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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bk Dec 01. 2023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

 칸트의 선험철학(초월철학)은 주제에 대한 가능조건을 탐구하는 철학이다. 어떠한 것의 가능조건이란 경험을 통하여 증명됨과 동시에 그 경험됨 너머에 있는 보편적 규칙(원리)을 상정하며 밝히는 것이다.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 경험의 가능조건을, 그리고 더 나아가 경험으로 확장되는 지식과 학문의 가능조건을 탐구하였다. 이어서 <실천이성 비판>에서는 도덕의 가능조건과 그로 인해 요청되는 자유와 같은 념들을 밝히려는 기획이 있었다. 그렇다면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는 어떠한 것의 가능조건을 밝히려 했던 것일까? 책의 제목이 그러하듯이 판단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칸트에 의하면 판단력이란 주관을 통하여 객관을 유추하는 능력이다. 주관을 통한 객관의 탐구. 앞선 두 비판서를 통하여 판단력은 인간의 지성(오성)과 이성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점을 밝혔다. 하지만, 앞선 두 비판을 통하여 설명이 되지 않는 점이 있었으니, 바로 미적판단을 할 때였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앞에 보이는 궁전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물론 '단지 멍하니 바라보로록 하기 위해 만든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해도 좋을 것이며, 혹은 저 이로쿼이족의 족장처럼 '파리에서는 선술집이 제일 마음에 들더군'하는 투로 대답해도 좋을 것이다. 또 더 나아가서 나는 꼭 루소와 같은 투로 인민의 고혈을 그처럼 럼무용한 것에 낭비하는 왕후들의 허영을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일 내가 다시 살마들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전혀 없는 어느 무인도에 살고 있고 또 내가 원하기만 하면 그러한 호화스러운 건물을 마법으로 당장 만들어낼 수 있다 하더라도, 내가 살기에 알맞은 오두막집을 이미 가지고 있다면 그런 건물을 만들기 위해 내가 어떠한 수고도 하지 ㅇ낳을 것임을, 나는 아주 당연하게 확실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말을 모두 승인하고 옳다고 인정하겠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다만 대상의 표상이 나에게 만족을 주는가 [내 마음에 드는가] 하는 것뿐이며, 그래서 나는 그 표상의 대상이 현존하는지에 관해서는 항상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어떤 대상에 대해 아름답다고 말하기 위해, 또 내가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이러한 표상으로부터 내가 부여하는 어떤 것일 뿐, 나로 하여금 대상의 현존에 의존하게 하는 어떤 것이 아님은 매우 분명하다." -판단력 비판 p.19


 인간은 아름다움을 어떻게 느끼는가? 우리가 어떠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 쾌의 감정이 일어난다. 아름다움은 쾌를 불러온다. 그리고 아름다움으로 느껴지는 쾌는 오로지 아름다움에서만 기인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관심이나 목적 없이 느낄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만약 배고플 때에 빵을 바라보고 쾌의 감정을 느꼈다면, 그것은 빵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허기짐에 의한 기대와 관심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수한 아름다움은 무관심 속에서 느껴지는 만족이다. 즉 미적판단은 무관심이 전제된 관심이다. 이어서, 미적판단은 무관심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성에 능력에 의한 판단에 기인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미적판단은 인간의 이성 이전에 작용하는 주관적인 감성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앞선 두 비판서에서 밝혔듯이 칸트는 인간의 판단력이 이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또한, 만약 미적판단이 개인의 주관적 관심과는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미적판단은 보편성을 띄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칸트가 <판단력 비판>을 저술하게 된 이유이다. 인간은 어떻게 미적판단을 가능하게 하는가? 그리고 주관적인 미적판단이 어떻게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가? 이것이 <판단력 비판>의 주된 취지이다.


  어떻게 주관적 미적판단이 보편성을 가질 수 있을까? 칸트는 반대로 생각한다. 주관적 미적판단을 하기 위해선 보편성이 요청되어야만 한다. 보편성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인간은 주관적 미적판단이 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탐구방식이 주제의 가능조건을 탐구하는 칸트의 선험철학의 구조이다. 미적판단의 보편성은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이것이 조건으로써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미적판단의 보편성은 도대체 어떤 것이란 말인가? 칸트는 이것을 개념 없는 인식이라 말한다. 인간의 개념은 이성을 통해 확립되는 것이다. 하지만 미적판단은 인간의 이성 능력 이전에 감성 능력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미적판단은 개념의 확립 없이 인식되어야만 한다. 이는 미적판단은 언어를 통한 개념의 확립 그 이전의 무언가 라는 의미이다. 정리하면 미적판단은 개념 없이 보편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취미판단은 단지 관조적이다. 다시 말해 취미판단은 대상의 현존여부와 상관없이 대상의 성질을 오직 쾌·불쾌의 감정과 결부시켜 내리는 판단이다. 이러한 관조는 개념과도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취미판단은 인식판단이 아니며 (이론적 판단도 실천적 판단도 아니며), 따라서 개념에 근거한 것도 개념 [적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쾌적한 것, 아름다운 것, 선한 것은 표상이 쾌·불쾌의 감정과 맺는 세 가지 상이한 관계를 나타내며, 우리는 쾌·불쾌의 감정과 맺는 관계에 입각해서 대상들을 또는 이 대상들을 표상하는 방식들을 서로 구별한다. ... 쾌적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것을 말하며,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에게 단지 만족을 주는 것을 말하고, 또 선하다는 것은 존중되고 인정되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객관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쾌적함은 이성이 없는 동물에게도 적용되지만, 미는 오직 인간에게만, 즉 동물적이면서도 이성적인 존재자에게만, 다시 말해 이성적 존재자(예컨대 정신) 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동물적 존재자이기도 한 인간에게만 적용된다. 반면에 선은 모든 이성적 존재자 일반에 적용된다." -판단력 비판 p.27


