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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윤 Oct 18. 2020

베트남 2.
나 집에 돌아갈래

호찌민에서의 9시간

10월 31일




145 분짜


반미를 먹고 또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목적지 '분짜 145'에 도착했는데 저 굳게 닫힌 문과 불빛 한 줄기 없이 어두컴컴한 내부는 뭐란 말인가? 설마 문을 안 연걸까? 믿을 수 없는 마음에 가게 앞에 다가가 보니 오늘은 사정상 일찍 닫는다는 종이쪽지가 영어로 적혀 붙어 있을 뿐이었다. 


하아... 공항에 내려 하늘이 어둑어둑하더니 기어이 빗방울이 떨어질 때 조짐이 좋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분짜를 못 먹을 거면 내가 이 고생을 하며 왜 공항밖에 나왔단 말인가... 라며 망연자실해버렸다. 아까 먹으며 감탄했던 반미는 새카맣게 잊고 말이다. 


내가 가게 앞에서 미련이 남아 어슬렁 대고 있을 때 가게 사장님이 나오셨다. 정말 끝난 거냐고 묻자 미안하다며 오늘은 끝났다고 다음에 오라는 불가능한 이야기만 해주실 뿐이었다. 이제 5시인데 8시 정도까지는 이곳에서 뭘 하며 시간을 때운담... 우선 반미로 배는 부르니 베트남의 유명한 콩 카페라는 곳에 가서 다음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콩 카페, 코코넛 커피


콩 카페를 검색하자 이 위치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이 1.7km라는 결과가 나왔다. 너무 힘든데... 그래도 어쩌랴 분짜를 못 먹었음 콩 카페라도 가봐야지라는 쓸데없는 오기가 생겨 기어이 1.7km를 가기 위해 몸을 틀었을 때 뜻밖의 행운이 날 반겨주었다. 


분짜 가게 가까이에 바로 그 콩 카페가 떡하니 날 기다려주는 게 아닌가. 일이 죄다 꼬이기만 할 줄 알았는데 뜻밖의 행운에 몹시 신이 났다. 카페 안에 들어가 카페의 시그니쳐 메뉴라는 코코넛 커피를 시키고 분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분짜가 안된다면 쌀국수라도 먹고 가겠다는 일념으로 인근 맛집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좀처럼 가장 가까운 곳도 1km가 넘으니 고민이 시작됐다. 직접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내가 또 베트남에 간다면 그건 콩 카페 코코넛 커피를 먹기 위해서 일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쌀국수를 향한 집착


결국 난 기어이 쌀국수라도 먹어야겠다는 집착을 놓지 못하고 콩 카페를 나섰다. 사실 반미로 배도 찼고 후식으로 원하던 코코넛 커피도 마셨기 때문에 굳이 그렇게 쌀국수나 분짜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었건만 공항을 나설 때부터 분짜를 먹고 가야겠다는 목표로 나왔기 때문인지 분짜가 안된다면 쌀국수라도 먹겠다는 집착에 좀처럼 포기가 되지 않았다. 


구글 맵을 따라 쌀국수 맛집을 찾아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좁고 허름해 보이는 길가로 들어서서 가게 앞에 다 왔다고 생각했을 즈음 가게는 보이지 않고 문을 열고 앉아있던 할머니 무리와 어린아이가 무척 많이 경험해본 듯한 태도로 손을 훠이 훠이 저으며 여긴 그런 가게가 없다며 내몰았다. 잘못된 구글 지도 탓에 잘못 들어선 관광객들을 몰아내는 게 이젠 진절머리 난 듯한 아이가 No!!라고 큰소리로 나를 내쫒았다.



어쩔 수 없이 다음 순위로 정했던 가게로 다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렇게 터벅터벅 걷고 있을 때 노점 쌀 국숫집 작은 의자에 앉아 쌀국수를 먹고 있던 여자분을 발견했다. 그리고 대뜸 그녀에게 물었다.


"여기 맛있어요?"

"네, 나는 맛있는데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듯한 그녀가 나의 질문에 답했다. 그녀의 답변을 듣자마자 자리가 하나밖에 없던 그 노점에서 앉아도 될지 물어보고 철퍼덕하고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아버렸다.


맛집이고 뭐고 만사가 다 귀찮아질 지경이었다. 다리도 너무 아팠고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쌀국수 그까짓 게 뭐라고 이 고생을 하면서까지 찾아다녀야 하나 싶은 생각마저 들기 시작할 때였다. 그때 그녀가 보였고 무례하게도 갑자기 대뜸 질문을 해버리고 말았다. 맛이 없다 한들 가게 주인이 바로 옆에 있는데 맛없다고 할 수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맛있단 그 한마디에 믿도 끝도 없는 믿음이 생겨 합석을 제안했다. 



