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Yoorim: You-Who Saw Me Frist
서문: 침묵하는 존재들
김유림의 작업들을 바라보면, 이내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는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말이 없고 움직임이 없으며, 그 어떤 극적인 상황도 발생하지 않는 화면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 선 우리는 어쩐지 '관찰자'임을 자각한다. 그리고 동시에 누군가에게 '관찰 당하는 자'였던 순간을 겹쳐 함께 느낀다. 무표정한 시선들, 반복되는 장면, 어디서 본 듯한 풍경들은 일상의 구조 속에 매몰되어 있던 어떠한 감각을 천천히 떠올리게 한다. 작가의 작업들은 개별적으로도 풍부한 이야기를 제공해주지만, 여러 작업들을 포괄하며 바라볼 때 느껴지는, 반복적으로 배열된 이미지들 속에서 하나의 리듬을 생성한다. 전시장을 거닐며 만나는 작업들은 마치 공적인 행정조사가 진행되는 풍경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삶 속의 심드렁한 호흡처럼 감지되기도 한다. 작가의 작업들은 우리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우리를 마주하며, 그 거리에서 발생하는 정서적 거리감이 작업을 감상하는 감각의 주된 구성요소가 된다.
이때 느껴지는 거리감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세계를 인식하고 응시하는 관점의 거리감이다. 김유림의 작업들에는 ‘울타리’가 명시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자리한다. 그 울타리는 젖소와 인간 사이의 경계임과 동시에, 주체와 객체, 그리고 나와 그들을 나누는 기호가 된다. 우리는 항상 ‘이쪽’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전제를 안고 있으며, 그 반대편에 놓인 존재—‘그들’—는 대상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거리감은 우리에게 냉소나 단절의 표현으로만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그 거리에서 시작되는 사유와 공감, 그리고 소통의 가능성 또한 열어준다.
작가는 침묵하는 존재들에 주목하여 이들을 응시한다. 이 얼굴이 없어 구별될 수 없는 존재들은 침묵을 유지하면서도, 어떠한 말보다도 분명히 무엇인가를 전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물음을 넘어서, 우리가 어떠한 태도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되묻는 질문으로 다가온다. 젖소의 신체는 개성이 제거된 채 재현되며, 그들의 개별성과 서사성은 이표(耳標)로 대체된다. 이러한 무개성의 침묵은 무겁고 먹먹하지만 공허하지는 않다. 얼굴이 가려진 존재들은 오히려 더 강하게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고, 어떤 종류의 응답을 요구한다. 그 응답은 동정이나 회피가 아닌, 우리가 동일하게 반복하며 살아온 삶의 구조에 대한 자각의 요청이다. 작가의 작업들은 그들을 과거 속의 희생자로 호명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을 특별할 필요 없던 존재—매일 출근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병들고, 노쇠하고, 조용히 사라지는—로서 살아간 사람들의 형상에 겹치며 위치시킨다.
이 전시는 바로 그런 존재들을 위한 공간이다. 그들은 주목받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나를 먼저 본 당신’이라는 전시의 제목처럼, 우리가 그들을 보기 이전에 그들은 이미,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를 향한 그들의 응시 속에는 과연 무엇이 투영되어 있었을까? 그리고 그들을 향한 우리의 응시 속에는 어떠한 단절이 있을까? 김유림의 작업은 보이는 것들을 확장하는 가시화를 넘어서, 보는 행위 자체를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를, 그리고 나를,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마주보고 있는가?”
평론: 그들의 원죄가 아닌 축복이길 바라며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라앉은 고요속에서 커다란 화면들이 하나씩 시야에 다가온다. 정지된 듯 침묵하며 어떠한 삶을 수행중인 젖소의 신체들, 인물들의 식별을 불가능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그리고 누군가의 얼굴을 덮고 있는 무수한 이표(耳標)들이 있다. 김유림의 작업은 반복되는 이미지들을 통해 하나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리듬은 삶 속의 단조로운 호흡과, 그 호흡을 통해 나타나는 운동—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바이탈 사인(vital sign)—처럼 감지된다. 작가가 구성한 화면은 멀리서 바라본 풍경처럼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관객에게 다가서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우리의 앞을 떠나지도 않는다.