 칸트에 따르면 미적판단은 개념 없이 이루어진다. 개념이 부재하다는 것은 그것의 목적성 또한 부재하다는 것이다. 근대까지의 철학적 사유에서는 어떠한 것의 개념을 정의하려면 그것의 목적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포크라는 개념은 무언가를 찍어서 먹을 수 있는 목적을 가진 물체로 정의하여 이해된다. 그러므로 개념의 부재는 목적의 부재를 야기한다. 미적판단에서는 인식하는 그것의 목적을 파악할 수 없음 또한 전제되는 것이다. 하지만 칸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적판단에서 목적성 또한 요청된다고 한다. 바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그 조건, 형식 그 자체가 요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미적판단은 목적이 없어야 하는 목적(형식),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띄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무관심한 관심, 주관적인 보편성, 목적 없는 합목적성은 어떻게 만족을 일으키는가? 이때의 만족은 주관에 의해서 달라지는 우연적 만족이 아닌, 보편성을 위한 필연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미적판단의 필연성은 개념화되지 않아 무규정적이어야만 하지만 보편적이다. 칸트는 이러한 필연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공통감(sensus communis)이라 한다. 공통감은 공감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같은 인식의 방식을 공유한다는 당위성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칸트에 따르면 미적판단은 공통감의 전제하에서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조화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즉, 미적판단은 공통감의 전제됨, 범례적인 필연성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


"어떤 것이 아름답다고 언명하는 모든 판단에 대해, 우리는 그 누구도 다른 의견을 가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판단의 근거를 개념에 두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두고 있을 뿐이며, 따라서 이 감정의 근거를 사적 감정에 두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감정에 두고 있다. 이제 공통감은 이를 위해서는 경험에 근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공통감은 일종의 당위를 내포하는 판단들을 정당화하려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의 우리의 판단과 일치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판단과 합치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는 나의 취미판단을 이 공통감에 의한 판단의 한 실례로 제시하고, 또 그 때문에 나는 이 취미판단에 대하여 범례적 타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공통감은 순전히 이상적인 규범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규범은 전제해야만 우리는 그 규범에 합치되는 판단과 그 판단에서 표현되는 어떤 객관에 관한 만족을 모든 사람들에 대한 규칙으로 삼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원리는 비록 주관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관적·보편적 원리(모든 사람들에게 필연적인 이념)로서 상정된 것이므로, 여러 판단자들의 일치에  관한 한, 우리가 [자신의 취미판단을]이 원리 이래로 올바르게 포섭했다는 확신만 있다면, 이 원리도 흡사 객관적 원리인 양 보편적 동의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판단력 비판 p.78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가 밝힌 미적판단의 네 가지 양식, 무관심한 관심, 주관적인 보편성, 목적 없는 합목적성, 범례적인 필연성에 대해 다루었다. 이를 통하여 칸트는 미적판단의 보편성을 밝힘과 동시에 예술이 학문이 될 수 있는 토대 또한 마련해 주었다. 그렇다면 칸트가 말하는 보편적이지만 규정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위에 제시된 4가지 양식을 통하여 만족(쾌)을 주는 옳음(선)을 밝혀나가는 것을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밝혀나감은 현대사회에서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을 통하여 논리와 이성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인간에게 만족을 주기 힘드며, 창의성과 감성이 논리와 이성과 조화된 공동체가 이상적이다라는 사상을 주장하고 있다. 논리와 이성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제시함과 동시에 그 중요성 또한 강조하기 때문이다. 창의성과 감성이 통제되는 환경을 인류는 여러 사례들을 통하여 경험하였으며 이를 경계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예술에 막연한 숭고함이나 우호적임을 느끼는 것은 삭막한 일상 속에서 느끼기 힘든 부재들을 예술이 메꿔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난해한 현대예술작품 앞에서 위축되기보다는 난해함 그 자체를 즐겨보는 것도 좋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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