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철학산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ybk Jun 16. 2024

물질과 기억

Matière et mémoire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 19세기 후반, 그는 발전하는 과학기술과 의문을 표하는 철학의 조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근대에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발전한 수학, 물리학, 화학 그리고 생물학까지 많은 이론들과 사상들은 기존 서구의 형이상학적 세계관과 가치체계를 매우 급진적인 속도로 바꾸어 버렸다. 이른바 '물질'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도 그러하듯 많은 이들이 물질의 존재를 맹신하지만 그것이 과연 무엇이고 어디에 연원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베르그송은 물질을 고정된 실체가 아닌 '지속하는 흐름 속의 한 순간'으로 이해하며 이러한 의문들에 해답을 전하고자 한다. 혁신적이었던 그의 저서들은 교황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어 위기를 맡기도 하지만, 꾸준히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이후에 그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가 생각한 물질은 곧 생명과 이미지이다. 그는 생명과 그것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사랑한 철학자였다.


"이 책은 정신의 실재성과 물질의 실재성을 긍정하고 이 양자의 관계를 기억이라는 명확한 실례를 통해서 규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책은 분명 이원론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책은 이원론이 항상 제기해 왔던 이원론적 단점들을 제거하지는 못하더라도 상당히 약화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신체와 정신을 고찰할 것이다. ... 이 책 제1장의 목적은 ... 물질을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갖는 표상을  환원하는 것도 거짓이고, 또한 물질을 우리 안에 표상들을 산출하지만 그 표상들과는 전혀 다른 본성에 속하는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도 거짓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물질은 <이미지들>의 총체이다. 그리고 <이미지>라는 말로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관념론자가 표상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한, 그러나 실재론자가 사물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덜한 어떤 존재 -<사물>과 <표상>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존재-이다." -물질과 기억 p.1-7


 베르그송은 플라톤에 의하여 서양철학사가 추구해 온 영원성의 철학에 반대하여 생성과 시간의 철학을 구축하고자 했다. 베르그송이 등장한 19세기말의 유럽은 기계론적 결정론이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협하고 있었다. 기계론적 결정론에 의한 과학만능주의는 20세기를 거쳐 현대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시대적 문제점에 대항하기 위하여 자신의 철학의 임무를 생명체에 관한 규명작업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생명철학으로 자연과학이 간과한 인간의식의 자유문제를 해명할 수 있는 새로운 형이상학 이론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베르그송은 생명에 대한 기계론과 목적론을 비판하게 되는데, 그 비판의 초점이 다름 아닌 시간의 관한 문제였다.


 서양 철학사에서 시간은 공간과 함께 인식의 지평이자 조건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플라톤은 시간을 영원의 그림자 정도로 논하였다. 플라톤이 그림자를 실재에 대한 현상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플라톤은 시간을 영원적 진리인 이데아를 추구하기 위한 단편적인 단서로만 추구한 것처럼 보인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변화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을 ‘운동을 측정하는 수’라는 개념으로 정의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시간은 동적인 자연을 설명하는 존재론적 질서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은 운동성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이었기 때문에 공간화된 양적인 시간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자연과학에서의 시간은 양적 시간으로서, 물리적으로 측정 가능한 객관성을 띤다고 가정하였기에 인간의 삶의 시간도 자연과학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결정론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시각에 반대하며 자신이 발견한 지속으로서의 시간관은 단한순간도 동질적일 수 없는 이질적인 흐름의 연속으로서, 시간은 우리들의 심리상태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들에 관한 의식이라 주장하였다. 인간의 의식은 흐르면서도 변화 속에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의식은 같은 것임과 동시에 다른 것이다. 이러한 의식의 양면성은 자기의식을 규명하고자 하는 많은 철학자들을 난제에 빠트렸다. 매 순간 변화하는 인간의 의식은 변화와 흐름을 논하는 시간의 개념을 빼놓고 이해될 수 없다.


"내가 교과서의 한 단원을 공부한다고 하자. 그것을 암기하기 위해 나는 우선 각 구절을 또박또박 읽는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것을  여러 번 반복한다. 매 번 새롭게 읽을 때마다 어떤 발전이 이루어진다. 단어들은 서로 점점 더 잘 연결되고, 마침내 전체로 조직화된다. 바로 이때 나는 그 단원 암기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그것이 기억이 되었다고, 내 기억 속에 새겨졌다고 말한다. 이제 나는 그 단원이 어떻게 암기되었는지를 알아보겠다. 나는 내가 차례로 지나쳐온  단계들을 떠올린다. 연속적으로 이어졌던 읽기의 하나하나가 각자의 고유한 개별성을 지니고 내 정신에 나타난다. 나는 각각의 읽기에 수반되었고 또한 그것에 둘러싸여 있던 상황들과 더불어 그 읽기 들을 다시 본다. 각각의 읽기는 내 역사 속의 결정된 한 사건처럼 내 앞을 지나간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 이미지들이 기억들이라고, 그것들이 나의 기억 속에 새겨졌다고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 두 경우에 동일한 단어들을 사용한다. 과연 그것은 동일한 것인가?" -물질과 기억 p.84


