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디자이너로 일을 했을 때였다. 마감 일자에 맞춰 원고를 작성하는 손이 바쁘다. 침묵 가운데 아주 분주한 침묵이 이어지고 마침내 가볍고 끝장 있게 엔터를 치는 단단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곧 완성된 원고가 넘어오면 느슨한 몸(그리고 마음)을 세우고 긴장할 차례이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일을 하다 보면 뒤에서 들리는 타자 소리에 맞춰 박자를 타게 된다. 묘하게도 퇴근은 점점 늦어지는데 일이 참 재미있게 느껴졌다. 감을 잡았다는 느낌에 마음대로 내 앞의 키보드와 마우스를 잡고서 승률이 높은 키보드 원정대에 합류한 듯 어깨가 으쓱해졌다.
어느 날, 일을 하다 선배에게 회사의 경영 악화로 인해 잡지가 폐간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설마 그 정도일까, 이렇게 쉽게 접는다고? 믿기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폐간은 확정되었고 갑작스러운 퇴사가 정해졌다. 자리에 앉아 업무를 마무리하는데 더는 타자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에 서운함이 몰려왔다. 어느 곳에 이직하더라도 모두가 바쁘게 키보드를 쓸 테지만, 같이 호흡을 맞췄던 사람들과 예상치 못한 인사를 하게 되어서 더욱 아쉬웠다.
디자인 일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컴퓨터, 키보드, 마우스를 다루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중에 너무 빠르게 기술이 발전해서 컴퓨터를 다루는 게 어색해지면 어쩌지. AI에게 지시를 내리면 더 손댈 것도 없는 시대를 사는 지금 돌이켜보면 그 고민도 참 아날로그적이지만 말이다. 더욱 빠르고 간결하게 처리해주는 기술이 자리 잡겠지만 키보드 소리가 맞물려가듯이 컴퓨터를 다루며 합이 맞아가는 기분을 계속 느끼고 싶다. 어떤 새로운 기술이 나오더라도 항상 내 손에 익숙한 도구가 되어주기를. 컴퓨터, 키보드, 마우스야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