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hica,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
우리는 끊임없이 자유에 대해 말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리고 조금 더 깊이 고찰하면, 인간은 오히려 자신의 자유를 외면하고 어떤 힘에 기대고 싶어 하며, 자신을 구성하는 정서와 충동과 욕망에 기꺼이 끌려다니는 존재라 느껴지기도 한다. 스피노자는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의문을 던진다. 인간은 왜 스스로를 예속 상태에 놓아두려 하는가? 왜 스스로의 삶을 타인과 외부의 원인들에 내맡기며, 그것이 삶의 전부인 양 받아들이는가? 스피노자는 이러한 질문에 파고들어 이성적 해답을 찾기 위해 그의 대작『에티카』를 저술하였다. 『에티카』는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을 제시하기 위해, 유클리드의 『원론』처럼 정의와 공리를 제시하고 거기서 논리적 명제를 하나씩 도출해 나가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유를 설명한다. 이러한 서술방식이 낯섦을 느끼게 하여 이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서술방식으로부터 우리는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이성과 필연적 질서를 신뢰했는지를 알 수 있다. 스피노자의 사유는 철저하게 인간의 삶과 감정 그리고 정신의 상태를 '자연'의 법칙 속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그의『에티카』는 우리 삶의 우연성과 혼란을 필연과 함께 융화시켜 이 세계에 다시 구성해 내려는 시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스피노자는 신이 순수하게 정신적인 존재라는 점을 거부한다. 그는 신을 세계 자체, 즉 자연과 동일시한다. 그에게 신은 연장(물질)과 사유(정신)를 동시에 가지는 무한한 실체로서, 모든 존재의 내적 근거이자 외적 구성이다. 신은 자연과 자연을 이루는 법칙 그 자체이며, 세계의 모든 것은 이 신의 속성과 양태로서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인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인간은 더 이상 독립된 개별 실체가 아니라, 신 또는 자연의 무한한 존재로부터 파생된 하나의 유한한 방식이다. 이 말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모든 조건과 사건, 심지어 감정과 생각마저도 신의 필연적 전개 안에 포함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처럼 세계가 필연적 법칙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면, 인간의 자유는 어디에 있는가? 스피노자는 우리가 자유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진단한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우리가 결정한다고 믿지만, 사실 우리는 그 결정의 진짜 원인을 모른 채 살아간다.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것, 그것이 내 선택이라 착각하지만 실은 외부에서 작용하는 힘들이 우리의 내면을 통과해 생겨난 인과적 결과에 불과하다. 이러한 무지는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든다. 스피노자는 이 상태를 '예속'이라 부른다. 예속이란, 정서를 통제하지 못하고 외부 원인에 따라 반응하기만 하는 상태다.
그렇다면 자유란 뭘까?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유란 단순히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상태나 능력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자유란 "오직 자기 자신의 본성에 따라 존재하고 작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외부적 원인에 따라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닌 내재적인 원인에 따라 능동적으로 행위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정서와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으며, 그 정서와 욕망의 원인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무지 속에서 떠밀려 간다. 스피노자는 이 상태를 ‘예속’이라 부른다. 인간은 자신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에 대한 타당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에 의해 휘둘리는 존재가 된다.
"... 우리가 오직 신의 명령에 따라서만 행위하며 신의 본성을 나누어 지닌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행위가 완전하면 할수록 신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이 이론은 우리에게 완벽한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최고의 행복 또는 지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 즉 그것은 오직 신을 인식하는 데서 성립하여 이를 통하여 우리는 사랑과 도덕성이 요구하는 것 만을 행하도록 인도한다."
스피노자의 사유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세계가 필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은 또 다른 원인으로부터 도출된다. 이 인과적 사슬 속에서 우연은 없다. 신 또는 자연은 무한한 실체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신의 필연적 표현이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은 신 또는 자연의 무한한 속성들 가운데 연장(물질)과 사유(정신)라는 두 속성의 유한한 양태에 불과하다. 우리가 갖는 정신과 육체, 생각과 감정, 의지와 욕망 모두는 신의 표현이며, 이 세계의 질서 안에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정신과 육체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는 달리, 정신과 육체는 동일한 실재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정신은 육체의 관념이며, 육체의 변화는 정신의 관념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인과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주거나, 육체가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다. 이 둘은 서로 평행하게 작용하며, 동일한 실재의 서로 다른 양상으로서 병행적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인간의 감정, 즉 정서(affectus)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스피노자는 정서를 단순히 주관적인 감정 상태가 아니라, 육체의 활동 능력이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상태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외부 사물과 접촉하면서 다양한 정서를 경험하고, 이 정서는 동시에 정신 속의 관념으로 나타난다. 이때 그 정서의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고, 내가 그것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그 정서를 능동적으로 갖는 것이다. 반면 그 정서가 외부의 원인에 의해 형성되었고, 내가 그것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나는 수동적으로 정서를 갖는 것이며, 정념(passio)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수동적 정념 속에서 살아간다고 본다. 사랑, 증오, 질투, 분노, 두려움, 욕망 등은 대부분 외부 원인의 작용에 따른 수동적 반응이다. 우리는 자신이 왜 특정한 감정을 느끼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그 감정에 휘둘리며 살아간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예속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 제4부에서 인간의 삶이 필연적으로 이러한 정념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정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모색한다.
