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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E Jun 17. 2024

[봄대표] 언제가 썼던 일기들 (2)

인쇄소에서의 PTSD


#1. 클라이언트의 회색과 나의 회색


아침부터 바쁘게 울려대는 전화를 받자마자,


아뇨 아뇨. 김대표님.

회색 같은 검은색이 아니잖아요.


아 그런가요?

너무나도 회색 같은 검은색인데

이게 칼라번호를 보시면 인쇄용이랑 PC용이랑 다른데.


아, 복잡해 그런 거 모르겠고.

내 눈에 그렇게 안 보인다니까?


네. 사람마다 다르게 보일 수 있어요. 색이라는 게.


아니. 내가 쇼핑백 종이 찢어서 보내줬잖아요.

그거랑 똑같이 해달라니까?


네. 최대한 맞추기는 하겠지만

미팅 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그건 쇼핑백이고

이건 전단지라서요. 종이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아니. 내가 이 일 하루이틀 하나.

알죠. 아는데. 보내준 시안은 너무 옅은 회색이라고.

김대표님 이거 전단지여도 전국으로 나가는 거라.

물량이 어마어마해요.

잘못 나오면 안 되잖아요.


아. 네. 그럼요. 

그럼 더 진하게 해서 시안 보내 드리겠습니다.


#2. AD의 회색


AD야, 더 진하게 해서 컨펌받자.


아, 그럼 사실과 다른데요.

이게 RGB 하고 CMYK가 다른 거라서 실제로는.


아 알지 AD야.

하지만 일단 찐하게 해서 보내줘.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할게.


네.


#3. 인쇄 사장님의 회색


여보세요? 아이고, 인쇄 사장님 안녕하세요.

저희가 이번에 전단지를 하는데요.


이게 방금 카톡으로 보내드린 그런 쇼핑백 같은 색으로 나와야 하는데요.


알죠. 알죠.

종이 자체가 다르다는 걸.

그렇지만 최대한 스노우지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찐그레이를 표현해 보지요.


고급스러운 거 아닌 거, 알죠 알죠. 


네네. 아시잖아요.

잘 부탁드립니다.




대행사는 나만 가운데서 잘하면 되는 일.

입만 터는 게 아니라

들어주고 설득하고 확인해 가며 끊임없이 나의 선택을 의심하는 일.


그렇지만

가끔은 아니 자주 울화통이 터지는 일.


너의 회색나의 회색AD의 회색인쇄 사장님의 회색은 다르다.

다른 의견들을 하나로 취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는 일,

그것이 나의 일.



언젠가 술 먹고 끄적끄적 썼던 일기를 들춰본다. 광고일이라는 게. 무릇 다 그렇고 이젠 익숙해졌다. 생각하지만 매번 매 순간 여전히 잘 모르겠다. 올해도 몇 개의 제안서를 썼고 몇 번의 희로애락이 있었는지... 기억도 못하겠다. 그냥 오늘을 산다. 오늘도 잘 버텼다.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지겠지-라는 희망으로 사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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