 '가능한 것'이라 말한다. ...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가능으로서의 능력은 허구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 사고와 활동은 사실상 이 부적합한 관념인 가능한 것에 대한 믿음, 가능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언어이다. 언어는 우리의 일반적 통념과는 달리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언어는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할 수 있는 것, 존재 '가능한 것'을 말한다. ... 예를 들어, '나는 걸을 수 있다' 고 말하는 것은 항상 가능하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가능으로서의 능력은 허구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걸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실제로 걸었다면, 그는 단지 '걷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지 '걸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 아니다. 그는 걷지 않거나 걷는 것을 보여줄 수 있지만, '걸을 수 있음'을 보여줄 수는 없다." -소진된 인간 p.109



 '가능한 것'의 허구성이 이해되는가? 가능성은 우리의 곁을 계속 맴도는 버릇적인 것일 뿐, 그 무엇도 나타내주지 않는다. 들뢰즈는 우리가 가능성을 오해하는 이유를 언어의 한계 때문이라 말한다. 언어를 사용한 표현행위와 표현하고자 하였던 그 실제 행위 사이에는 인과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여 소통하기 위해, 이 두 가지 행위를 우연적으로 결합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가능성을 버릇적으로 사유하며 오해했다면, 우리는 무엇을 '가능한 것'이라 착각하였는가?



"가능한 것과 혼동하지 말아야 할 개념이 '잠재적인 것' 이다. '잠재적인 것'의 의미는 아직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 현실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화하지 않았을 뿐 실재하는 것이다(실재하므로 실현, 실재화될 필요가 없다). 잠재적인 것은 실재하므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화해야 한다.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은 사실상 세계(실재)의 두 가지 존재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세계(실재)는 잠재적이거나 현실적이다.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는 '가능한 것의 실현' 처럼 선택이나 제한에 의해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 행위들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현실화 계열들을 창조' 함으로써 '구체화'되어야 한다." -소진된 인간. p.113



 '가능한 것'은 '잠재적인 것'과 다르다. 가능성은 잠재성과 구별되어야 한다. 가능성은 우리의 사유와 소통을 위한 허구적 도구이다. 잠재성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뜻한다. 잠재성은 항상 자신을 현실화 시키며. 동시에 현실화된 것은 항상 무언가의 잠재성이다. 우리는 연속적인 잠재성의 현실화 속에서 나다움을 창조해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가능한 것'은 거짓된 한계이다. '가능한 것'은 사유의 한계이지 창조의 한계가 아니다. 즉, 사유의 창조는 연속되는 잠재성의 현실화를 통해 고유한 '가능한 것'을 창조함과 동시에 '불가능한 것' 또한 같이 창조하는 것이다.



 다시 베케트의 '쿼드'로 돌아오자. 베케트는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가? 모든 가능성을 소진시킨 배우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퇴장한 후의 배우들, 그리고 퇴장한 그 자리를 계속 응시하고 있는 우리의 시선은 죽음을 뜻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배우들은 어두컴컴한 무대의 뒤편에서 가능성의 반복이 아닌 새로운 지평을 맞이하게 된다. 화면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또한 그렇다. 단순한 가능성의 소진이 아니다. 가능성의 소진 뒤에 느껴지는 막연함. 가능하다 생각했던 것들이 끝났음에도 무언가 계속 바라봐야 하는, 지속, 혹은 창조해야만 하는 우리의 시선은 순수한 잠재성을 느낀다. 그러므로 소진된 인간은 자신의 가능성을 남김없이 소진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잠재성을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최초로 바라본다는 것은 굉장히 막역하다. 이러한 최초의 시선, 모든 가능성을 소진한, 혹은 모든 선이해를 제거한 순수한 시선이 비로소 그것의 잠재성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어떠한 현상을 바라볼 때에도, 타인을 바라볼 때에도 순수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그 대상의 잠재성을 바라본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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