트란


그녀와 똑같은 쌀국수를 나도 주문했다. 영어를 모르는 주인에게 맞은편 그녀가 대신 주문해 주었다. 그녀의 말대로 싸고 맛있는 국수였다. 우리나라 돈으로 2000원쯤 하는 노점 쌀국수는 본토의 맛이라 그런가 값 그 이상의 맛을 내주고 있었다. 반미를 먹은 지 두 시간은 훨씬 지났었으나 배는 덜 꺼진 상태였는데도 맛있었던걸 보면 분명 숨은 맛집이 분명했다. 분짜와 쌀 국숫집을 찾아 헤매며 실패했던 그간의 고생들이 뜨끈한 쌀국수 한 그릇에 충분히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말갛고 진한 고기 육수가 토닥토닥 나를 위로해주었다.


"어때요? 맛이 괜찮아요?"


맞은 편의 그녀가 물어왔다.


"네, 맛있네요. 고마워요. 덕분에 맛있는 국수를 먹게 되었어요."

"다행이에요. 여행 왔어요?"

"한국에서 미얀마 여행했었고 호찌민은 경유하느라 쌀국수 먹으러 잠시 나왔어요"

"몇 시 비행기예요?"

"11시요"

"그럼 국수 먹고 시간 있어요? 나랑 핼러윈 파티하는 거리 구경하지 않을래요? 나도 여행 왔거든요."

"네 좋아요."



그렇게 갑자기 동행을 하게 된 그녀의 이름은 트란이었고 하이퐁이란 곳에서 여행을 왔다고 했다. 한국에도 여행 와 본 적이 있다는 그녀는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에 매우 호감도가 높은 편이었다. 일조 한 바가 하나도 없는 한류이지만 어부지리로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그렇게 즉흥 조인으로 함께 다니게 된 트란 언니 덕에 나는 10월 31일이 핼러윈 당일이란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어제 미얀마 펍에서 핼러윈 파티를 하길래 나는 어제가 핼러윈 파티 당일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오는 내내 보았던 핼러윈 장식은 아직 치우지 못한 어제의 흔적이라고만 생각했지만 핼러윈 당일이었던 것. 가는 날이 장날이 아니라 가는 날이 핼러윈 데이였던 것이다. 


쌀국수를 먹고 나간 길거리는 아까 내가 왔던 길이 아니었다. 인파로 넘치다 못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고 갖가지 분장을 한 사람들이 거리에 넘쳐나고 있었다. 



핼러윈 파티란 건 원래 이런 건가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국에서도 신경 안 쓰고 살아본 핼러윈 분위기를 베트남에서 이렇게 몸소 경험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바였다. 나름 철저히 분석하고 계획했던 계획에서 빠진 건 여행 막바지의 내 피로도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핼러윈 파티란 사실도 내가 놓친 부분이었고 브이 비엔 거리가 한국의 이태원 같은 곳이라는 것도 내가 체크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이렇게 놓고 보니 꽤나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계획이었다.


바나나를 사는 트란 언니


정신을 못 차리는 나와 달리 트란 언니는 이 분위기를 꽤 즐기는 듯했다. 핼러윈 장식 앞에서 사진을 찍는가 하면 무서운 분장으로 장난치는 사람들의 장난도 즐겁게 받아들였다. 그에 반해 나는 영 그곳에 스며들지 못하고 있었다. 내 차림새부터가 이미 그곳과 너무 이질적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길거리마다 물담배를 피워대는 사람들도 적응되지 않았고 백발의 외국인 할아버지가 10대처럼 작고 어리게 보이는 어린 베트남 여자들을 헌팅하는 모습에 속이 메스꺼웠고 술에 취한 건지 몸을 못 가누며 지나가는 여자들만 골라 놀래키며 킬킬대는 젊은 남자 무리도 반갑지 않았다.


트란 언니처럼 재밌는 부분만 즐기면 될 일인데 이상하게 내 눈에 눈살 찌푸리는 그런 장면들이 들어왔다. 이미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슬슬 이 거리에 점점 지쳐갔다. 하지만 즐거워하는 트란 언니 옆에서 지친 기색을 낼 수는 없었지만 인파에 막혀 100미터를 30분 이상이나 걸려 나가야 할 때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트란 언니와 다니며 제일 재밌었던 구간은 핼러윈 파티로부터 벗어난 뒷골목에서 바나나를 사러 갔을 때였다. 


먼저 앞서 나간 트란 언니가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는 나를 찍어주었다. 


나 이렇게 비행기를 놓쳐버리는 걸까?


핼러윈 파티로 혼을 쏙 빠지고 보니 8시가 좀 못된 시간, 이제는 공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트란 언니는 나를 배웅하기 위해 도로 길가까지 함께 나와주었다. 서로 sns를 공유하고 오늘 만나서 반가웠다며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꼭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아련하게 헤어지는 수순일 줄 알았는데 큰 문제가 생겨버렸다.


