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 Soomin: Where my feelings stay
서문: 내 감정이 머무는 곳
감정은 이름조차 붙기 전에 우리 곁을 스쳐 간다. 설명할 수 없는 긴장, 순간의 떨림, 감추고 싶은 물렁함, 잊혔다가 되살아나는 기묘한 감정들은 오래 머무르지 않고, 붙잡히려는 순간 이미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다. 감정은 주관적인 내면의 고정된 실체(혹은, 그것의 수동성)가 아니라, 흐르며 흩어지고 관계 속에서 잠시 드러나는 사건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감정을 새로운 질서 속에서 경험한다. 디지털 플랫폼은 감정을 수치로 변환하고,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하며, 자본의 회로 속에서 분류·소진시킨다. 우리는 ‘좋아요’의 개수, 이모지의 빈도, 조회수의 상승 같은 지표로 감정을 주고받는다. 감정은 더 이상 내밀한 체험으로만 머물지 않고 교환 가능한 단위로 다루어진다. 이 단위들을 위해 플랫폼은 우리에게 인지적 자원을 소모하게 하는 일종의 (감정)노동을 요구한다. 그러나 감정은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것이다. 사라졌다가 돌아오며, 흐르면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감정의 운동은 끊임없이 규격화의 질서 바깥으로 이탈한다.
《내 감정이 머무는 곳》은 바로 이 지점을 탐구한다. 전시는 감정을 특정한 메시지로 재현하지 않는다. 대신 감정이 생성되고 소멸하며 잔여와 여운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매체적 실험을 통해 보여준다. 여기서 감정은 의미나 상징이 아니라, 흐름과 운동의 차원에서 다시 사유된다. 우리는 이곳에서 감정을 ‘마주함’과 동시에 체계를 ‘이해’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감정을 통제하거나 이해하지 않는다. 감정은 하나의 소유물이 아니라, 관객과 공간, 시간과 세계가 교차하는 순간마다 새롭게 발생한다. 감정은 재현 가능한 형상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매번 달라지는 ‘지금, 여기’이다. 따라서 이 전시가 제시하는 감정은 단일한 원자(실체)가 아니다. 감정은 흔들리고, 언제나 미완이며, 다른 것들과 얽히며 변화한다. 감정은 나의 것이면서 동시에 나를 넘어서서 있—존재하—는 것이고, 개인의 경험이면서 동시에 세계와 공명하는 리듬이다.
따라서 우리는 ‘내 감정이 고이는 곳’이 아니라 ‘내 감정이 머무는 곳’이다. 감정은 내 앞에 남겨진 흔적일 뿐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순간적으로 그 연결됨이 드러나는 운동이다. 이 전시는 감정을 다시금 세계와 우리를 매개하는 사건으로 사유하게 한다. 그리고 그 순간, 감정은 데이터나 기호가 아니라, ‘세계 그 자체’를 감각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러하듯 문수민의 작업은 예술적 실험을 통해 감정이 가진 불완전성과 그 구조를 드러냄으로써 감정을 미학적 사유의 장으로 불러낸다.
