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존재의 부재

전할 수 없는 편지를 씁니다. 마음에 닿기를 바라며.

by 오융

한 번쯤 꼭 정리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버렸어요.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고민할 틈도 없이

열흘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렸어요.


함께 한 마지막 밤. 마지막일거라 생각도 못한 그 밤.


할아버지,

아직도 나는 실감 나지가 않아요. 어떤 게 꿈이고 어떤 게 현실인지 헷갈려요.

지나치게 맑고 또랑또랑하던 ‘전기 충격이 필요하지 않습니다.’라는 전자음도,

환청처럼 귓가에서 맴도는, 임종을 알리던 구급대원의 말도,

누구보다 편안하게 눈을 감고 주무시던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도.

그렇게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는데. 그게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명절이 끝나서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온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 명절에는 선물을 사가지 못했어요.

추석 전 날에는 백화점이 휴일이라는 걸 몰랐다는 건 핑계였을 거예요.

미리 준비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테니까.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다음이 있을 줄 알았거든요.

다음번 가족 모임 때 선물을 드릴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다음에 전화를 해도 받아주실 줄 알았고,

다음에 맛있는 음식을 사드릴 수 있을 줄 알았고,

다음에 찾아가도 언제든지 나를 반겨주실 줄 알았어요.

할아버지는 나한테 당연한 존재였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더욱더 죄송했어요.

마지막으로 보내드리는 길에, 할아버지의 재킷 주머니에서 나온 용돈 봉투를 봤거든요.

나는 당연하게 ‘다음’을 기약했는데, 할아버지는 매 순간마다 우리를 생각하셨잖아요.

언젠간 우리에게 이별이 있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그 순간이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


슬픔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흘러가고 있어요.


할아버지,

나는 더 이상 울지 않아요. 눈물이 나오지가 않아요.

울면 안 된다고 꾹꾹 눌러버리다 보니 정말로 내가 슬픈 것인지,

아니면 그럭저럭 괜찮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마음껏 슬퍼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거든요.


회사에서는 일을 해야 하니까 슬픈 티를 낼 수가 없고,

집에서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슬플 엄마를 위해 분위기를 밝게 해야 하니까요.

사진으로만 봤지만, 할아버지가 예뻐하시던 남자 친구 앞에서도 조금밖에 슬퍼할 수 없었어요.

내가 속상해하는 모습에 속이 타들어간다는 말을 들었던 게 생각이 났거든요.

그래서 나는 아직 마음껏 슬퍼하지 못하고 있어요.

아무데서나 슬픔을 드러내면 안 되는 나이가 된 건가 싶어서, 조금은 서글퍼졌어요.


당연하게 여기던 풍경에 새삼 감사하게 됐어요.


하지만 할아버지,

나는 이번 일을 통해서 당연한 것들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어요.

‘눈 뜨고 사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말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어요.

오늘 하루도 별 탈 없이 마무리하고 잘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어요.


그리고 매일 아침에 눈을 떠서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이, 가족들이랑 아웅다웅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이토록 아름답고 감사한 일인 줄 몰랐어요.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어요.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해요.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걸 아니까.

나에게 당연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떠나가 버리기도 하니까 말이에요.

그래서 더더욱,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됐어요.

하고 싶은 일을 망설이지 않고. 표현하는 걸 주저하지 않으면서요.

내일이 삶의 마지막 날이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그래도 마지막 하루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어서 감사해요. 부디 행복하시기를. 진심을 다해서 기도해요.


할아버지,

내가 아주 아주 많이 사랑하는 할아버지.

그동안 한 번도 드리지 못했던 고백이에요.


엄마를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별 없이 고루고루 예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왈가닥 손녀딸이랑 놀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할아버지라서 감사합니다.


더 잘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부디 그곳에서 편안하게, 행복하게 쉬시기를 바라요.


나중에,

우리 꼭 다시 만나요.

그때도 내 할아버지로 다시 나를 반겨주세요.


아주 아주 많이 사랑합니다.


2016.09.26