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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ㅣ Oct 17. 2023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

  Le séminaire sur 'La Lettre volée'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라캉은 그가 활동하던 20세기 중반의 정신분석학계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의 사상과 거리가 멀어져 있음을 비판하였으며, 동시에 '프로이트로의 회귀'라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사상을 펼쳤다. 하지만 라캉은 단순한 회귀에서 멈추지 않고 프로이트의 사상을 수용함과 동시에 재구성하여 새로운 사상을 창조하였으니,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의 방법론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적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라캉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소쉬르와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요구된다. 이렇게 탄생한 라캉의 사상은 서구 지성사회를 당황과 함께 크게 요동치게 만들었다. 구조주의의 물결이 지나가고 있던 것이다.


 라캉은 정신분석학계가 과거에 프로이트가 주장했던 '죽음충동'을 경시하는 태도를 지적한다. 환자의 치료를 목적으로 하였던 정신분석학에서 죽음충동은 굉장히 당혹스러운 개념이었다. 안정적인 자아를 확립해 주는 정신분석 치료의 과정에서 자아마저 해체되는 궁극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죽음충동이 강조된다면 자아의 균형은 유지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라캉은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을 수용하여 자아의 구조를 재구성한다. 그는 무의식의 구조가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이루어져 있다 주장한다. 라캉은 1954년에 진행된 그의 세미나에서 에드가 엘런 포의 소설 <도둑맞은 편지>를 비평하여 무의식의 구조를 설명하였다. 그는 이를 더욱 체계화하여 1966년에 그의 저서 <에크리>를 통하여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의 관한 재해석을 발표한다.


"이 세미나가 보여주려는 것은 상상계적 특질들이 상징적 연쇄와 관련되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상상계적 특질들은 경험의 본질을 구현하기는커녕 그것들을 결합하고 방향 지어주는 상징적 차원에 의존할 뿐이다. 의미화 연쇄 속에 각인된 상상계적 자질들은 부분적으로나마 상징계를 대체할 수 있다고 우리를 유혹한다. 하지만 주체에게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정신분석학적 결과들은 상징계가 갖는 특별한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배제(Verwerfung)나 억압(Verdrangung), 거부(Vemeinujng)와 같은 정신분석학적 결과들이 기표들의 자리바꿈(Entstellung)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강조해야만 한다. 반면에 상상계적 요소들은 그들이 갖는 관성(inertia)에도 불구하고 상징적 과정 속에 그림자를 드리우거나 상징적 연쇄를 그저 반영할 뿐이다." -욕망이론 p.102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는 기호체계이며,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이루어져 있다. 기의란 기호가 나타내고자 했던 내용이며 기표란 기호가 표현되고 있는 문자 그 자체이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바라본 가로수를 표현하기 위해 "나무"라고 말을 했을 때 내가 본 가로수는 기의가 되며 "나무"라는 단어 자체는 기표가 된다. 기호를 이루는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자의적이며 필연적이지 않다. 그저 그렇게 불리어왔을 뿐인 것이다. 라캉은 이러한 소쉬르의 이론을 차용하고 있다. 언어체계는 주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미 존재해 온 것이다. 하나의 개인이 의지를 가지고 언어체계를 바꾸려고 한들 그 의지가 타자와 공유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노력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수의 주체가 협력하여 언어체계를 바꿀 수 있을까? 이것 또한 불가능하다. 주체가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언어체계의 매니즘, 구조 그 자체는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어로 사유하며 표현하고 인식한다. 인간은 언어체계 내에서의 개념을 인지하고 있어야만 사물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며, 이것을 바탕으로 사유하여 소통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언어란 거부할 수 없는 규칙이다. 라캉은 이러한 기표들의 장을 상징계라 하였다.


 무언가를 정의한다는 것은 정의되지 않는 것들을 부정한다는 것과 같다. 부정되는 것들이 없다면, 정의되는 것 또한 없다. 언어는 구별의 역할을 가진다. '그것'을 표현함으로써 '그것이 아닌 것'과 구별한다. 이러한 구별은 일방적이지 않다. 언어는 상호 부정을 하는 기표들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 A가 B를 부정함과 동시에 B 또한 A를 부정함으로써 우리는 이것들은 구별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기표는 오로지 기표만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기표는 기의를 직접적으로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다. 기표는 오로지 간접적이면서 자의적인 은유의 형태로만 기의와 관계한다. 언어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항상 "~와 같은"의 형식으로 기술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기표와 기의의 완전한 일대일 대응은 불가능하며, 이 둘의 관계는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우리가 언어로 사유하며 소통하는 이상 우리는 기표의 세계만을 마주하며 살 수밖에 없다.


 상징계의 질서 속에서 인간 또한 하나의 기표가 된다. 당신이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당신은 대답을 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하나의 기표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드러난 기표 또한 다른 기표와 함께 상호부정의 연쇄 속에 있다. 인간은 무언가를 하기 위해, 구별받기 위해, 사회에 속하기 위해 기표를 욕망한다. 이러한 기표들은 타자와 구별되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타자가 욕망하는 것이다.  헤겔이 먼저 말했듯이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기의는 우리 곁에 머물지 않으며 은폐되어 있다. 주체는 본래 표현하고자 했던 것에, 욕구했던 것에 도달하지 못하며, 기표 속을 맴도는 히스테릭한 주체로 남겨진다. 이러한 구조를 통하여 주체의 욕망의 해소는 끝없이 유보된다.