평론: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감정은 더 이상 순수하게 개인의 것이 아니라 느껴진다. 우리가 매일 주고받으며 표현하는 감정은 점차 수치화 되어 하나의 노동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수학·기하학적 인식에 기초한 기술은 우리의 일상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기술은 대상을 도구화 가능한 자원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세계를 구성한다.[1] 이때의 대상은 인간의 감정도 예외가 아니다. 감정은 이제 일상적 경험속에서 주된 플랫폼이 된 SNS의 반응(예: 조회수와 이모지 그리고 ‘좋아요’)을 통해 알고리즘의 데이터베이스 속에서 수치로 환원되고, 재분류되며, 자본의 구조 속으로 은밀히 소진된다. 여기서 감정은 개인의 고유한 체험이 아니라, 소비 가능한 정보 단위로 전환되어 다루어진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 전환은 매 순간 이탈되는 것들을 남긴다. 감정은 언제나 완전히 붙잡히지 않는 것이며, 요동치고 사라지며 그 울림의 흔적만을 관계속에서 남기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 《내 감정이 머무는 곳》은 감정을 흐름과 운동(힘)의 차원에서 사유하게 한다. 문수민의 작업은 감정이 소유되지 않는 차원에서 어떻게 머무르고 흩어지는지를 탐구한다. 작가의 작업은 감정을 다루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서술하거나 해석하지 않는다. 작가는 감정이 어떻게 생성되고, 사라지며, 흔적으로 남는지에 대한 체계(system)에 집중한다. 이 전시에서 기록되는 것은 감정의 내용이 아니다. 작가의 작업에서 이것들은 언제나 삭제되고, 환원되며, 흘러가 버린다. 그 대신 이를 통해 감정이 드러나는 방식—형식적 장치를 통한 매체의 구조, 전략—이 가시화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잠깐, 당신의 이야기를 빌려주세요〉는 감정이 소유될 수 없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관객의 응답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삭제되고, 화면에는 ‘404 Not Found’라는 메시지만 남는다. 이 장치는 감정을 고정된 데이터로 저장하지 않음으로써, 사라짐과 흔적의 과정—일종의 노동—을 직접 체험하게 한다. 현대 기술이 플랫폼을 통해 대상을 자원으로 환원하는 질서를 전제한다면, 이 작업은 노동의 가시화를 통해 이전의 —개인의 인지적 자원을 소모시키는—노동들을 환기시키며, 감정을 그 질서 바깥에서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우리는 감정이 우리 자신의 행위에 뒤따르는 정신의 운동임을 깨닫고, 그것이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함께 공명하는 울림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어서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에 답변한 후, 점(dot)의 색에 따른 운동성만이 최소한의 상태 값으로 남아있는 세계, <Fractal Archive: Emotional Constellations>를 목격할 수 있다. 내용과 그 원인을 알 수 없어진, 감정의 흔적들 만이 남아 느슨한 관계를 맺는 이 세계는 비인과적이다. 본래 세계는 원인과 결과의 연쇄로 완전히 설명될 수 없다.[2] 유한한 인간의 인식은 오직 제한적인 연관과 남아있는 흔적, 그리고 이것들을 통한 운동성만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해석과 분류를 벗어나는—한계를 넘어 사유되는 비인과적 세계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세계 그 자체’의 차원을 드러내려는 하나의 시도가 될 수 있다. 감정은 특정한 원인에서 기계적으로 발생하거나 일정한 결과로 수렴하지 않으며, 만일 이것의 원인을 끝없이 소급할 수 있다면 그것은 결국 세계 그 자체(전체, 혹은 일자)가 될 것이다. 따라서 감정은 더 이상 해석 가능한 데이터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드러났다 사라지는 존재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현전한다. 그 앞에서 우리는 감정을 소유하거나 조작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라, 세계의 파동을 매개하며 잠시 공명하는 존재(자)가 된다. 세계와 우리의 공명은 조율되지 않은 듯하면서도 분명 관계를 나누고 있으며, 이것은 열린(비완결적인) 지평의 생태계를 구성한다.
〈구름 모뉴먼트〉는 이러한 사유를 다시금 물질적 차원으로 우리들의 앞에 가시화한다. 투명한 챔버 속에서 잠시 생성되었다가 흩어지는 구름은, 감정이 갖는 일의적 성격과 소유 불가능성을 시각화 한다. 이것은 하나의 추모 행위를 통해, 사라져가는 자연을 기리는 동시에 우리 내면의 감정이 어떻게 흔적만을 남기고 흘러가는지에 대한 여운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 흘러냄을 통해 소유에서의 해방감을 느낀다. 이 사라지는 구름을 응시하면서, 감정이 순간 속에서만 드러나는 나의 상태 변화(운동)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곁을 에워싸는 〈레조넌스〉는 감정의 파동을 시각과 청각의 층위에서 다시 불러낸다. 싱잉볼의 진동과 영상 속 안개의 흐름은 감정을 하나의 정보가 아니라 울림과 떨림을 통한 상태 변화로서 경험하게 한다. 감정은 이때 언어적 의미로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몸을 관통하는 물결처럼 흘러가며, 신체와 공간 전체의 조화를 일으킨다. 이는 감정을 다시금 세계와의 관계를 통한 구조적 차원으로 열어젖히는 장치이다. 나아가 감정은 개인적 체험에 한정되지 않고, 세계와 집단 속에서 공명하는 사건으로 확장된다.