우리는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젖소와 인간의 차이를 정말로 알고 있을까? 단지 그것이 내 눈 앞에 있기에 내가 아니라는 —그것이 타자라는— 자연적 태도(natural attitude)[1]이외에 나열되는 부수적인 차이들은, 개별 사건을 초월할 수 있는 고정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우리는 눈앞의 그것이 내가 아님을 먼저 전제하며 그 이유를 파악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우리에겐 언제나 울타리가 먼저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를 젖소가 아니게 하는 이 울타리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김유림의 작업에는 다양한 시선으로 전제되는 울타리가 자리한다. 울타리는 타자화의 시작이자, 우리가 세계를 분할하고 의미화하는 기초적이며 일상적인 도구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울타리는 젖소를 둘러싼 시선과 구도 그리고 프레임에 구획된 시선 속에 은밀히 위치한다. 이 울타리는 시선의 둘러싸임 이자 인식의 틀이며, 동시에 정체성의 경계로 자리매김한다. 이때, 젖소와 인간으로 나뉘어진 구획—먹는 자와 먹히는 자, 응시하는 자와 응시당하는 자, 분리하는 자와 분리된 자와 같은—은 능동/수동의 상징적 구도를 가진다. 작가는 이러한 구도를 교란하면서도, 프레임 안에서 그것이 작동하는 과정을 시각화한다. 여기서 울타리는 분리의 기호로서 작동하여, 차이를 인식하고 성찰할 수 있도록 만드는 시선의 조건이다. 따라서 우리는 작가가 그리는 ‘저 너머’의 젖소들에게서 거리감을 느낀다. 그들은 건너편에 있기에 우리가 아니다.
거리감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태도 중 하나이다. 우리는 거리 속에서 사유하고, 관조하고, 분석한다. 김유림의 작업은 바로 이 거리감의 관조를 실천한다. 젖소와 인간 사이에 놓인 울타리는 분리의 기호이자, 관조의 조건이다. 그러나 이 거리감은 차이를 영원히 고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응시함으로써 그 차이의 윤리적 가능성을 사유하게 만든다. <교차로 위의 불청객>에서 등장하는 구강 파노라마 엑스레이 이미지와 젖소의 실루엣은 이 거리감을 다층적으로 구성하는 장치다. 젖소는 죽음 이후의 부재를 암시하듯 배경과 겹쳐 자리하고, 엑스레이 이미지는 식별가능에 대한 고유성의 의문을 담는다. 이러한 것들이 과연 그 존재를 대변할 수 있는 기호들일까? 이러한 보편 개념(universal)[2] 으로서 개체를 대하는 거리감 속에서, 관객은 그들을 응시하며 간접적으로 —그들을 고유성을 지닌 개체로 바라보지 않는— 보편적 시선에 동참하고, 그리고 이 동참으로 발생하는 관조는 다시 의문으로 이어진다.
김유림의 작업에서 젖소는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말하지 않으며, 시선을 마주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을 적극적으로 보호하지도 않는다. <누출>에서 젖소의 몸은 얼굴이 제거된 채, 젖이 떨어지는 장면만이 주목된다. 그리고 <식사> 에서는 수많은 젖소들이 일률적으로 식사에 몰두하며, 그 개체성은 소거되고 반복적 행위만이 강조된다. 이러한 장면에서 우리는 감금된 삶의 구조 속에서 기계적 기능으로 환원된 대상을 느낀다. 작가는 생산과 희생이 반복되는 현실을, 그것이 일상에 내재되어 있는 구조였음을 바라본다. 우리의 눈앞에 보여지는 반복적 일상의 장면은 개체의 일상성(alltäglichkeit)[3]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생명을 통제하고 사물화 하는지를 드러내는 관조적 시선을 가능하게 한다.
울타리 너머에 있는 그들은 무력해 보이면서도, 생을 연장하고자 하는 원초적 의지를, 수동적이며 의존적이지만 치열하게 이어 나간다. 그들의 이러한 특징은 우리가 울타리의 안이 아닌 건너편에 있기에 목격될 수 있는 것들이다. —분할을 통해 위치의 차이를 부여해주는— 울타리가 저 너머에 있는 그들의 일상성에 빠져있는 사건들을 대상화하여 거리감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거리감은 여기서 우리에게 관조의 자세를 취하게 한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아님’이라는 특징—배제와 대상화의 경험—에 공감하며, 우리가 아닌 건너편의 그곳에서 자기 자신을 함께 느낀다. 따라서 우리가 관조의 자세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우리와 다를 바 없다는 —어쩌면 자조적인— 공감이다.
