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집중하는 삶
얼마 전 점심시간에 한 대화 중에 우리가 스스로를 평가 절하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무겁게 나눈 이야기는 아니었다.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신의 만족도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온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때 나온 말이 '보통의 삶'이었다.
부자가 아니며 대기업을 다니지 않는, 보통의 학업을 마치고 보통의 과정을 거쳐 보통의 수입으로 보통의 인생을 살아가는 보통의 인생들. 이런 보통의 인생에 만족하지 못한다? 왜일까?
어떤 목적을 위한 동기 부여 방법에는 공포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어릴 때를 생각해 보자. "너 이러저러하면 이러저러하게 된다."라는 행동에서 오는 결과에 공포심을 주는 것만으로도 특정한 동기 부여가 생기게 된다. 그렇게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동기 부여가 생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공부를 못하면 실패다, 일류 대학을 진학하지 못하면 실패다, 대기업을 가지 못하면 실패다, 성공하지 못하면 실패다.'로 이어진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분법적 사고가 생긴다. 특별한 것을 동경하고 그렇지 못한 것을 하찮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상적인 것에 고정된 기준으로 자신의 상황과는 다른 풍족함을 꿈꾸기 때문에 고통받기 시작한다. 그게 커질수록 노력은 폄하되고 타고나는 것에 대한 열망은 커지니 더욱더 보통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실패로 보이는 것이 아닐까?
성공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사탕발림에 속아 내 보통의 삶을 실패한 삶이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정상, 비정상 그리고 성공, 실패 이렇게 두 극단적인 것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 두 가지 사이로 도처에 깔린 보통의 삶이 훨씬 더 다수다. 너무나 간단하게 성공과 실패를 설정하고 너무나 쉽게 실패했다 말하는 세상 속에서 내가 실패한 부류가 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스트레스를 부르고 번아웃과 우울증까지 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성공했다는 그 삶이 내게 훌륭한 지표가 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를.
보통의 삶은 나다움의 삶이다. 나다움은 각자가 다르기 때문에 모두에게 보통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나를 기준으로 상대방을, 상대방을 기준으로 나를 정의할 필요가 없다. 나의 보통이 가진 가치와 다양성을 무시하지 않고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내 보통의 삶이 주는 만족감을 충분히 느껴 보아야 한다.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이다. 누군가 정해주는 것으로 바쁘고 중요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보다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내 마음의 중심을 잡고 하루하루를 차근차근 살아내는 것으로 의미 있는 일상이,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나다움의 삶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눈 끝에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사실 보통의 삶을 사는 게 더 힘들어." 그래,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주말에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맛있는 것을 먹는 것, 퇴근 후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그저 온전히 나 하나 먹고사는 것 등 소소하다 할 수 있는 이유들로 만들어진 평범한 보통의 삶이 얼마나 쉽지 않아 귀한지 말이다. 그러니 누가 제일 성공했는지, 누가 제일 실패했는지 줄을 세워 그 순서를 확인할 것도 없이 온전히 나 자신의 오늘 하루, 내일 하루를 생각하며 보통의 삶을 살아내는 것에 집중하는 편이 훨씬 더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을 평가 절하하는 일도 없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