〈I’m the World〉는 감정을 시각적 인식의 틀과 연관시켜 사유하게 한다. 이 작업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시야는 모든 것을 조망하는 지배자의 시선이 아니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전체의 부분을 마주하는 만남의 시선이다. 근대적 원근법은 세계를 하나의 통합된 시점으로 수렴시키며, 근대적 주체—즉 인식의 중심에 선 자율적이고 확실성을 지닌 ‘나’—를 전제하는 시각 체계였다. 이러한 체계는 세계를 대상화하고 통제 가능한 질서로 배치함으로써, 인간 주체를 모든 인식의 기점이자 중심으로 확립하였다.[3] 그러나 〈I’m the World〉에서의 화면은 그러한 중심 시선을 해체하고, 파편화된 시선들이 서로 교차하며, 주체와 세계가 상호적으로 흔들리는 불안정한 접면을 드러낸다. 감정이 포착되지 않는 시선의 흔들림 속에서, 내가 세계라는 외침은 내가 세계인식의 한계임을 규정함과 동시에 내가 세계를 이루는 관계망의 일부임을 환기한다.
〈이 세계의 증명사진〉은 얼굴이라는 기호를 통해 감정과 정체성이 단일한 이미지로 고정될 수 없음을 드러낸다. 증명사진이 원래 식별과 규격화의 매체라면, 이 회화 속 얼굴은 규정이 미끄러지는 흔적으로서만 남는다. 〈Drawing, Elsewhere〉는 식물적 형상을 통해 감정이 언제나 행위에서 이탈하는 과정을 시각화 한다. 겹겹이 쌓인 붓질과 흘러내리는 흔적은 감정이 현존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관계로 미끄러져 나가는 여운을 드러낸다. 이곳에 남은 것은 결국 흔적뿐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감정을 고정된 재현이 아니라, 불안정한 시각적 사건으로 다시 사유하게 한다.
우리가 하나씩 천천히 살려보았듯이, 《내 감정이 머무는 곳》은 ‘나’임과 동시에 세계이다. 감정은 언제나 규격화를 통해 환원되지 않고, 흔적과 파동, 울림과 공명 같은 것 들로만 드러난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세계속으로 분산되어 흘러가 버린다. 내가 간직할 수 있는 것은 흔적이며, 느끼는 것은 파동과의 마주침—즉 존재의 운동성—뿐이다. 문수민의 작업은 이 운동을 예술적 실험으로 제시함으로써, 감정을 플랫폼 질서에 기입하는 형식에서 벗어나는 소유 불가능한 것, 운동 속에서 우리와 함께 현존하는 —자기운동이자 세계의 체계로서의—울림으로 되돌린다. 이곳에 감정은 이미 없다. 이 지점에서 감정은 우리에게 자원의 논리와 도구적 합리성을 넘어, ‘세계 그 자체를 느낌’으로 다가온다.
[1]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데카르트의 연장(res extensa)개념을 비판하여 현존재와 존재자가 일상 속에서 도구를 사용하며 마주하는 방식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존재자는 현존재와 무관하게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사용가능성(손안에 있음: Zuhandenheit)과 지시 연관을 통해 연결되어 세계를 구성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비판 이론가들(프랑크푸르트 학파)은 존재자들을 과도하게 사용가능한 재화로만 바라보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한다. 이들은 자연을 도구적 대상으로만 이해하는 관점이, 이성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게 될 위험을 경고한다.
[2]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과성은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인식의 조건이지만, 동시에 물자체(Ding an sich)에는 결코 적용될 수 없는 한계라 말한다. 이러한 한계를 넘고자 하는 시도는 비인과적 세계에 대한 가시화는 인간 인식의 범주를 넘어서는 차원, 곧 세계 그 자체를 느낄 수 있는 비일상적인 시도가 된다.
[3] 있다는 것(존재)은 모든 존재자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당연히 인식주체도 세계속에 존재하는 것(존재자)이다. 앞서 밝혔듯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데카르트의 연장(res extensa)개념을 비판하였다. 데카르트는 물질의 존재를 우주의 공간(좌표)을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하였으나, 이러한 시선은 그 사물과 무관한 세계 밖의 관찰자의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존재 이해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대상들을 주체가 자신과 무관하게 조작하고 탐구할 수 있는 것으로 취급하게 했다. 그러나 대상과 우리는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이므로 단순한 공간의 점유가 아닌 그 대상과의 관계와 지향을 통해 존재를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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