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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bk Nov 09. 2024

기하학적 순서로 증명된 윤리학

Ethica,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

 

 인간은 어째서 자유를 추구하지 않고 예속상태에 머무르려 하는가? 스피노자가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스피노자의 대작『에티카』는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저술되었다. 『에티카』는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구조를 통한 분석을 하기 위해 유클리드의 가하학『원론』처럼 정의와 공리를 제시하고 이를 통해 논리적 명제들을 구축해 나가는 방식으로 쓰여있다. 이러한 서술방식이 낯섦을 느끼게 하여 이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기도 하지만, 이와 함께 그의 이성과 합리성에 관한 집요함과 신뢰 또한 느낄 수 있다.


 스피노자는 신이 순수하게 정신적인 존재라는 점을 거부한다. 그는 신 또한 물리적인 부분을 세계라는 방식으로 가지고 있다 설명한다. 즉, 신은 연장성을 지닌 물체임과 동시에 정신적인 관념이기도 하다. 스피노자는 주로 범신론자라 불린다. 그의 범신론으로부터 인간 또한 신의 일부라는 주장이 도출된다. 그에게는 신 또는 자연만이 독립적인 실체이며 인간은 무한한 실체인 신의 유한한 양태들이다. 이러한 입장은 인간을 개체성을 소유한 개별적 실체라 생각하는 현대의 상식과는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인간은 단지 전체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의 본성은 모든 경우에 있어 전체의 다른 부분들 그리고 전체의 본질적 특성을 표현하는 신 또는 자연의 법칙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점으로 볼 때, 그의 사유가 현대의 자연과학적 세계관과 크게 동떨어져 보이지는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정신과 육체는 동일한 어떤 것을 이해하거나 파악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간주된다. 인간은 정신으로 파악될 수 있으며 육체로도 파악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정신과 육체가 결코 상호작용을 주고받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육체는 관념들을 산출하지 않으며 관념들은 물리적인 물체에 어떤 변화도 일으킬 수 없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정신과 육체는 평행을 이루며 대응하는 관점인 것이다.


 인간은 물리적인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육체는 자연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육체는 주변에 있는 다른 대상들과 계속 접촉하며 대상들 중 일부는 육체가 어떤 방식으로 운동하는 원인이 되는데 이는 육체의 운동 자체가 주변에 있는 다른 대상들의 운동의 원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모든 활동들은 엄격하게 인과성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여기에 정신과 육체가 어떤 상호작용도 주고받을 수 없다는 주장을 더하면 결국 인간의 육체는 전적으로 자연과 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근데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는 어디에 있는가? 스피노자는 자유가 인과적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 의미한다면 그러한 자유는 어디에서도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육체의 활동은 자연에서 작용하는 물리적 힘들의 필연적 결과이다. 자주 인간은 이러한 힘들에 의해 좌우되며 이런 힘들의 결과로 형성된 인간의 욕구와 욕망은 인간을 운동하게 한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일상에서 우리가 어떤 결단을 내릴 수 있으므로 최소한 제한적으로라도 우리의 육체를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우리가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위를 할 때 이러한 조절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스피노자는 자유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는 대부분의 자유가 “자유가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잘 이해하였을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자유에 대한 통속적인 개념, 즉 자유의지를 발휘하는 것으로서의 자유는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이보다 더욱 깊은 의미에서의 자유가 존재하며 우리는 그러한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 『에티카』는 자유의 본성을 밝히고, 자유에 도달하는 방법을 보이기 위하여 쓰인 것이다. 『에티카』의 목표는 우리가 정념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자기 결정을 하는,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길을 제시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론은 우리가 오직 신의 명령에 따라서만 행위하며 신의 본성을 나누어 지닌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행위가 완전하면 할수록 신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이 이론은 우리에게 완벽한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최고의 행복 또는 지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 즉 그것은 오직 신을 인식하는 데서 성립하여 이를 통하여 우리는 사랑과 도덕성이 요구하는 것 만을 행하도록 인도한다."


