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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ㅣ Nov 16. 2023

체험·표현·이해

Erlenben, Ausdruck und Verstehen

 독일의 철학자 빌헬름 딜타이. 그는 해석학의 거장이다. 해석학은 수학에서 다뤄지는 한 분야를 지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해석학은 인문학적, 미학적 혹은  철학적 해석학을 뜻한다. 딜타이는 헤겔의 라이벌이었던 슐라이어마허의 사상을 이어받아, 해석학의 연구주제가 문헌학적 해석학이나 신화적 해석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해석학의 연구주제를 보다 더 확장함과 동시에 더욱 명확한 연구방법론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딜타이는 인간의 생생한 삶의 체험을 근거로 하는 인간 정신활동의 모든 해석의 시작, 보편적 해석학의 기획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획을 위해서 그는 자연과학과는 다른 정신과학만의 학문적 접근방식에 대한 사유를 전개하였으니, 이러한 사상을 그의 저서 <정신과학에서 역사 세계의 구축(Der Aufbau de geschichtlichen Welt in den Geisteswissenschaften)>에서 풀어내었으며, 이것을 국내에서 발췌해 번역하여 <체험·표현·이해>로 담아내었다.


"정신적 세계의 연관은 주관에서 시작되며, 개개의 논리적인 과정들을 서로 연결하고 있는 정신적 세계의 의의연관(Bedeutungszusammenhang)에 대한 규정에까지 이르는 정신의 운동이다. 그래서 이 정신적 세계는 파악하는 주관의 산물인데, 한편으로 정신의 운동은 그 세계 안에 있는 객관적 지식의 획득을 지향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제 '주관에서 정신적 세계 구성이 어떻게 정신적 현실[혹은 실재]에 대한 앎을 가능하게 해 주는가'라는 물음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앞서 이런 과제를 역사이성 비판의 과제라고 이름 붙였다. 이 과제는 오로지, 이런 연관을 만드는 데 협력하고 있는 개개의 기능들이 분리되어, 그런 기능들 각각이 정신적 세계에서의 역사적인 진행 경과의 구성과 관련해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의 체계론의 발견과 관련해 어떤 몫을 하는지가 드러날 때에만 해결할 수 있다. 그 [역사적인] 진행결과는 진리들의 상호의존성 속에 포함된 난점들이 어느 정도까지 해결도리 수 있는지를 입증해야 한다. 그 진행 경과는 정신과학적 파악의 현실적 원칙을 경험에서부터 점진적으로 도출하게 될 것이다."  -체험·표현·이해 p.17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미 이해하고 있는 어떤 것과의 비교를 해야만 한다. 즉, 이해는 지시적이며 규정적이다. 이해하길 바라는 이해의 대상은 항상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홀로 의미가 형성되지 않는다. 이해의 대상은 항상 서사적인 배경의 내에서 그 의미를 가진다. 즉, 이해는 이해된 것들의 맥락 속에서 가능하다. 하지만 이해된 맥락 또한 이해를 통해서 형성된다. 전체적인 의미는 부분적인 의미들을 규정하지만, 또한 반대로 부분적인 의미들이 한데 모여 전체적 의미를 형성한다. 이처럼 이해는 순환적인 형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해석학적 순환에서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무의미하다.


 우리가 이해를 위해서 이해된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은, 선이해와 같은 경험과 체험을 배제하여, 오로지 논리적임과 합리성만을 고려하여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뜻한다. 자연과학의 탐구에서는 논리성만을 바탕으로 해석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어쩌면 이도 불가능하지만), 정신과학(인문학)의 탐구에서는 불가능하다. 정신과학의 해석에서는 논리적 형식의 해석과 함께 주관적인 체험의 해석, 심리학적 해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적 해석은 해석 대상을 발화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표현임을 이해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심리학적 해석은 표현의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점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발화자의 주관적 체험을 이해하기 위해 해석자에게는  '감정 이입(Einfühlung)'이 요구된다. 슐라이어마허의 보편적 해석학의 목표는 발화자의 주관적인 정신적 체험을 재구성하여 이해하는 것이다.


"이해란 '너' 안에서 '나'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정신은 점점 높은 단계들의 연관에서 자신을 다시 발견한다. '나' 안에서, '너' 안에서, 한 공동체의 모든 주관 안에서, 문화의 모든 체계 안에서, 종국적으로는 정신의 총체성과 보편사 안에서의 이 같은 정신의 자기성(Selbigkeit)은 정신과학에서 다양한 기능들의 협력을 가능하게 해 준다. 정신과학에서 앎[인식]의 주관은 그 대상과 하나이며, 이 대상은 모든 단계의 객관화 과정에서 통일성을 유지한다. 이런 절차를 통해 주관 안에서 빚어지는 정신적 세계의 객관성이 인식되고 나면, 그 절차가 과연 인식 일반의 의문제 제해결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칸트는 인식 문제를 다루기 위해 형식논리학과 수학에 놓여 있는 기반들에서 출발했다. 칸트 시대의 형식논리학은 최후의 논리적 추상화, 사고 법칙 그리고 사고 형식들에서 모든 과학적 명제들의 타당성 입증을 위한 최종적인 논리적 근거를 보았다. 사고 법칙과 사고 형식들, 특히 범주들을 통해 이뤄지는 판단은 칸트에게 있어서 인식을 위한 조건들을 포함했다. 그는 이런 조건들을, 수학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들을 통해 확장시켰다. 그가 이룬 업적의 위대함은 수학과 자연과학적 지식에 대한 완벽한 분석에 있다. 하지만 칸트 자신은 제공하지 못했던 역사의 인식론이 그의 개념 틀 안에서 가능한지의 여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체험·표현·이해 p.18