그가 제시하는 정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자연과 그것을 이루는 법칙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가 어떤 정서를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외적 원인에 의해 발생했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정서를 더 이상 수동적으로 경험하지 않게 된다. 이때 우리는 그 정서를 ‘타당한 관념(idea adequata)’으로 이해하게 되며, 그 관념은 우리의 정신을 능동적인 상태로 이끈다. 타당한 관념이란 그 원인과 결과를 명석하고 판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관념이다. 내가 어떤 욕망을 갖고 있고 그 욕망이 어떤 원인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 나는 그 욕망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자유가 사유를 통한 자기 인식의 실현임을 말해준다.
"... 우리의 운명과 관련된 문제 또는 우리의 능력 안에 있지 않은 것, 즉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생겨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만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즉 우리는 좋은 운명과 나쁜 운명 모두를 태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인내하여만 한다. 왜냐하면 삼각형의 본질로부터 세 각의 합은 직각의 두 배와 같다는 점이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신의 영원한 결정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인식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가지고 있다. 이를 코나투스(conatus)라고 부른다. 코나투스는 단순히 생물학적 생존 본능이 아니라, 존재가 자신의 본성을 유지하고 실현하려는 근원적인 노력이다. 인간의 코나투스는 정신과 육체 모두에서 작동하며, 이것이 의식 속에 나타날 때 우리는 그것을 욕망(cupiditas)이라 부른다. 우리가 무언가를 ‘선’하다고 판단하는 이유는, 그 사물이 우리 자신의 코나투스를 강화시킨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것이 선하기 때문에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욕망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스피노자는 전통적 윤리학의 이원론을 무너뜨린다. 도덕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성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이러한 자기 보존의 노력은 곧 덕(virtus)으로 연결된다. 스피노자에게 덕이란 외부의 도덕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 덕은 이성에 의해서 실현된다. 이성은 인간에게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게 하고, 타인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인도한다. 자유로운 인간은 타인을 속이지 않으며, 약속을 지키고, 타인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는 다른 이의 악의도 필연적 인과의 일부로 이해하며, 미움이나 복수심을 품지 않는다. 그는 세상을 ‘영원의 상’ 아래에서 바라본다. 즉, 그는 모든 존재를 시간 속의 우연이 아니라, 영원한 질서의 필연적 결과로 인식한다.
"이 이론은 우리가 어느 누구도 증오하지 않고 경멸하거나 조롱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분노하거나 시기하지 않도록 가르쳐 준다. 또한 이 이론은 각자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에 만족하여야 한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이웃들에 대해서 여성적인 동정심이나 편파성 또는 미신 에서가 아니라 오직 이성의 인도에 의해서 기간과 사정이 허락하는 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준다."
이러한 인식은 결국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amor dei intellectualis)’으로 귀결된다. 신은 곧 자연이며, 이성의 법칙이며, 모든 존재의 원인이며 목적이다. 인간이 자신의 정서를 명석하고 판명하게 인식할수록, 그는 신의 본성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고, 그만큼 신을 사랑하게 된다 말한다. 이러한 사랑은 감정이기보다는 인식이며, 자유의 궁극적 형태이다. 우리는 개별 사물들의 필연적 질서를 통해 신을 인식하고, 그 신을 사랑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게 된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구원이자 행복이며, 진정한 자유이다.
스피노자의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이 현대의 자연과학적 탐구와 크게 동떨어져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스피노자의 물음처럼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이끌고 있을까, 아니면 외부의 힘에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우리는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믿으며 일상을 보내지만, 동시에 많은 이들이 정념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처럼 느낀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우리가 우리의 정서를 이해하고, 그 원인을 인식하고,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외부에 예속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고찰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