-정서


 스피노자는 정서도 자연 안의 다른 모든 것들을 파악하는 방법과 완전히 동일한 방법으로, 즉 “보편적인 자연법칙들과 규칙을 통해서” 파악되어야 한다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연법칙은 “항상 어디서나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증오, 분노, 질투 등과 같은 정서는 … 그 자체로만 고려될 경우에는 다른 개별적인 것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필연성과 힘으로부터 생겨난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이 때문에 는 정서를 선과 면, 입체 등과 동일한 방식으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피노자는 정서를 “육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육체의 변화 상태 그리고 동시에 그런 변화 상태의 관념”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변화 상태란 스피노자에 있어 육체 또는 정신의 모든 변형태(구체적으로 규정된 것)를 의미한다.


 스피노자는 이어서 다소간 모호하게 정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이러한 변화 상태의 타당한 원인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이때의 정서를 능동으로 이해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수동으로 이해한다” 즉 스피노자에게 정서는 능종과 수동,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진다. 어떤 구체적인 정서가 능동에 속하는지 아니면 수동에 속하는지는 그 정서를 가지고 있는 개인이 그것과 어떤 인과적 관계를 맺는가에, 즉 이 개인이 그 정서의 타당한 원인인가 아니면 타당하지 않은 원인인가에 의존한다. 여기서 타당한 원인이란 “어떤 원인을 통하여 그것의 결과가 명석하고 판명하게 지각될 수 있을 때 그 원인은 타당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타당하지 않은 원인은 그것의 결과가 원인 자체만을 통해서는 파악될 수 없는 원인을 의미한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스피노자는 타당한 관념의 개념을 연결시킨다. “우리의 정신은 어떤 작용을 하기도 하지만 또한 작용을 받기도 한다. 즉 정신이 타당한 관념을 지니는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작용을 하지만 타당하지 않은 관념을 지니는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작용을 받는다”. 타당한 관념은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이어야 하며 따라서 참인 관념이다. 이것은 또한 자신들과 대응 관계를 이루는 육체적 정서를 설명해 주는 관념들이기도 하다. 내가 타당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이 관념은 내가 가지고 있는 다른 관념들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될 수 있다.


 즉, 내가 나의 감정들을 파악하고 있다면 그것들은 능동적이라는 점과 그러한 감정들은 나의 활동 능력, 나의 에너지 또는 활력을 증가시킨다는 점이 도출된다. 나의 육체적 정서가 어떻게 자연법칙에 따라서 다른 대상들로부터 발생하는지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이때 나의 정서는 수동적인 정념이 된다. 이러한 무지의 결과로써 나의 활동 능력은 감소하게 된다. 즉, “정신은 타당하지 않은 관념들을 많이 지니면 지닐수록 더 많이 정념에 얽매이게 되고, 반대로 타당한 관념을 많이 지니면 지닐수록 더욱 능동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타당한 관념은 신의 기본적인 본성으로 필연적으로 도출된 것임으로, 이러한 관념은 신에게 있어서도 타당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타당하지 않은 관념을 지니고 있다면 이것은 신의 기본적인 본성으로 도출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정서가 필연적으로 신의 본성에 도출되는 한에서만 능동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즉 인간은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그리고 신(또는 자연)의 본성 자체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다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을 행할 때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필연적으로 작용하 돌고 만드는 원인들을 파악하는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수동적으로 이러한 원인의 희생물이 되고 만다. 반면에 우리가 이런 원인들을 파악한다면 우리는 능동적으로 작용하게 되며 따라서 우리는 자유롭다.


