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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bk Nov 11. 2023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

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 그는 의심의 대가였다. 흄은 대의 다른 철학자들이 인간이 가진 이성의 능력에 끝없는 신뢰를 주장하는 동안, 그는 이와는 반대로 인간의 한계를 누구보다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인간은 오직 경험밖에 알 수없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세계의 확실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니 인간은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흄의 이러한 회의주의는 낙천적 이성주의자들에게 큰 충격과 함께 숙제를 던져주었다. 그가 남겨준 숙제는 세기의 천재가 등장할 때까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니, 그의 인식론적 비판은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흄의 심리주의철학은 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어쩌면 현대에서도 흄의 사상을 완전히 극복하기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흄은 26세의 나이에 그의 주저 <인간본성론>을 저술하였으며 이 책을 대중이 읽기 쉽게 다듬어 8년 뒤에 개정판을 내었으니, 그 책의 제목을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라 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인류의 대다수는 세밀하고 난해한 철학에 비해 쉽고 명백한 철학을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세밀하고 난해한 철학보다는 쉽고 명백한 철학이 동의하기도 더 쉽고 또 더 유용하여 권장할 만하다는 사실 또한 확실하다. 쉽고 명백한 철학은 우리의 일상에 좀 더 깊이 파고들며 감동을 주고 자극을 준다. 그리고 그렇게 해주는 원리들을 다룸으로써 우리의 행실을 교정해 주기도 하고, 기대되는 이상적인 모델에 더욱 가까워지도록 우리의 행위를 유도해 나가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정신의 움직임에 기초한 난해한 철학은 일이나 행동에 관여하기 어렵다. 그런 철학은 철학자가 사라지고 나면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된다. 난해한 철학의 운리들은 우리의 행실이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치기가 쉽지 않다. 우리 마음이 느끼는 것들, 정열의 격동, 감동의 격렬함 같은 모든 것들은 난해한 철학의 결론들을 흐트러뜨리고 심오한 철학자를 그냥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되돌려 버린다. ... 인간은 이상적 존재다. 그리고 이성적 존재로서 학문으로부터 자신에게 필요한 적절한 지양분을 섭취한다. 그러나 인간의 이해력의 범위는 너무나 제한적이기 때문에, 이 특정 학문으로부터 얻는 양분이 어디까지 안전한 것인지 말하기 어려우며, 또한 그것을 어디까지 획득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만족스럽게 말하기 어렵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이 항상 교제에 동참하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교제하기에 적절한 분위기를 항상 유지해 나가기도 어렵다. ... 나는 난해한 사고와 지나치게 파고드는 탐색을 금지하고 호되게 꾸짖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당신을 구슬픈 침울함 속으로, 그리고 끝도 없는 불확실성으로 끌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의 거짓된 발견물들이 세상에 전해질 때 당신이 부딪치게 될 가혹한 평판 때문이다. 철학자가 되어라. 그러나 당신이 모든 철학 한가운데에서 계속 한 인간으로 존재하라.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 p.25


 인간의 정신의 내용은 감관이나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들은 지각의 다발로 형성된다. 지각은 인상(impression)과 관념(idea)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상과 관념은 생생함의 정도로 구별된다. 인상의 기억을 반성적으로 재인하는 것이 관념이다. 예를 들어, 눈앞의 모닥불의 따듯함을 느끼는 것은 인상이지만, 후에 모닥불이 꺼져 따듯함을 그리워할 때의 따듯함은 관념이다. 그러나 모든 관념들이 이에 대응하는 인상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유니콘과 같은 관념은 인간이 직접 경험하여 생생한 인상을 가질 수 없다. 이와 같은 관념들은 인간이 경험한 지각의 다발들을 결합시키려는 버릇에서 탄생한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보편적으로 관념들을 최적의 상태로 결합하여 복합관념을 이루도록 단순관념들을 모으는 하는 '친절한 힘(gentle power)'이 있다. 이러한 힘은 관념들을 '유사성(resemblance)', '시간, 공간적 근접성(contiguity)', '인과성(cause and effect)'에 따라 유사한 관념들을 서로 연합시킨다.


