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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bk Sep 20. 2024

나: 영감주머니 10

For all artist

모든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전하기 위한 토막글들을 기록해두고자 합니다.  

이름하여 영감주머니~

잘 부탁드립니다:)


1


 많은 이들이, 혹은 모든 이가 위로를 받고 싶어 한다. 많은 예술가들 또한 그러하다. 위로는 복합적인 인정받음이다. 결여, 동질감, 있음과 같은 것들의 인정, 누군가의 염려에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러한 것들을 타자에게 전달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정들은 위로를 주고자 하는 자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받아도 느낄 수 있는 것들일까, 우리는 위로를 받고자 하기 이전에 위로받을 대상을 먼저 고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비유를 통해 전해주듯이, 주인은 노예가 아닌 자와의 인정을 갈망하여 투쟁한다. 누구에게나 노예의 양태가 있으며 주인의 양태가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주인과 노예는 특정 대상을 의미하기보다는 하나의 대상의 여러 가지 내적 양태들에 가깝다. 돌아와서, 주인의 면모는 마땅히 인정받고 싶은 자의 인정을 바란다.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먼저 선취하고 있는 자라던지, 빛을 지고 있어 감사함을 느끼고 있는 자라던지, 혹은 자신이 모르는 무지의 영역에 서있는 자와 같이, 자신을 초월해 있어 진부하지 않음을 느낄 수 있는 자들에게서 우리는 인정받고 싶어 한다. 외재적인 것에서 내재적인 것을 인정받는 형식으로, 타자에서 느껴지는 이러한 양태들에 인정을 받을 때 우리는 위로받음을 느낀다.


 그러나 외재적인 것의, 즉 타자의 우월함에만 기대어서 위로를 갈구한다면, 그 바람에는 저항이 결여되어 있다. 이것이 모든 이에게 문제점이 되지는 않지만, 예술가에게는 다르다. 저항의식의 결여와 새로움의 창조 부재는 예술가 자신의 의의를 무색하게 만든다. 이러한 위로는 단지 스스로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위로를 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내재적 양태들의 끊임없는 운동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위로받고자 하는 내적 분열과 갈등에 대한 성찰과 인정 그리고 통합에 대한 의지, 이러한 운동에서 우리는 예술가의 진정성을 느낀다. 그리고 진정성이 선행되었을 때에만 비로소 그들이 원하는 타자의 인정과 위로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연유에서 필연적으로 그들은 고독하다.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그들의 고독을 존중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러한 존중에서 예술가들은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작업노트



X


 만든 후에 사유하지 말고, 만들기 전에 사유하자.


2


 우리들은 인격이다. 그리고 인격들을 존중하며 어쩌면 생명보다 더 우선시될 수도 있는 최상의 가치로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인격을 바라볼 수 없다. 인격들은 단순히 자신들이 무엇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차이를 통해서, 즉 부정성의 계기를 통해서 규정된다. 이러한 부정성은 생물을 무생물과 구별한다. 인격 안에서 부정성은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사유 지평의 상승을 이루게 해 준다. 인격들은 단지 느끼는 것도, 단지 생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유의 너머의 것 또한 사유한다. 즉, 인격들은 ‘있음 자체’에 관한 사유를 할 수 있다.


 인격들은 하나의 ‘내적차원’을 가진, 다시 말하자면 ‘체험하는’ 존재에 속한다. 체험 대신에 우리는 이것을 ‘정신적인 상태’ 라 표현할 수도 있다. 인격성은 존재가 ‘존재 일반’의 추상이 아니라 고정된 객관성의 전제를 넘어서는 지향, 즉 존재의 패러다임이다. 우리는 매번 자신이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즉 명확히 포착될 수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인격들로서 항상 어떤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반하여 하나의 역할극을 행하는 참여자임을 느낄 수 있을 뿐이. 개인의 정체성은 곧 그 유기체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하나의 유기체의 정체성이란 관점에서, 그 사람의 정체성은 항상 외부의 다른 것과의 차이에 의해 인지되어 확정된다. 그러나 이 같은 기초적인 생명체적인 경계에 바탕을 둔 정체성은 그저 정체성을 찾는 여정에서 정체성을 형성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몇 가지 단서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 인격 그 자체는 아니다. 인격은 이러한 자연적인 신체 기관의 산물이 아닐뿐더러, 이 생명체적 특징들로 인한 측면들은 인격의 최종적인 한계나 종착점이 아니다.


 인간은 상징을 통해 세계와 연결된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 해석된 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세계는 항상 더 해석될 여지가 있는 곳이다. 동물들 또한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세계에 살지만, 우리는 이것을 그들의 세계가 아니라 환경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동물들은 그 의미를 상대화시키는, 다시 말해서 그것을 특정한 의미로 반성하는 자기의식까지 그 의미를 끌어올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호화된들 것에서 기호화한 세계의 생성에 참여하는 존재로서 인격들로 드러난다. 그 때문에 인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보다 이러한 사물들의 기호들을 더 자유로운 방식으로 통제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이 우리가 인격임을 가능하게 한다.


 중립적이고 상호 주관적이며 통제 가능한 심리학적 실험에서는 주관적인 요소들이 실험 주관자의 의도에 의해 배제되기 때문에, 정확한 결과를 내기는 하지만, 한 인간이 실제로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말해주지 않는다. 한 인간의 인격은 그 깊이와 풍부함에 있어서 오직 그에 대한 어떤 것을 기꺼이 체험하는 사람에게만 해명된다. 그러므로 상상력이 풍부한 예술에서 나타나는 주관적인 상징의 세계는 실재를 숨길뿐만 아니라 동시에 실재를 드러내 준다. 예술은 실재를 어떻게 보고 듣고 이해하는가를 가르쳐 준다. 실재는 우리에게 있어서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는 항상 더 하거나 덜 한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 실재는 언제나 우리의 배후에서, 외부에서 비치는 풍부한 색채의 빛 속에 있거나, 어둠 속의 침묵에 숨겨진 채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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