-코나투스


 “각자는 자신의 능력을 통하여 할 수 있는 한에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노력한다” 모든 자연적 존재는 코나투스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자기 보존 또는 자기 지속의 노력이며 자신을 계속 살아있는 존재로 유지하고 자신의 본질을 계속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따라서 자연은 동적이며 자연 안의 어떤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실현하고 자신의 특정한 형태를 유지하려는 그것의 노력을 파악해야만 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노력이 오직 정서와 관련될 때 이를 의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노력이 정신과 육체 모두와 관련될 때 그것은 욕망이라고 불린다 … (이러한 욕망은) 바로 인간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욕망의 본성으로부터 자신을 보존하여야 한다는 것 등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라고 결론짓는다. 욕망은 자신을 다른 것과 구별되는 특징적인 존재로 만들고 이를 유지하려 하는 충동 또는 코나투스이다. 우리가 이런 욕망을 의식할 때 그것은 욕구라고 불리게 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의 욕망과 욕구는 우리가 사물들에 대하여 가치평가를 하는 근원이 된다. 가치란 우리의 욕구와 의욕 작용과는 무관하게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생겨나게 되는 것이라 한다. 그는 “우리는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고, 의욕하고, 원하고, 욕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와는 정 반대로 우리가 그것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고, 의욕하고, 원하고, 욕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스피노자는 욕구와 기쁨, 슬픔을 세 가지 기본 정서이며 다른 모든 정서는 이들 셋의 변형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기 보존을 신장시킨다고 인식되는 것을 사랑하며 자기 보존을 위협한다고 생각되는 것을 증오한다. 이것이 스피노자 심리학의 기본 원리이다. 즉, “우리는 우리가 기쁨을 산출하리라고 표상하는 모든 것들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슬픔을 산출하리라고 표상하는 모든 것들을 멀리하고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 그리고 이로부터 생겨나는 여러 가치들이 상대적임을 지적한다. 그래서 “따라서 한 개인의 본성 또는 본질이 다른 개인의 본질과 다른 것만큼이나 각 개인의 욕구도 다른 사람의 욕구와는 서로 다르다”라고 한다. 이로부터 우리의 가치가 때때로 충돌을 일으킨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정서뿐만 아니라 판단에 있어서도 다를 수 있다는 점이 도출된다. 스피노자는 이를 통해 도덕적 가치와 관련해서 사람들과 각각의 문화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커다란 차이점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의 정서에 관한 언급과, 타당한 관념과 타당하지 않은 관념에 대한 주장과 연결시킨다. “정신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활동 능력을 파악할 때 기쁨을 느낀다. … 그러나 정신은 참이거나 또는 타당한 관념을 파악할 때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고찰한다. … [더욱이] 정신은 어떤 타당한 관념을 파악한다. … 따라서 정신은 스스로 타당한 관념을 파악하는 한, 즉, … 활동하는 한 기쁨을 느끼게 된다”. 즉, 우리의 코나투스의 충족은 우리가 스스로 타당한 관념을 얻는 정도에 따라서 성취된다.


 스피노자는 (1)”정념(수동적인 감정)들을 경험하며 자신의 감정에 대한 타당한 관념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감정들의 타당한 원인을 알지 못하고 결국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이 좌절됨을 인식하여 슬픔을 경험하는 사람의 모습”과, (2)”감정들이 능동적이고 관념들이 참이어서 자신의 육체 및 정신육체와 자연과의 관계의 진정한 본성을 반영하며 또한 자기 자신이 감정들의 타당한 원인이 되며 이를 통하여 자신의 진정한 본성에 따라 행위하는, 그리고 자신의 특징적인 존재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지지되고 신장되기 때문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의 모습”을 비교하며 제시한다. 그는 자유의 본성과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기 위해선 후자의(2) 모습을 선택하여야 한다 주장한다.


-예속


『에티카』 4부에서는 예속에 대한 정의로부터 논의가 시작된다. “인간이 자신의 정서를 조절하고 통제하는 능력이 없는 상태를 나는 예속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인간은 외부적 원인들의 상당한 영향을 받으며, 이러한 영향들은 어떤 점에서는 인간 스스로를 파괴하도록 만든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를 지속시키는 힘은 제한되어 있으며 또한 외부적 원인들의 힘에 의해서 무한히 압도당한다” 고 한다. 인간은 운명적인 조건들 때문에 자신의 행위 전부를 오직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도출된 것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따라서 오직 자기 자신만이 타당한 원인이 되는 변화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즉 인간은 항상 필연적으로 정념에 예속되며 자연의 보편적 질서에 따르고 그것에 복종하며 사물의 본성이 요구하는 대로 자신을 그것에 적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라며 결론을 내린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성은 자연에 반대되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가능한 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도록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수많은 도덕주의자들은 도덕성이 우리에게 자신의 자기 이익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주장했지만 스피노자는 이런 생각을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도독성은 한 개인에게 이익이 되는 행위들을 증진시키며 행위자에게 유용한 것이다. 이성은 우리에게 덕을 지닐 것을 요구하는데, 스피노자에게 덕이란 “자기 자신의 본성의 법칙으로부터 행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이기주의적인 이론을 택하고 있다 볼 수도 있지만, 그는 모든 사람이 자신 만의 이익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그에 따르면 이성적인 자기 이익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이익을 증진시키며 또한 이러한 공통적 이익에 도달하기 위한 협력의 행위도 증진시킨다. 자신의 자기 이익을 이성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동시에 공정하고 성실하며 정직한 사람이다.