 하지만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적 순환에 의하여 주어지는 주관성에 기반한 해석은 상대주의에 빠질 수 있는 문제점이 있었다. 모든 이해와 체험이 주관성에 근거하여 개별적이라면, 타인이 그것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으며, 그것이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학문이 가치 있으려면 보편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래서 딜타이는 정신과학(인문학)의 연구에서 객관성을 확립하는 것을 자신의 철학의 목표로 세웠다.


  딜타이는 자연과학을 ‘설명’의 과정이며, 정신과학은 ‘이해’의 과정이라 규정하였다.  설명은 현상을 기술함에 그 의의가 있지만, 이해에는 공감과 추체험과 같은 심리적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의 인식론적 토대의 차이를 정립함과 동시에 보편성의 확립을 시도한 것이다. 자연과학과는 달리 정신과학(인문학)은 화자의 '정신적 삶'을 이해함을 목표로 한다. 딜타이에게 인간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의 '내면적 체험의 역동적인 표현' 들을 탐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딜타이에게 이해란 삶(체험)을 삶(체험) 그 자체에 의해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이해의 양상은 주관을 규정하는 보편성, 세계와의 보편적 공유됨에 근거하는 체험의 장을 규정하는 것 또한 '해석학적 순환'의 양상을 띠게 된다.


"이해는 무엇보다 실천적인 삶의 관심 속에서 생겨난다. 각가의 사람들은 서로 소통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은 대립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이해의 요소적인 형식들이 생겨난다. 이런 이해는, 서로 연결됨으로써 좀 더 고차적인 형식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종의 철자와도 같다. 내가 말하는 이해의 요소적인 형식이란 개개의 삶의 표현에 대한 통일적인 해석이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그런 해석은 유비추론으로 서술될 수 있다. 이런 추론은 그런 해석과 그것에 표현된 것 간의 규칙적인 관계를 통해 매개된다. 나아가 그런 해석의 개별적인 삶의 표현은 모든 종류의 이해에서 가능하다. 하나의 문장을 형성하는 단어로 나아가게 되는 일련의 철자들은 하나의 진술에 대한 표현이다. 어떤 표정이나 안색은 우리에게 기쁨이나 고통을 보여준다. 추후에 좀 더 복잡한 행동을 구성하게 되는 요소적인 행동, 예를 들어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망치로 내려치거나 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등의 행동들은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이런 요소적인 이해에는 전체적인 삶의 연관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삶의 연관은 삶의 표현들의 지속적인 주체를 형성한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생겨난 하나의 추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요소적인 이해의 과정이 바탕을 두고 있는 근본 관계는, 표현이 그 안에 표현된 것과 맺고 있는 근본 관계이다. 요소적인 이해는 원인에 대한 결과의 추론이 아니다. 또 우리는 더욱 조심스러운 입장에서 그것을, 주어진 결과에서 일정한 삶의 연관으로 소급해 올라가는 절차로 파악해서도 안 된다. 분명한 것은 이 후자의 관계가 사태 자체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이런 이행은 말하자면 문 앞에 있는 것이지 굳이 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체험·표현·이해 p.46


 개인이 체험하는 역사적 지평, 삶의 지평은 보편성을 띄고 있지만, 그 지평은 개개인의 참여를 통해 형성된다. 인간은 항상 맥락 속에 내던져지지만, 맥락을 구성하는 참여자 혹은 창조자이기도 하다. 즉, 인간의 체험은 주관적이자 객관적이며 역사적이다. 주관성과 객관성의 순환, 이러한 인간의 수용자적 면모와 참여자적 면모 사이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 속에서 의미가 생성된다. 정신과학의 탐구괴정은 역사성의 기반한 상호작용의 보편성에 대한 이해이다. 딜타이는 인간의 체험이 주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러한 시도를 통하여 딜타이는 인문학에서의 보편성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주관과 객관의 순환을 탐구하는 것이 정신과학이 추구해야 할 과제이다. 딜타이는 삶과 체험을 철학적 주제를 삼음으로서 니체로부터 시작되어 20세기에 펼쳐지는 생철학(삶철학)이 발생가능할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현대의 인문학에 요구되는 탐구방식들도 딜타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자연과학적 보편성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인문학적 보편성이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자연과학의 보편적 발견들이 우리의 삶에 들어와 체험이 될 때 그것은 개별적인 체험에 의해 의미가 생성될 것이다. 우리가 익숙함에 가려져 보편이 생성되는 과정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지는 않는지, 이러한 과정 중에 어떠한 맹점이나 맹신들이 있는지, 보편적 해석의 과정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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