"두 개의 극적 장면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조심스럽게 원초적 장면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두 번째 장면이 첫 번째 장면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초적 장면은 궁주의 내실에서 일어난다. 고귀하신 분이라 불리며 궁중의 내실에 혼자 있을 때 편지를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왕비다. 마침 그때 또 다른 고귀한 분이 들어왔으므로 왕비는 당황했다. 알다시피 그가 편지를 보게 되면 왕비의 명예와 안전에 큰 손상이 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고귀한 분이 정말로 로왕일까 하는 의심은 D장관이 등장함에 따라 곧 사라진다. 왕비는 편지를 그대로 편 채 책상 위에 둘 수밖에 없었지만 주소를 쓴 곳이 위로 나오고 편지의 내용은 가려져서 왕의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편지는 장관의 괭이 같은 눈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왕비의 당혹스러운 안색을 보고 대뜸 그 편지에 무스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이후로 모든 일은 자동적으로 진행되어 갔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업무를 처리한 다음 장관은 문제의 편지와 매우 비슷하게 생긴 편지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읽는 척하다가 그 편지 옆에 바싹 대놓았다. 그리고 재미나는 이야기를 좀 더 한 후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문제의 편지를 가지고 가버렸다. 장관의 계략에 완전히 속은 왕비는 물론 장관을 책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에 그의 옆에 있는 왕이 눈치채는 것을 두려워했기 떄문이다. ...
 두 번째 장면은 장관의 집무실에서 일어난다. 집무실은 그의 저택 안에 있고 파리 경시총감이 뒤팽에게 들려준 설명에 의하면(여기서 포는 두 번째로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천재 뒤팽을 등장시킨다) 경찰은 장관이 밤새 집을 비워두는 습관을 이용해 집과 주변 건물들을 지난 8개월 동안 샅샅이 뒤져왔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장관이 자신의 손이 미치는 가까운 곳에 편지를 감추어두었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추측할 수 있다.
 마침내 뒤팽이 장관을 방문하게 된다. 장관은 지루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태연히 그를 맞아들인다. 하지만 장관의 이러한 태도에 속지 않는 뒤팽은 색안경을 끼고 그의 주의를 피해 방안을 샅샅이 살펴본다. 그의 시선이 아주 더럽게 구겨져 있는 편지에 멈췄을 때 뒤팽은 그것이 자기가 찾는 편지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 편지는 벽난로 한복판 아래, 겉만 번지르한 채 매달려 있는 아주 보잘것없는 마분지로 된 편지꽂이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편지의 면적만이 일치할 뿐 편지가 총감이 설명한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뒤팽은 오히려 이것이 자기가 찾고 있는 편지라는 것을 더욱 확신한다.
 다음날 다시 찾아올 구실을 만들기 위해 뒤팽은 담뱃갑을 책상에 두고 일단 장관의 저택을 물러 나온다. 다음날 그는 그 편지와 똑같은 가짜 편지를 가지고 다시 장관의 집에 방문한다. 적절한 시기에 거리에서 소동을 일으켜 장관의 시선을 창문 쪽으로 돌린 다음 뒤팽은 도난당한 편지를 꺼내고 가짜 편지를 넣은 다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집을 떠난다." -욕망이론 p.104

  

 라캉은 에드가 엘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를 추리소설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도둑맞은 편지>에서 범죄는 중심소재가 아니며, 범인이 누구인지와 범인의 목적이 이야기의 초반부터 이미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편지가 이동하게 되는 속임수이다. <도둑맞은 편지>에서 나타나는 속임수의 특징은 무의식의 비밀과 유사하다. 라캉은 편지를 점유하는 인물들의 역학관계를 통해 무의식의 담론을 설명할 수 있다 말한다. 여기에서 편지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편지를 소유한자와 소유하지 않은 자의 관계를 통해 편지는 그 영향력을 내뿜는다. 편지는 편지의 내용이 은폐됨을 통하여 인물들 간의 역학관계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만일 편지의 내용이 만천하에 공개된다면 편지는 그 힘을 잃고 말 것이다. 편지의 공개됨은 곧 죽음인 것이다. 은폐된 편지는 인물들의 욕망이 대상이기도 하다. 편지의 부재가 편지에 대한 욕망을 일으키며, 편지의 소유자는 계속 바뀐다. 중요한 점은 편지를 가지는 것이 인물들의 근본적인 욕망이 아니란 것이다. 인물들은 편지를 가짐으로써 얻는 관계적 힘을 바란다. 하지만 그 힘을 가지기 위해선 편지를 욕망할 수밖에 없다. 이외에도 <도둑맞은 편지>의 재해석으로 밝히는 라캉의 은유는 무척이나 풍부하며 심오하다.


 라캉은 자신의 사상을 통하여 상징들에 의해 끊임없이 춤춰지는 주체를 밝혔다. 라캉의 주체는 표현됨과 동시에 억압된다. 즉, 분열된 주체이다. 이러한 주체는 히스테릭하다. 주체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향해 끝없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끝없는 질문이 바로 주체를 움직이게 하는 힘, 욕망이다. 욕망의 최종적 완수를 위하여 주체가 기표를 해체하려 한다면, 그 끝에는 죽음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주체는 오로지 상징의 부재를 통해서만 죽음을 간접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사유를 통해 라캉은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을 자신의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라캉의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의 사상처럼 오묘하면서도 씁쓸하지만, 어쩌면 억압벗겨지는 해방감 또한 함께 느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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