 스피노자에게 덕은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는 능력과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덕의 기초는 인간의 기본적인 코나투스, 즉 자신을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외부적 원인이 덕을 갖추려는 우리의 노력을 방해하도록 허용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도덕적 행위에 실패할 것이다. 이는 타당한 관념을 가진 사람은 정념이나 외부적 원인에 의해 강요당하지 않고 스스로 행위한다는 점과 이어진다. 따라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타당한 관념을 가지기 위해, 즉 올바른 의식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이러한 사유로 코나투스는 인식을 향한 노력과 연결되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노력은 곧 세계와 그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인식하려는 노력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 이론은 우리의 운명과 관련된 문제 또는 우리의 능력 안에 있지 않은 것, 즉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생겨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만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즉 우리는 좋은 운명과 나쁜 운명 모두를 태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인내하여만 한다. 왜냐하면 삼각형의 본질로부터 세 각의 합은 직각의 두 배와 같다는 점이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신의 영원한 결정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연)에 대한 인식


 스피노자는 궁극적 목표로 인식을 강조한다. 그는 “신에 대한 인식은 정신의 최고의 선이며, 정신의 최고의 덕은 신을 인식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따라서 덕이 있는 삶이 이성에 따라서 사는 삶이라면, “덕을 추구하는 자들의 최고의 선은 신을 인식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 최고선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욕구와 다른 사람의 욕구가 서로 공존할 수 있게 한다. “덕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초기선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그것을 누릴 수 있다”.


 정서에 의해 지배되는 삶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우리의 삶이 우리가 욕구하는 외적인 것들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점이다. 이런 경우 우리의 삶은 자신의 본성에 의해, 즉 이서에 의해서 인도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외부의 세계가 우리의 삶을 교묘하게 조종하게 된다. 이런 때에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선택은 정념으로부터 생겨난 행위(외부적 원인을 지니고 있는 행위)와 이성으로부터 생겨난 행위(내부적 요인을 지니고 있는 행위) 사이의 선택이 된다. 이성적인 인간이 이성에 따라서 행위하는 한 그리고 그것이 본질적인 특성인 한, 그 자신이 자신의 행위의 타당한 원인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타당한 관념을 드러내게 되어 이러한 행위는 능동적인 감정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는 점이 도출된다.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이성적인 삶은 많은 도덕자들이 추천하는, 특히 기독교적인 신념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삶과는 크게 다르다. 그의 이성적인 삶은 희망이 없고, 공포가 없고, 도덕적 비난이 없으며, 과도한 사랑도 없고 겸손도 없는 삶이다. 스피노자는 자기만족을 자신의 인격이 존재하며 이것이 실현됨을 느끼는 삶을 사는 것이라 생각하며 이것이 진정한 최고선이라 한다.


 만물을 신의 본성으로 필연적으로 생겨난 것으로 인식하는 것 또는 자연의 법칙의 필연적 결과로 인식하는 것은,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을 “영원의 상” 아래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는 만물을 우연적인 것으로 보며 또한 시간상의 것으로 본다. 우리는 그것들이 발생할지 발생하지 않을지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이 때문에 그것들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녀 또한 그것들이 일어나기를 희망하게 된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러한 희망과 공포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위와 반대로 사건들을 자연의 영원한 법칙의 결과로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건이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것임을 파악할 수 있으므로 사건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은 희망과 공포를 제거해 준다. 또한 이러한 인식은 현재의 사건에 더욱 큰 가치를 부여하는 일반적인 관행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다. 스피노자는 “이성에 인도에 따라서 우리는 더 작은 현재의 선보다는 더욱 큰 미래의 선을, 그리고 더 큰 미래의 악보다는 더 작은 현재의 악을 욕구하게 한다” 말한다.


