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윤 Aug 13. 2020

할머니의 식혜

문득, 그리워 지는 그 맛


주변에서 꽤나 할머니 입맛이란 이야길 종종 듣곤 한다. 아마 내 입맛과 식성이 결정지어질 나이에 할머니의 요리를 먹고 자란 탓이 아닐까 싶다. 우리 할머니는 맛의 고장으로 유명한 전라도 분은 아니셨지만 동네에서나 친척들 사이에서 음식 맛이 좋기로 소문이 좀 자자한 분이셨다.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고 뚝딱뚝딱 만들어내시는 것 같아 보였지만 할머니의 손이 닿은 음식들은 하나같이 맛깔스러웠다.  아마 기본 베이스가 된 할머니표 장들이 그 맛의 비결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사람이 호강을 누릴 때는 정작 그게 호강인 줄 모른다고 어린 시절 나는 왜 할머니는 햄을 안 구워주실까? 왜 우리 집엔 케첩을 뿌린 계란말이가 없을까? 이런 불만들을 품은 채 할머니표 자연밥상에 아쉬움이 많았. 소시지도 케첩도 없던 우리 집 밥상엔 새벽녘 밭에서 갓 따온 얼갈이 새순 잎과 밥통에서 쪄내 온 달걀찜, 강된장, 호박잎, 콩나물 무침 등이 차려져 있었는데 소시지에 대한 아쉬움은 있었을지언정 참 맛있게 먹던 기억이 있다.


그중 양념도 안 한 새순 잎에 밥솥에서 갓 쪄내 온 강된장을 얹어 쓱쓱 비벼먹던 그 비빔밥은 딱 그 시절에만 먹을 수 있었던 추억의 음식이 되어버렸는데 새순 잎이야 어찌어찌 구해 본다지만 밥솥에서 밥과 함께 보글보글 끓여냈던 그 강된장 맛은 아무도 구현해낼 수 없는 맛이고 아무도 구현해내지 못하고 있다. 가끔 기억 너머 그 강된장의 짭짤하고 구수한 그 맛이 어렴풋하게 떠오르며 그리워질 때가 있지만 아쉽게도 그 레시피는 전수받지 못한 탓에 입맛만 다실뿐이다. 그리고 그 레시피를 전수받았다고 한들 할머니의 장이 없이는 그 맛은 절대 구현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아쉬운 마음은 애초에 접었다.


하지만 아직도 배우지 못해 아쉬운 레시피가 있다면 바로 할머니표 식혜다.

할머니의 요리는 맛있긴 했지만 어린아이의 당 충전 만족도를 채울만한 게 사실 별로 없었다. 과자나 아이스크림류도 잘 못 먹게 하신 탓에 달달한 것에 대한 갈망이 컸다. 그럴 때마다 한 번씩 할머니가 해주신 식혜는 세상 그 누가 만든 식혜보다 맛있었다. 달달하지만 과하지 않았고 씹히는 밥알마저 적당히 퍼져 식혜를 음료로 마시기보단 밥그릇에 밥알을 한가득 국자로 퍼 담아 식사 대신으로도 즐겨먹었다. 물론 할머니는 식혜는 식혜고 밥은 밥이라며 밥을 건너뛰게 두시지 않았지만... 어릴 적 추억 보정의 맛이 아닐까 싶을 수도 있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할머니의 식혜 맛은 역시 세상 제일 으뜸이었다. 비교적 만들기 쉬운(?) 식혜 만드는 방법을 친척들이 배워 갔지만 이상하게도 할머니의 식혜 맛은 아무도 구현 내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손맛이란 게 참 무시하기 어려운 것 같다.


할머니 밥을 먹고 자라던 어린아이는 할머니의 품을 떠나 도시로 떠나버렸고 방학마다 도시에서 시골로 할머니를 찾아갈 때면 할머니는 말하지 않아도 항상 식혜를 한 솥씩 끓여놓으셨다. 더운 여름에도 추운 겨울에도... 한 그릇씩 뚝딱 하고 비워 먹는 손녀를 보며 저 한솥 네가 다 먹으라며 흐뭇해하셨는데 당뇨가 있던 할머니가 그렇게 자주 식혜를 끓이셨던 건 손녀를 향한 무뚝뚝한 경상도 할머니만의 애정표현이었으리라. 나이가 먹고 할머니가 잘 못 먹게 하던 과자도 아이스크림도 실컷 사 먹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젠 할머니 집 냉장고만 열면 있던 시원하고 달큼하던 할머니표 식혜는 어디서도 맛볼 수 없게 됐다.


가끔 할머니가 그리울 때 생각한다. 할머니의 식혜 만드는 법을 배워둘걸... 할머니에게서 그 어떤 요리도 배워놓지 못했지만 식혜는 배워둘걸... 손맛 좋던 할머니의 손녀는 아쉽게도 손맛은 꽝이라 반도 구현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배워둘걸...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