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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bk Sep 07. 2023

내용없는 인간

L’uomo senza contenuto

 


 아름다움은 무엇을 뜻하는 건가? 이것은 단순히 형용사로서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아름다움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이유, 그 속성 혹은 본질에 관한 사유를 하는 것이다. '보다 더 아름다운'에 대한 물음이 아닌 '아름다움 그 자체'에 관한 물음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탐구를 위하여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미적 판단의 본질적인 속성 4가지를 제시하였다. '사심 없는 쾌감', '개념의 중재 없는 보편성', '목적 없이 궁극적인 것', '규칙 없이 정상적인 것'이다. 이러한 칸트의 미적 판단은 아름다움이란 본질적인 법칙이 있음에 기저 하여 세워진 법칙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마치 이데아처럼, 높은 차원에 있을 본질적인 법칙을 상정하며 개념을 사유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의미는 관계에 의해서 모습을 드러내며 차이를 통하여 그 고유성을 확립해간다. 칸트식의 미적 판단은 현대의 사유방식으로는 충분히 아름다움의 속성을 대변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현대사회에서 아름다움 그 자체란 무엇이며 우리에게 그것을 직관할 방법이 있는 것일까? 이러한 배경에서 현대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조르조 아감벤은 그의 저서 <내용 없는 인간>을 통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아름다움을 전해주려 한다.



 "미적 판단의 메커니즘이 과연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아무리 부족하다고 해도, 비평적 판단이 예술 작품 앞에서 우리에게 제안하는 모든 것이 바로 이 그림자에 구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예술을 예술이 아닌 것과 분리시키면서 판단이라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예술이 아닌 것을 예술의 내용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가 예술의 현실을 발견하는 것은 이 부정적인 틀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어떤 예술 작품에 예술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할 때 우리가 의도하는 것은 작품 속에 예술이 요구하는 모든 물질적인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음에도 예술 작품의 운명을 좌우하는 무언가 본질적인 요소가 빠져 있다는 뜻의 이야기다. 이는 이제 막 숨을 거둔 사람의 시체가 살아 있는 생명체의 모든 요소를 지니고 있음에도 한 존재를 생생하게 살아 숨쉬도록 하는 그 붙잡을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지지 않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 -내용 없는 인간 p.97



 우리가 아름다움을 인식하려면 아름답지 않음의 배경 속에 둘러싸여진 아름다움의 경계를 발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판단이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두 가지 판단. '아름답다' 와 '아름답지 않다'. 이것은 물질적인 요소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물질적 요소들의 배치를 통한 계열의 창조를 통해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물질적 요소들의 배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자연물 즉, 재료만 준비되어 있어선 예술이 아니다. 재료가 예술가의 방식을 통해 표현되어야지만 예술이다. 아름다움은 예술가의 포이에시스(poiesis)를 통해 표현된다.


"<향연>의 한 문장에서 플라톤은 포이에시스라는 단어가 원래 무슨 뜻이었는지 전하면서, 하나의 사물을 부재의 상황에서 존재의 상황으로 이끄는 모든 종류의 요인을 포이에시스라고 정의한다. 무언가 생-산될 때마다, 하나의 사물이 어두움과 부재에서 현존이라는 빛 속을 도입될 때마다 포이에시스, 시, 생-산이 성립된. 포이에시스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방대하고 원천적인 의미를 토대로, 모든 예술은, 언어를 사용하는 예술을 포함해서, 현존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생-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의 물체를 만들어내는 기술자의 활동 역시 포이에시스라고 할 수 있다. ..." -내용 없는 인간 p.134



 예술가는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의 가공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며, 이 표현 속에 아름다움이 있다. 이 아름다움은 예술가가 자연물과의 관계함을 통하여 창조된 것인데, 이것을 자연물과 예술가 모두와 관계하지 않는 제3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 시선 속에 아름다움이 포착되는가? 아감벤은 아름다움은 작품을 바라보는, 작품을 창조한 예술가의 시선을 통하여 그 아름다움을 포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아름다움은 예술가의 시선 속에 있다.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선 자연과 작품 사이를 관계하는 예술가의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전문적인 지식의 도움 없이 그 예술가의 시선에 다가갈 수 있는가? 예술가들은 항상 기존 가치에 의문을 던지며 고유성을 창조하는,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에 위치한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이해받기 어렵다.



"저자가 말하는 '내용 없는 인간'이란 현대의 예술가와 현대 예술을 향유하는 현대인을 가리킨다. '내용 없는' 현대를 그렇지 않았던 과거의 돌이킬수 없는 방식으로 단절시킨 근본적인 원인은 예술가가 예술 작품을 스스로의 존재가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작품을 바라보며 객관적인 평가를 하지 않던 시대에서 객관적인 평가 없이는 예술 활동 자체가 불가능해진 시대로 접어들면서 일어난 변화다. 저자는 이러한 단절과 분리를 하나의 상실로 경험하는 인물들, 예술가들, 사상가들, 시인들을 등장시킨다. ... 우리가 예술을 높이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의 발전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은 예술 자체에 의해 무산된다. 시보다 시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다는 로트레아몽의 말, 즉 예술 작품에 대한 미적 평가가 작품에 우선한다는 지적을 통해 부각되는 것은 예술을 높이 평가할 수 있게 된 단계가 정확하게 예술이 사라지는 단계와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 헤겔이 말한 것처럼 가장 높은 경지의 예술은 스스로를 파괴하고 초월하는 예술,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초월할수 있는 하나의 힘으로 등극했지만 그 힘은 결국 부정의 힘이며 그 힘의 배후는 예술의 사라짐, 현재의 허무주의를 버젓이 떠받치고 있는 예술의 허무주의다. ..." -옮긴이 해제 p.242



 예술은 예술가의 표현방식이다. 과거의 예술은 현대보다 더 노동적이었으나, 기술의 발전을 통해 현대사회에서 예술속 노동의 위치는 더욱 협소해졌다. 그 예시로 아감벤은 레디-메이드와 팝아트, 뒤샹의 작품을 말한다. 기술의 발전을 통하여 예술은 노동과 점점 분리되어가며,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그래서 현대의 예술은 과거의 예술과는 다르게, 다른 의미로 신비적이다. 이제 예술작품은 노동의 과정이 아닌, 타인의 인정을 통한 공인이 수반되어야지 예술작품이 된다. 하지만 그 인정 혹은 평가하는 타인의 시선 속에 그 예술의 아름다움은 없다. 이러한 모순을 예술가와 예술을 향유하는 현대인들은 어떻게 극복하여야 하는가? 아감벤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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