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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bk Sep 09. 2024

나: 영감주머니 9

For all artist

모든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전하기 위한 토막글들을 기록해두고자 합니다.  

이름하여 영감주머니~

잘 부탁드립니다:)


1


 세상에 예술가라 칭해지길 바라는 자들이 너무 많다. 작품이라 불러지는 것도 너무나 많다. 이것들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땅히 예술가라 부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지는 의문이다. 내가 이러한 준비상태에 이야기하는 것이 누군가에겐 정말 웃긴 일이지만 말이다. 예술의 불명확성을 핑계 삼아 예술이란 것을 사업의 도구로만 취급하거나 자신의 행동의 정당화나 면피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나는 너무나 싫어한다. 그러니 의문이 든다. 여러분들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단지 신비감과 해방감에 의해서, 예술과 예술가란 기호를 얻기 위해 이것들을 바란다면 바라는 것을 얻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바라는 이유가 예술의 관조 이전에 타인에게 수용받거나 칭찬받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마냥 해로운 것은 아니지만, 이것들만을 토대로 자신의 작업을 수행한다면 그 작업에는 칭찬받고 싶어 하는 외로운 아이가 한 명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예술이라 부르는가? 자신이 밟고 있는 대지에 대한 저항과 의문이 없는 무조건적 수용을 예술이라 칭한다면, 세상에 예술이라 부르지 못할 것이 없고, 그것이 다른 것들과 구별될 수 없으므로 예술이란 것이 있을 이유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니 결국 그들 스스로가 자신이 원하고자 한 것을 없애고 있는 것이다. 작은 액세서리 하나만을 남기고서 말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을 양분하듯이 자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애매한 가름선 위에서 자신에게 끝없는 성찰과 저항밖에 요할 수 없다.


 그리고 관성에 의해서, 어릴 적부터 지속해 왔기에 예술이란 것이 자신에게 자명하게 체화되어 있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들 또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거스를 수 없는 세계 속에서 하나의 춤을 계속 추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다. 세계를 사는 모두가 각자 자신만의 춤을 추고 있으며, 그들이 단지 예술이라 부름 받는 춤을 추고 있기에 그들이 자신에게 예술이 체화되어 있다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춤과 타자의 춤을 구분 지을 의문과 저항이 없이 그들이 추는 춤의 기술의 숙련만을 논하고 있다면, 그들 스스로 예술이란 것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안락함이 남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 나는 의문 없는 예술은 없다 말할 수 있다. 또한 예술가의 의문이 단지 자신의 주관적 내밀함만으로 그것을 진부함에 저항하는 새로움이라 말한다면, 예술가는 그 의문과 작품이 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예술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주관에서 출발하며 다수의 주관을 염려하는 새로움을 조명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예술이라 말할 수 있으며 가치가 있다 말할 수 있다.


작업노트


<objet a> 2024, digital photography


 누워서 침 뱉기. 귀를 기울일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자.


2


 모두가 자기 자신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자신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을까. 나는 나에게 언제나 문제가 되는 무엇이다. 어떤 질문을 할 때든지, 어떠한 것을 인식할 때라든지 항상 그곳에는 나라는 자가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항상 묻는 자가 누구인지를 묻고 그자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물을 때만 있을 뿐, 묻고 나면 항상 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그자에 대한 그리움이나 잔여감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지만 계속 고개를 기웃거리게 되는 관성과도 같은 것으로 말이다. 그러니 그자가 누구인지 의문이 들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은 자들을 어리석다 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 잔여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그들은 이유 없이 기계적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릴 뿐이다. 


 결국 언제나 의문만이 남는다. 어째서에 대해서도 왜에 대해서도 마땅히 대답할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만일 자신이 그 묻는 자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책임감 없어 별로인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의문놀이를 즐기는 수밖에 없다. 정말이지 모든 게 알쏭달쏭이다. 어쩌겠나, 더 배우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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