이러한 공감을 통하여 일상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던 젖소의 시선을 목격하는 순간, 우리는 그들의 시선과 우리 자신의 시선을 겹쳐 위치시킨다. <목격자>에서 보이는 그들의 시선은 또한 우리의 시선이라는, ‘시선 자체(the gaze)’[4]를 마주하게 한다. 이 때 우리는 우리의 시선이 그들의 저 편에 있기에 그들의 시선이 우리와 다르다 느낄 뿐, 그 구조는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여기서 발생하는 시선의 대비와 교차는 단순한 동일시가 아니다. 이것은 비대칭적 관계 속에서 대칭성을 발견하는 —말하자면, 소통의 균형을 완성하는— 사건이다. 우리가 그들의 시선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시선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관조자의 위치에만 머물 수 없다. 김유림의 작업은 그 시선을 미세하게 조율함으로써, 관객이 ‘응시하는 자’에서 ‘응시당하는 자’로 전환되는 사건을 연출한다. 이때, 우리는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는 자이면서도, 동시에 그 울타리 안에 존재하는 자가 된다. 바라본다는 것은 방향이 있는 힘의 작용이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에서는 그 힘이 무력화되며, 보는 자가 본다는 행위 자체로 인해 불편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불편함은 회화가 현실적, 혹은 실재적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관객은 침묵하고 있는 듯한 젖소를 이표(耳標)에 가려진 얼굴 없는 존재들과 겹쳐 마주할 때, 자신에게 질문하는 동시에 스스로 그것에 답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김유림의 작업 속 이표에 가려진 얼굴들은 현재의 우리가 과거를 회상하며 바라보는 인물들이지만, 가족공동체의 역사성을 통해 이어지는, 일상성을 띄고 살아가는 —그리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사회구성원들의 얼굴과 겹친다. 작가의 작업에서 젖소의 귀에 붙은 이표는 농장의 통제 장치이자, 존재를 식별하고 기능화하는 사회적 구조의 축소판이다. 그리고 이것을 지각할 때, 작업 속의 이표에 가려진 그들은 과거의 어딘가에서 묵묵히 반복되는 삶을 살아갔던 사람들 —대체 가능하고, 규칙적으로 노동하고, 조용히 사라진 존재들—과 겹쳐지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특별할 필요 없던 사람들이었다. 평범하게 출근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고, 병에 걸리고, 노쇠하고, 아무 일 없이 하루를 마감했던 사람들. 그들의 삶은 영웅적이지 않았고, 드라마틱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매일같이 생을 반복하고, 타인과 관계 맺고, 누군가를 위해 기능하는 삶을 살아냈다. 작가의 작업 속 이표는 그런 삶의 형식을 축약한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비극적인 서사가 아니다. 이것은 일상의 리듬에 내재한 반복과 기능, 피로와 소진, 그리고 그 속에서도 생을 지속하는 존재의 형식이다. 김유림은 이들을 드러내지도 않고 영웅화하지도 않는다. 대신, 젖소의 이미지 속에 그들을 미묘하게 겹쳐 놓는다. 이들은 과거에서부터 지금 이 순간에도 반복되고 있으며, 바로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작업 속 이표들은 우리가 ‘살아냈던 방식’을, 그리고 어쩌면 지금 ‘살아내야 하는 방식’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이 반복되는 수행은 언제나 미완의 구조속에 있다. 그들과 이표의 결합은 필연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이표는 언제든지 타자와 구조에 의해 교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에겐 여전히 —그들이 그들이기 위해서— 현재 우리의 시선과 응답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우리의 응답은 우리 자신의 삶을 미리 완료할 수 없기에, 생을 지속하는 한 언제나 완료될 수 없으며, 그들을 맞이하는 매 순간의 마주침만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한히 펼쳐진 마주침을 ‘지금, 여기’에서 답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작가는 이들을, 개체를 통합하는 닫힌 전체성이 아닌 열린 타자성(the otherness)[5]에서 찾는다.
따라서 작가가 환기하는 감정은 애도나 비통함, 혹은 과거를 향한 부채감이 아니다. 김유림의 작업들은 과거를 현재의 시선으로 봉합하거나 박제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선형적으로 정렬된 인과적인 과거가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반복으로서의 과거이며, 현재와 통합되고 있는 —어쩌면 아직 그들이 아닌— 부분대상(partial object)[6]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작가의 시선을 통해, 현재의 우리가 그들의 삶과 닮아 있다는 고백 이상의 어떠한 전환점을 마주하게 된다. 이것은 ‘그들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는, 과거에 대한 부채의식이 아니다. 이때의 감각은 그들이 살아낸 생의 지속이 우리에게도 여전히 마주해야 될 것으로 주어져 있음 그 자체를 느끼는 것이다.