핼러윈 파티로 도로가 막혀 차들이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다. 10분 동안 내 앞에 서 있던 차는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공항에 갈 계획이었는데 버스는 고사하고 이 상황이라면 택시를 타더라도 공항에 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앞에 캄캄해져 왔다. 쌀국수 한번 먹겠다고 나왔다가 비행기를 놓치는 일화를 만드는 건가? 9시까지는 공항에 가야 하는데 9시가 된다 한들 이 도로가 뚫릴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애달파하는 내 옆에서 트란 언니는 침착하게 방법을 강구해냈다. 바로 오토바이 우버 그랩을 타고 가는 방법이었다. 아무리 길이 막혔다 한들 오토바이로는 어떻게든 갈 수 있을 거라는 묘책이었다. 


그랩 어플이 없는 나를 대신해 그랩 어플로 오토바이 그랩을 신청해주었으나 도통 올 생각을 않자 언니가 직접 도로로 나서 빈 그랩 오토바이를 잡기 시작했다. 만난 지 두 시간밖에 안된 나를 위해 언니는 마치 본인 일인 양 최선을 다해 그랩을 잡았고 이미 예약된 그랩을 몇 대 놓치고 나서 한대의 오토바이 그랩을 잡는 데 성공했다.

언니가 베트남어로 그랩 기사님께 공항까지 가 달라는 말과 나에게는 그랩 비용으로 얼마를 주면 된다는 것 까지 꼼꼼히 챙겨가며 나를 떠나보냈다.


다시 한번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잃어버린 내 국적


정말 언니의 말대로 오토바이는 그 막힌 도로 사이사이를 요리조리 잘도 피해 갔다. 덕분에 9시도 전에 공항에 내려 느긋하게 수속을 밟을 수 있었고 정말 체력도 정신도 혼이 쏙 빠져 찾아가야 할 게이트 번호를 찾기 위해 안내판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자니 누군가 뒤에서 일본어로 말을 건네 왔다. 


"혹시 도움이 필요한가요?"

"네?"

"길을 잘못 들어왔어요?"

"아니요. 괜찮아요."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멍하니 안내판을 보고 있어서 도움이 필요한 줄 알았어요."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냥 보고 있었어요."


안내판에 빼앗겼던 넋을 다시 주워 담고 나에게 말을 걸어온 그녀와 함께 게이트를 찾아 걸어갔다. 베트남 여성분이던 그녀는 일본에서 결혼해서 일본에서 20년째 살고 계시다고 했다. 지금 집에 돌아가는 길이시라고

나를 곤란한 상황에 빠진 일본인으로 보고 도와주려고 말을 먼저 건네셨다고, 대화를 하며 서로 일본인으로 생각했는데 한 사람은 베트남인, 한 사람은 한국인이란 사실에 많이 놀라긴 했는데 20년이나 일본에서 산 그녀는 그렇다 치고 나는 왜 이렇게 국적세탁이 자주 되는 건지



13일 여행의 종지부


잃어버린 내 국적을 바로 잡고 베트남 공항 샤워실에서 하루 종일 쌓인 매연, 땀 냄새 등을 싹 씻어 내렸다. 그렇다 베트남 호찌민 공항에는 무려 샤워실이 딸린 화장실이 존재했다. 이 또한 빈틈 많았던 처음엔 치밀한 줄 알았던 내 계획 속에 있던 것으로 물만 제공이 되므로 샤워용품은 따로 챙겨가야 하지만 무료 샤워장 제공만으로도 감지덕지, 공항의 배려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베트남 공항의 배려로 내 옆 승객은 지독한 땀내와 매연냄새로부터 고통받을 일이 없어졌고 나 또한 개운하게 여행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렇게 내 13일간의 여행은 호찌민 4시간의 여행을 끝으로 모든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만만하게 봤던 호찌민의 9시간이 이렇게까지 다이내믹할 것이라곤 상상도 못 한 부분이었으나 어쩄건 나는 무사히 비행기에 탈 수 있었고 핼러윈 데이가 10월 31일이란 것 하나만큼은 평생 가도 잊지 못할 만큼 각인될 수 있었고 하루에 국적을 두 번이나 잃어버리기도 했으나 대신 또 한 명의 고마운 인연을 만날 수 있었다.


아이는 혼자 자랄 수 없다고 하듯이 여행은 혼자 떠났다고 해서 결코 혼자 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며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고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의 본질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주고 받게 되는 관계성이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는걸 고작 십몇일의 여행만으로도 느끼고 경험할 수 있엇다.


 코로나로 여행을 못 가본 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돈과 시간만 있다면 어디든 못 갈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오만한 착각을 코로나는 삽시간에 깨부수어 주었다. 여행의 소중함 또한 배우게 되었다. 


여행기를 써가며 1년 전의 기억을 되짚게 되면서 다시 한번 감사했고 고마웠던 인연들을 떠올려 보았다. 다음에 또 만나요.라고 쉽게 건네었던 인사를 떠올랐다. 다음이란 그 기약이 너무 길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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