 스피노자는 노예와 자유인을 구별한다. 자유인은 인식 또는 이성에 따라서 행위한다. 이들은 자신의 본성, 즉 이성에 기초하여 자신의 삶을 이끌어 나간다. 또한 이들은 자신이 한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며 어떤 종류의 기만도 피하려고 노력한다. 스피노자는 “만일 자유인이, 스스로를 자유로운 한에서, 모든 일을 기만적으로 행하려고 한다면 그는 이성의 명령에 따라 그렇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만적으로 행위하는 것이 곧 덕이 될 것이다. … 따라서 … 기만적으로 행위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충고하여야만 할 것이다. 즉, 사람들에게 오직 말로만 일관되게 하고 실제로는 말과 상반되게 행위하라는 충고를 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는 부당한 것이다. …”라고 한다. 이성은 모든 사람에게 선한 것을 의욕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성이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한 기만을 요구할 수는 없다.


 스피노자는 자유인이 매우 강건한 본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을 거듭해서 강조한다. 자유인은 자신의 정서를 조절할 줄 알며 어떤 정서가 과도하게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신의 본성으로부터 생겨난다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하는 여러 행위들이 고의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필연적인 체계의의 일부임을 알게 된다. 이를 깨닫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멸, 비난, 증오의 태도는 사라지게 된다. 그에게 삶의 비밀의 푸는 열쇠는 타당한 관념에 도달하는 것이며, 이러한 이성의 인식은 모든 것의 원인이 신 또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필연적임을 보여준다.


 스피노자는 외부적 원인에 의해서 영향받고 규정당하는 것, 즉 노예가 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되며 자기 자신의 본성에 따라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은 단지 유한한 양태이기 때문에 자연의 인과적 질서에 포함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역설은 스피노자는 인간이 이러한 역설을 무한 실체의 유한한 양태이기 때문에 해결할 수 있다 생각했다. 우리가 외부적이라 생각했던 요인들은 무한 실체의 또 다른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들의 작용 또한 신 또는 자연의 법칙, 즉 이성의 법칙의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이성은 우리 자신의 본질이며 이것은 우리가 속해 있는 세계의 본질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이해하면 우리를 혼란에서 탈출시켜 주며, 세계가 이성적인 세계에서 이성적인 법칙들에 따라서 수행된다는 확신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인간은 수동성보단 능동성을 느끼며 자유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이론은 다음과 같은 점들에서 사회생활에 기여한다. 즉 이 이론은 우리가 어느 누구도 증오하지 않고 경멸하거나 조롱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분노하거나 시기하지 않도록 가르쳐 준다. 또한 이 이론은 각자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에 만족하여야 한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이웃들에 대해서 여성적인 동정심이나 편파성 또는 미신 에서가 아니라 오직 이성의 인도에 의해서 기간과 사정이 허락하는 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준다."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


 스피노자는 진정한 자유를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과 동일시한다. 그는 『에티카』 5부에서 정신은 자신의 본질적인 특성과 함께 영원히 유지되며 육체와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한다. 그는 “정신은 육체의 모든 변화 또는 사물들의 표상을 신의 관념과 관련시킬 수 있다”라고 하며, 그리고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서를 명석, 판명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신을 사랑하게 되며,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서를 더 많이 파악하면 할수록 신을 더욱더 사랑하게 된다”라고 한다. 우리가 자신의 정서가 신(자연)의 영원한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 것임을 파악한다면 우리는 정서의 원인이 신(자연) 임을 깨닫게 되는데 이는 결국 우리가 신을 사랑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개별적인 사물들을 더 많이 파악하면 할수록 우리는 신을 더 많이 인식한다”. 스피노자는 사물의 본질적인 특성, 즉 신의 속성 중 하나인 연장성을 파악함으로써 개별적인 사물들의 속성을 이끌어 낼 수 있다 한다. 이러한 인식은 스피노자가 근대 과학에서 발견된다 생각하였던, 물체를 ‘영원의 상 아래에서’ 파악하는 인식이다. 우리가 사물을 영원한 법칙의 한 예로 파악하듯이, 우리 자신의 정신과 육체도 이러한 방식으로 파악하게 되면 우리의 정신과 육체도 신의 본질이 전개된 것들의 일부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신을 영원하다고 인식하는 한에서 필연적으로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이 생겨난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으로부터 “우리의 구원 또는 행복 또는 자유가” 생겨난다 결론짓는다.


"마지막으로 이 이론은 국가 공동체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한다. 왜냐하면 이 이론은 시민들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지를, 즉 시민들을 노예처럼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유롭게 최선을 다하도록 인도하여야 함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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