 베르그송의 의식철학에 따르면, 인간의 감각이나 감정을 나타내는 심리적인 직접적 의식은 질적 다양성으로 나타나고, 이 질적 다양성들은 지속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지속은 무의식 속에서 느껴지며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무의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적 의식 속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에게 지속은 공간과 구분되는 시간의 질서로서 심리적인 시간개념이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기억하며 살고 있다. 인간은 기억 속에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기억 그 자체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어렵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기억은 곧 시간의식이며 생명현상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것이라 말한다. 기억이 우리를 정의한다는 흄의 고찰을 비추어 볼 때, 기억 즉 시간성은 우리 존재의 본성을 이루고 있다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지나가 버린 일상들을 다시 현실로 불러오는 작용을 기억이라 부른다. 우리가 살고 있고 경험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므로 이것은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기억이 시간성으로, 지속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의식작용 자체라 볼 수 있다.


 베르그송은 기억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암기 행위와 관계하는 신체적 기억이며 이와 다른 하나는 순수기억이라 말한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통용하는 기억의 의미는 베르그송에겐 신체적 기억이다. 신체적 기억은 의식적으로 회상하는 기억을 뜻한다. 이에 반해 순수기억은 무의식적인 상태에 놓여있는, 과거의 일화와 정보들을 기록하고 있는 순수한 과거이다. 순수 기억은 무의식 속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순수 기억은 우리의 주관밖에 있기에 자연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의식은 순수기억에 기초하여 현재의 행위를 위해 과거의 어느 지점에 초점을 맞춘다. 이렇게 초점이 맞춰진 기억이 보통기억, 즉 신체적 기억이다. 과거는 본질적으로 잠재적인 것이지만, 우리의 행위적 필요에 따라 그 과거에 초점을 맞추는 의식적 노력을 수행할 때에만 포착된다. 우리들의 인식행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지속적으로 흐르며 변화하는 세계의 부분을 수축하여 포착하고자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대상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직관을 통해 지속을 느끼며, 세계에 지속에 참여하고 있는 '지금, 여기'를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이 통상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직접적 직관에 나타나는 대로의 실재가 아니라, 실천적 관심이들고  사회적 삶의 요구들에 실재를 맞춘 것이다. 순수한 직관은, 외적인 것이든 내적인 것이든, 불가분한 연속체에 대한 직관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편에서는 구분되는 말들에, 저편에서는 독립적인 대상들에, 각기 상응하는 병렬된 요소들로 분할한다. 그러나 우리가 원래 단일체로 직관했던 것을 그렇게 분할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분리된 항들을 연 걸 시켜야만 한다고 느끼게 되는데, 그래봐야 이 연결은 외적이고 덧붙여진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내적 연속체로부터 유래하는 생생한 단일성을 인공적인 단일성으로 대치하는데, 이 인공적인 단일성은 부동적인 항들을 텅 빈 틀로 묶어서 생기는 것이다. ... 즉 우리는 우리가 경험이라고 믿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외견상 그것을 구성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들 사이에 가능한 여러 가지 배열들을 시도하다가, 우리의 그 모든 구성이 지닌 취약성 앞에서 결국은 구성하기를 포기하는데 이른다. ... 그러나 마지막으로 시도해 볼만한 것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경험을 그것의 원천으로, 아니 오히려, 경험이 우리의 유용성이라는 방향으로 굴절되면서 고유하게 인간적인 경험이 되는, 그 결정적인 전환점 이전으로 찾으러 가는 것일지 모른다. -물질과 기억 p.203


 현대사회에서 세계를 바꾸는 거대한 이념이나 옳음은 점차 해체되어 다원화되어 간다. 이러한 다원화가 진행될수록 개인들은 서로에게 자신을 이해받기 위한 소통의 비용이 점차 증가한다. 소통의 비용증가는 피로함으로 이어지며, 개인들을 방치와 거부 그리고 부정을 선택하기 쉽게 만든다. 요즘 이러한 사회 속에서 구성원들의 화합과 조화를 추구하기 위해서 세계의 '지금, 여기'를 공유하고 있다는 공감의 필요성을 느낀다. 서로가 서로를 구성하게 해주는 매개자이자 창조자라는 감각을 우리는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생명의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이러한 공감의 시작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베르그송은 지속과 그것에 동참하는 생명들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상을 자신의 삶 속에 실천하듯이 담담하게 그가 남긴 마지막말은 내가 좋아하는 유언 중 하나이다. "여러분, 다섯 시입니다. 강의는 끝났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존재와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