"여기에서 우리는 정신의 모든 지각들을 두 가지 등급이나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그 둘은 지각들이 지는 힘과 생동감의 차이에 의해 구분된다. 덜 힘 잇고 덜 생생한 지각들은 사고들(Thoughts) 혹은 관념들(ideas)이라고 불린다. 더 힘 잇고 더 생생한 지각들은, 우리말이나 대부분의 다른 언어들에 있어서도 특별히 명명된 바 없다. 나는 다른 이유는 없고 오직 철학적 목적을 위해 더 생생한 지각들을 일상적인 용어나 명칭으로 자리매김해 불러보려고 한다. 이제부터 나는, 임의로, 더 생생한 지각들을 인상들(Im-pressions)이라고 부르겠다. 여기서의 의미는 인상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될 때의 의미와는 조금 다른 것이다. 즉 우리가 듣고, 보고 느끼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원하고, 의지할 때 갖는 우리의 보다 더 생생한 지각들을 나는 인상이라는 용어로 나타내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상들은 덜 생생한 지각들인 관념들과 구분된다. 관념들이란 앞에서 언급한 감각들이나 활동들 중의 어떤 것들에 대해 우리가 반성할 때 의식하게 되는 것들이다."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 p.39


 흄에 따르면 인간은 오직 경험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실재와의 일치를 보장하지 않는다. 인간의 인식은 실재적인 세계 혹은 사물을 알 수 없으며, 순수하게 경험만을 마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경험은 주관적인 심리적 현상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경험을 통해서는 확고한 객관성, 주관과 객관의 일치, 즉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이 흄의 회의주의이다. 이러한 회의주의에 따르면 과학 또한 확실하지 않다. 과학의 근간을 이루는 실험과 관찰 또한 오로지 주관 속에 머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실험과 관찰을 반복하여 같은 결과를 도출하여도 이것은 버릇적인 경험의 반복이 되며, 같은 결과를 예상하는 것 또한 버릇적인 인식들의 결합의 결과이다. 흄에게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흄의 사상에서는 인과율이란 없다. 인과율의 필연성을 보증하는 것을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으로는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필연성은 경험이 불가능한 인상이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인식이 인과율의 법칙을 따라 탐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 '친절한 힘'에 의해서 유사한 관념들을 서로 연합시키려는 버릇 때문이다. 인과율은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들의 성질이 아니라, '선행하는 사건' 뒤에 '뒤따르는 사건'의 경험을 반복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생겨난 '연상습관(habit of asscociation)'이다. 사유나 추론은 일종의 감각적인 것이며 사유는 직접적인 경험을 넘어서서 연상될 수 없다.


"모든 자연법칙들과 모든 물체의 작용은 예외 없이 오직 경험에 의해서만 알려진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만 생각해 봐도 될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대상을 제시하고 이미 주어져 있는 관찰 결과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 대상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생길지에 대해 미리 말해보라고 한다면, 정신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을 수행해 나가야만 할지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대상으로부터 나온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사건이 창작되거나 아니면 추측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창작물은 전적으로 임의적인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 정신이 아무리 엄밀히 조사하고 탐색해 보아도 결코 주어진 원인만 가지고 결과를 발견해 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결과는 원인과 완전히 다르며, 그에 따라 결과는 원인 안에서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당구공의 운동은 첫 번째 당구공의 운동과는 사뭇 다른 사건이다. 한쪽의 운동에는 다른 쪽의 운동을 암시해 줄 어떤 것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 p.54



 흄에 사상에 따르면,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간의 정신 외부의 존재 또한 존재할 수 없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인간의 주관을 뛰어넘어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의 정신 외부에 무엇인가 항상 있을 것이라는 믿음 또한 버릇적인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어떠한 물체가 계속 한 공간에 있음으로써 그 물체가 불변(constancy)한다 착각하며, 비슷한 조건하에서 어떠한 변화가 늘 발견되는 것(coherence) 또한 매 순간의 경험일 뿐이다. 이것들에 대한 믿음은 신념이지 합리적인 증명이 될 수 없다. 우리의 인상이 사물과 연관되어 있다는 가정은 추론상의 어떠한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흄에게서 인간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자아 그 자체'를 인간은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라 부르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것은 상이한 지각들의 묶음(bundle)이다. 흄에게 '나'라는 자아는 경험된 기억들이 버릇적으로 묶인 집합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생각에 있는 자아는 지속적인 동일성에 대한 인상을 만들어 주는 기억의 힘이다. 이러한 흄의 이론을 '다발이론'이라 한다. 뇌과학이 발전한 현대의 많은 실험들이 이러한 '다발이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인간의 정신적 능력이 응축된 나뉘지 않는 단일한 기관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식의 수동적인 종합만을 강조하는 흄의 극단적인 회의론을 현대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수용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후대의 철학자들이 흄의 비판을 수용하여 새로운 철학을 펼쳤으며, 그 토대 위에 새로운 역사들이 쌓여가 현대사회를 이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다르게 표현하면 흄은 현대 사상들의 중요한 토대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우리가 흄을 이해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욱 많은 것들의 이해로 나아갈 수 있는 관문이 되어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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