작가가 그려낸 젖소들의 형상에 투영된 존재들은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었고, 자신을 설명할 필요도 없었던 이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 가려진 얼굴들 앞에서 더 이상 —단절된 거리감만을 느끼며— 침묵할 수 없다. 그들의 반복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안에서 이어지고 있으며, 우리의 미래 또한 그 반복을 다시 수행하는 작업 속에 놓여 있다. 그들은 과거의 이정표가 아니라, 도래할 미래의 징후이자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자신의 반복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유비적(analogical)[7]인 것의 반복이다. 따라서 '나를 먼저 본 당신'이라는 메세지는,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보기 이전에 이미 누군가에게 바라보였던 존재였음을 자각하며, 그 관계의 반복 속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차이와 소통의 공간을 제안한다.
차이의 규정은 우리가 세계를 해석하고 응답할 수 있는 인식의 틀이다. 이제 우리가 서 있는 ‘울타리’앞의 공간은 이쪽과 저쪽을 나누어 구별하는 단절된 경계면 만을 뜻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세계를 분할하여 사유를 발생시키는 틈이다. 이 틈은 존재의 차이를 가시화함으로써 —타자의 출현을 통해— 구별됨을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바로 그 구별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전환시킨다. 김유림의 작업들 속 울타리는 타자화의 출발점이면서도, 동시에 전체성의 인식을 통해 타자를 응시하고 이해할 수 있는 윤리적 공간으로 다시 열려 있다. 우리는 그 울타리를 통해서 젖소—그들—를 바라보고, 그들을 통해서 우리의 응시를 되돌아보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울타리는 시선의 분절점이 아니라 응답이 요구되는 시선의 교차점이다. 즉, ‘관계 자체’를 사유하게 만드는 소통의 장소이다.
우리는 작가가 마련해준 소통의 장을 통해 일상의 매몰된 반복을 잠시 멈추고,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보며 살아왔는지—시선의 구조—를 관조할 수 있다. 이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만나는 젖소의 이미지 속에서 우리는 ‘그들’과 ‘우리’ 사이에 놓인 위계적 거리의 허구성을 자각하게 되고, 그 거리감 속에서 비로소 새로운 관계 맺기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된다. 이로써 울타리는 거리와 차이를 인식하면서도 그 차이 너머의 감각을 사유하게 하는 소통의 장소로 기능한다. 우리는 침묵과 응시, 반복과 소진의 순환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그들’의 생을 거리감의 관조를 통해 목격하며, 동시에 우리 자신을 다시 마주한다. 그렇게 울타리는 타자의 시선과 자신의 응답이 조우하는 윤리적 장소로 기능함을 김유림은 우리에게 제시한다.
[1] 일상적 의식이 세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무비판적으로 전제하고 살아가는 의식의 기본적 구조를 뜻한다. 후설은 『이념들 I』에서 ‘자연적 태도(natürliche Einstellung)’를 현상학적 환원과 대비되는 일상 세계의 태도로 규정하였다.
[2] 구체적 개체나 개별성을 지우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추상화된 인식 구조를 가리킨다. 이는 존재를 특정한 범주나 의미로 환원하는 사회적 분류와 기호화의 과정과 맞닿아 있다.
[3] 인간(현존재: dasein)이 평균적이고 비반성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상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일상성(alltäglichkeit)을 ‘공공성(offentlichkeit)’과 ‘타인들(das Man)’ 속에 빠져 있는 비진정한 삶의 구조로 설명하며, 이는 존재 망각의 상태이자 동시에 존재 물음의 출발점이 된다.
[4] 나와 사물을 대상화하는 존재론적 힘.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타자의 시선(le regard)을 통해 수치심이나 불안과 같은 실존적 정동이 발생한다고 본다.
[5] 레비나스에게 ‘타자성(the otherness)’이란, 타자를 나와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하거나 통합하려는 사유를 거부하고, 타자의 불가해성, 무한성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 개념이다. 그는 타자의 얼굴(le visage)이 나에게 자신을‘죽이지 말라’는 요청을 던지는 비대칭적 윤리 관계의 시작점으로 타자성을 사유한다.
[6] 정신분석학에서 타자와 전체적 인격체로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닌, 분절된 기능 또는 신체 일부만을 대상으로 삼는 관계 방식을 의미한다.
[7] 유비적(analogical)이라는 표현은 두 개체가 동일하지 않으면서도, 일정한 구조나 관계에서 유사성을 갖는 방식으로 연결됨을 의미한다. 고전 형이상학에서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현대 철학과 미학에서도 구별된 존재 간의 구조적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틀로 사용된다. 여기선 구조적 통합의 의미보단 동일함의 불가능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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